1화 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1)
현실이란 어쩌면 허무하기 그지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겨우 하루, 아니 그것을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으로 쪼개도 모자를 짧은 찰나에 일은 벌어졌다. 열심히 쌓아오던 인생의 조각이 전부 무산되어 버리고 뭔가로 새로이 쌓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신의 농간인 걸까.
“좆 됐네.”
이름 휘진 27살 군필 취준생, 재수해서 인 서울 공대, 현재 중소기업 인턴 중.
달리지 않으면 뒤처지는 한국에서 태어나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특별히 특출 난 점은 없다지만 평균 이하라고는 할 수 없을 인생의 한창이었으며, 점심시간이 끝나고 근처 저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8개를 사가던 길이었을 터이다.
갑자기 반전하는 시야와 눈부신 광채를 뒤로 망막이 타버리는 듯한 통증에 바닥을 뒤굴 뒤굴 구르고 난 뒤에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특색 없이 즐비하게 서있는 빌딩도 아닌,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도 아닌, 식후 몰려드는 잠을 참아내기 위해 담배를 피우러 나온 직장인들도 아닌, 그야 말로 판타지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풍광들이었다.
시끌벅적한 소음과 바닥에 돌을 깔아 만든 가도, 그 위로는 각양각색의 인종이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간다.
거대한 돌을 쌓아 만든 듯한 성곽과 하늘을 찌를 듯이(고층빌딩 만큼은 아니지만) 곳곳에 솟아있는 첨탑.
아무리 양보를 하더라도 대학 졸업장이나 토익 900점이라는 스펙이 통할 것 같은 곳이 아니다.
“길 한가운데서 뭐하는 거야, 저리 비켜.”
안 그래도 번잡한 가도 한 가운데를 막아선 휘진을 지나가던 행인은 톡하고 민 것뿐이었으리라. 허나 정신적 쇼크의 반동으로 신체의 탄력마저 잃어버린 그에게는 피니쉬 블로우 급의 충격이었다.
그는 그대로 주저앉아 주섬주섬 담배를 찾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릎으로 어깨나 머리를 치고 지나간다. 눈치에 나동그라져있는 아메리카노는 이미 짓밟힐 대로 짓밟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다.
“여긴 또 어딘데 시발.”
이세계라, 소설로도 만화로도 제법 접해본 기억이 있다. 평범한 주인공이 엉뚱한 세계에 내던져져 구르고 구르는 류의 소설은 몇 번 정도 본적이 있다.
대리 만족을 추구하기엔 주인공이 너무 처절하게 구르는 까닭에 금방 물렸던 기억이 난다.
일단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자 좀 진정이 됐다.
가도에서 물러나 벽에 기대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금발에 백발에 적발에 흑발에 머리통 색깔이 다 다르다.
“망했네.”
망연히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이 담배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 ◈ ◈
현실 부정의 일환이었을까.
이 세계에 왔다고 확실히 인지한 뒤부터 그가 느끼는 감정은 지금까지 달려왔던 인생에 대한 회의였다.
뭐 이런 것을 고난과 역경이라고 하면 비웃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2년간의 군 생활과 1년간의 재수생활, 4년간의 스펙 쌓기와 취업준비가 허공에서 폭발했다.
불꽃놀이라면 잠깐 예쁘기라도 하지 무의미하게 공중분해 된 인생 전반에 걸친 노력의 보상은 어디에서 얻으라는 말인가.
다행히 주인공 버프를 받아서 말은 통한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말이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이계의 말로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자각중이다.
제발 주인공이여야 할 텐데.
주인공 버프가 맞았으면 좋겠다.
3대 넘게 줄담배를 피우며 멍 때리던 휘진은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 역한 냄새를 풍기는 한 모금의 연기에 현실로 돌아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다.
하지만 추운 겨울날씨에 초가을에나 입을 양복을 입고 길가에 서있으려니 싫어도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손이 너무 시려서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부스럭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무엇인가 걸려 영수증인가하고 꺼내보니 곱게도 접혀있는 쪽지였다.
설마 얼마 전부터 은근한 눈길을 보내던 경리가 오늘 몰래 넣어둔 러브레터인가 싶어 펼쳐봤지만 괴상한 글씨로 삐뚤빼뚤 적힌 알 수 없는 종이였다.
아니 자세히 보면 한국어이다.
그런데 너무 못써서 한국어처럼 보이지 않는 글 내용을 힘겹게 읽어간다.
“흠, 이계에 온 걸 환영한다. 넌 시간을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다.”
한숨에 읽어서 쉽게 읽은 것처럼 보인다만 무려 3분이란 시간을 썼다.
누가 썼는지 몰라도 더럽게 못썼다.
글 내용자체는 그렇다 치고 상당히 쇼킹한 내용을 써주셨다.
휘진은 이 상황 자체가 개꿀잼 몰카인가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메라라도 있으면 반드시 찾아서 그걸 붙잡고 있는 놈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줄 작정이다.
아무리 이세계에 가면 주인공 버프를 받는다지만 끽해야 뒤져야만 발동하는 세이브 포인트를 얻는다거나, 말도 안 되는 중고딩 논리로 어물쩍 넘어가는 특별한 마나 수련법 같은 게 고작일 터인데.
시간 정지라니.
OP이다.
즉, Over power, Over balance이다.
먼치킨물도 이런 능력은 안준다.
왜냐하면 스토리 전개하기가 더럽게 힘들기 때문이다.
휘진은 추운 것도 잊은 채 쪽지를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다.
불과 20분도 되지 않는 동안 인지를 넘나드는 대 사건 2개가 일어난 탓에 두되가 역회전하는 느낌이다.
허나 속지 않는다.
어디선가 허둥대는 반응에 낄낄 거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표정관리를 한다.
“잠깐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표정 관리에 온갖 힘을 쓰고 있던 휘진에게 나타난 것은 2명의 갑옷남과 갑옷녀.
일명 플레이트 갑옷이라는 것을 입은 경비병 캐릭터였다.
물론 진짜 사람일 테니 캐릭터는 아니지만 복장이 너무 NPC스럽다.
투구의 눈가리개까지 한 남자 경비병들과는 다르게 그 둘을 양옆에 낀 여자는 금발에 에메랄드 눈동자.
이세계 판타지 히로인의 정석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아름다운 NPC였다.
굳이 말하자면 도주 중인 공주의 시중과 호위를 겸하면서 악은 처단하며 불의엔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신념을 받들어 공주님을 모실 것 같이 생겼다.
그다지 길지 않는 금발은 질끈 묶어 업 테일 중. 여성스러운 교태보다는 산뜻하기까지 한 청량함이 느껴진다.
“눅….누구신데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태연하게 대처하려 했건만 혀를 씹었다.
이런 휘진의 반응이 미심쩍었는지도 모른다.
갑옷에 비상하는 매의 문양을 보고도 누구인지 짐작하지 못하냐는 눈빛이기도 했다.
“최근 성내의 분위기가 흉흉하여 불심검문 중입니다. 신분을 증명하실 수 있는 물건이나 문서가 있으십니까?”
사원증을 제시하면 넘어가줄까 해서 넘겼다.
“일단 구치소까지 동행하시죠.”
얄짤 없이 끌려갈 상황이다.
“자…잠깐만, OO전자 몰라? 연 매출 300억대의 나름 강소기업이라고!”
한 대 맞았다.
경비병에게 붙들려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던 거다.
“야, 몰카면 사람 때려도 돼? 당신들 다 고소할거야 빨리 나와! 카메라 나오라고!”
바닥에 누워서 떼를 쓰자 가차 없이 부츠에 밟혔다.
추위에 진흙마저 얼어붙은 겨울철 바닥은 차가웠고, 부츠의 바닥은 그보다 단단하고 차가웠다.
“수상한 녀석이군! 동료에게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기절시켜!”
결국 이마를 발로 밟힌다는 거친 선택지에 의해 기절해버렸다.
◈ ◈ ◈
정신을 차린 곳은 감옥이었다.
이마가 화끈화끈 아프다.
만져보니 피가 굳어 딱딱해진 딱지가 앉았다.
몰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시간아 멈춰라!”
어차피 갇혀있는 마당에 남는 게 시간이니, 쪽지에 적혀있던 시간을 멈춘다는 능력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그마한 돌덩이를 집어 허공에 던지자 공중에 고정되기라도 한 듯이 멈춰있다.
“진짜네.”
대성공이다.
이걸로 잃어버린 스펙에 대한 보상은 충분하다.
허나 시간을 멈춰버린 채로 그대로 두면 감옥에서 나갈 시간도 길어질 터이니 시간정지를 해제했다.
얼마 뒤 열쇠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내려왔다.
아까 그 예쁘장한 누님과 똘마니 둘이다.
“대공님께 이송해.”
이쪽으로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차갑게 선고한 그녀.
휘진은 그 즉시 머리에 무언가가 씌워지고 아까처럼 양팔을 붙들렸다. 그리고 양 옆의 사람들에게 이끌려 3개 정도 빙글빙글 도는 계단을 거치고 3개 정도 되는 방문을 지나 뭔가 높으신 분이 있을 것 같은 방에 도달했다.
“대공님, 오전에 보고 드렸던 첩자로 의심되는 자입니다.”
“저 첩자 아닌데요.”
“닥쳐라!”
가차 없는 주먹질이 등을 강타했고 휘진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예상도 못한 타이밍에 맞아서 더 아프다.
한 마디 했다고 사람을 패다니 진짜 미친 새끼들이다.
“용수만 벗기고 나가보게나.”
대공이라기에, 늙다리 할아버지일 줄 알았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리게까지 들리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죄수의 머리에 씌우는 용수를 벗긴 똘마니 둘은 퇴장하고, 누님과 대공님만 남았다.
“재미있게 생긴 녀석이구나.”
자단목 책상 위엔 산처럼 쌓인 서류와 책들이 있었다.
대공은 손끝에 뭍은 잉크를 물로 적신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백발에 하늘색 눈동자 속눈썹의 숱이 굉장히 많아서 눈꺼풀에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누님도 어디에 꿀리지 않은 미모지만 대공님은 당장이라도 전시해서 만인의 즐거움이 되어야 할법한 인형 같은 소녀였다.
팔도 다리고 가느다랗다.
아이돌도 능가할 외모 대단합니다.
“누군가 과잉진압해주신 덕분에 좀 더 찌그러졌습니다요.”
“네 이놈!”
어차피 최강의 능력도 얻었겠다. 볼멘소리 좀 해봤다.
예상대로 발끈하는 누님이지만 아까처럼 때리지는 않는다.
아까 때린 녀석은 똘마니였나 보다.
“그대의 소지품을 조사해 보았지만, 전혀 본적이 없는 진기한 물건들이더구나. 어디에서 왔느냐.”
“일단 첩자가 아니라는 부분을 확실히 하고 싶은데요. 대공님.”
“그건 이 몸이 판단할 일이니라.”
재미있다는 듯이 지갑과 핸드폰을 만지는 성주님은 아아, 눈부시게 아름답다.
꽤나 폭거에 가까운 행동을 당하고 있지만 휘진이다. 하지만 대공이라는 소녀의 눈과 귀와 발과 손을 핥을 수만 있다면 거뜬히 용서할 용의가 있다.
“언행을 삼가라 네 눈앞에 계신 분은 슐레스비 제국의 베아트레아 대공 저하이시다. 네가 지금까지 혀가 뽑히지 않고 있을 수 있던 것은 대공 저하의 자비덕분임을 잊지 마라.”
이름이 긴 것만 봐도 뭔가 굉장히 높으신 분 같다.
이렇게나 예쁜 데 높으신 분이라니 이래저래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사람이다.
“너무 겁주진 말게나, 아리스. 지금까지는 명백한 혐의도 없는 수상한 자를 소지품이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 끌고 온 것이니 말이다.”
너그로운 대공님의 말에 뭔가 마땅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누님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대기했다.
누님의 태도는 무사의 귀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더라도 신분제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휘진으로서는 그 오버스러운 말투도 연극의 일부로만 보일 뿐이다.
현실이지만 현실과 명백히 유리, 격리되어 버린 느낌.
마치 극중에 혼자 붕 떠버린 메타 캐릭터가 되어버린 것 같다.
휘진은 이런 의식의 흐름에 편승하여 시범삼아 시간을 멈춰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