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자기 차례(3)
실은 이러한 대화의 내용보다, 이루어지는 과정 자체가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욕실에서의 물기가 남은 흔적이, 희민이가 금방 샤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쩌면 희진이일 수 있었겠지만, 나처럼 학교에 갔을 테니까 소거법으로 희민이겠지.
"키힣-."
웃음소리마저 음침해서 저도 모르게 거리를 벌리는데, 이런 행동이 무색하게 다가온다. 특히나 편견다웠던 외향적인 모습이 거짓처럼 스스럼없이 친근하게.
"마시찌 자기야."
더군다나 이처럼 자신은 먹지 않고 먹여주는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고분고분 따랐다.
"어엉, 마히서."
아직 입에서 우물우물하는데 집으려던 젓가락질을 막으면서 애써 대답.
"쿻…후후훟-."
그러자 뺨에 손을 받치고 구경하는데, 입안의 내용물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 이럴 거 같아서 천천히 먹기로 했다.
"우물우물…."
찬찬히 씹으면서 괜스레 둘러보는 주변. 배시시 웃는 눈꼬리 위로 머릿결이 살짝 젖어 있어서, 아마도 막 샤워를 해서 그런지 손을 가까이 가져올 때마다 비누 향이 풍겼다. 아까 뒤에서 껴안았을 때도 코가 흠뻑 하고 맛이 갔었는데, 지금은 장어 냄새가 뒤섞여져 겨우 참을 수 있는 성적인 요소.
"쿻-."
단아하달까, 향기로운 체취를 풍겨대면 저절로 손이 가버릴 거 같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자기야, 나도오."
"어 응. 알았어."
일부러 희민이랑 거리를 두긴 했어도, 모처럼 음식도 사줬는데 너무 나만 생각한 거 같아서 해달란 대로 먹여주는 손길. 언제 자기도 먹여달라 그럴지 상정해서 기다렸었다.
"아-읍, 냠!"
성격이 바뀐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활발한 움직임. 겉모습이야 늘 피곤해 보여서 눈 밑에 다크서클은 여전한데, 태도는 희진이 못지않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헤헤 웃으며 먹으니까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무언가 원만하지 못하고 거북스러운 느낌. 각자 알아서 먹더라면 차라리 그냥 그랬을 텐데, 본인이 먹기보단 서로가 먹여주니까 몹시 못마땅했다.
"헤-힣."
그렇다고 기쁘게 방실방실해서 따지거나 화내기도 그랬고.
"꿀꺽. 저, 희민아?"
음식 삼키기가 무섭게 새로 장어를 먹여주려는 희민일 말리면서 불렀다.
"웅? 왜 불러 자기야?"
자기야 자기야, 말끝마다 그 단어가 무척 거슬려 부들부들 떨리는 눈썹.
"이제 슬슬 알아서 먹고 싶은데…."
내 건 희민이한테, 희민이 건 나한테 주느라 정작 자신이 고른 것을 스스로 못 먹고 있었다.
"내가 주는 음식이 별로야?"
"아니, 그건 아니고."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알면서도, 듣는 사람 나쁜 놈 만드는 말투.
"그럼 반찬 투정 부리는 거야 자기?"
"왜 그렇게 받아들여…."
이거 참 듣는 사람 난감하게끔 조성한다.
"그런 게 아니면 입 벌리고 이거 먹어."
결론은 제자리걸음. 희민이가 주는 대로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서 먹어야 했다.
"우물우물."
거절하지 못하고 주는 대로 먹기만 해주니까 연이어 움직이는 손길.
"키-힣…."
먹는 모습조차 귀여워서 어서 먹이고 기운 차리면 내 차례를 만끽하고 싶었다.
"우-움."
그러다 질 수 없다는 듯이 장어를 집어 내게로 내뻗는 손. 마치 질 수 없다는 듯이 내밀어서, 자신이 먹은 만큼 내게도 먹일 생각인 거 같았다.
"쿻-! 난 자기 먹는 모습만 봐도 좋아."
그래봤자 거부하면 그만이지만.
"우물움, 물…."
설마 내 쪽에서 거절할지 몰랐던 탓에 힘없이 손을 떨어뜨리는데, 나도 상명이에게 음식을 주는 건 여기까지 하려고 했다.
"히히힣."
제대로 감상하고자 두 손을 벌려서 뺨을 받치며 괴는 턱.
"아이구- 잘 먹네 우리 자기이."
사랑스러운 연인처럼 말해도 봤다. 문제는 우리가 진짜 연인이 아니라는 점이지만.
"우물우물우물…."
희진이처럼 닭살 돋는 언행에 비해 돌아오는 건 싸늘한 눈초리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희진이처럼 진짜 연인은 아니더라도, 인스턴트 같은 애정을 원했으니까.
"자기는 돈 생기면, 어디다 쓸 거야?"
마냥 이토록 먹기만 하면 심심해서, 민감하지만 궁금한 화제를 꺼내 봤다.
"…꿀꺽. 음-, 글쎄?"
해봤자 오십 만원. 크다면 큰돈이지만, 구체적으로 정할수록 돈이란 너무 쉽게 소모돼 그렇게나 큰돈이랄 것도 없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볼 게 자기, …희진이랑 뭐 할 거야?"
나랑 있으면서 희진일 생각하는 낌새라 아예 내 쪽에서 밀어주는 화두.
"희진이랑은 어…맛있는 거 먹고, 놀이공원도 놀러 가고. 아! 옷도 사주기로 했어."
"어, 그래?"
전의 질문과 딴판인 수준으로 활기차게 일일이 대답하고 자빠졌다.
"재미없어…."
"그런가?"
뻔한 레퍼토리라 되지 않는 참고.
"자기를 위해서는 안 쓸 거야?"
"음…별로 생각 안 해봤는데?"
예감했던 그대로라서 약간 지루했다.
"좀 인간답게 자신을 챙겨 봐 자기. 진짜 재미없다니까?"
하다못해 게임기를 사던가. 만약 희진이랑 사귀지 않았다면 필시 부모님께 드린다면서 갖다 바칠 녀석이었다.
"하하, 내가 생각해도 그렇네."
나름 충고해 주는 건데, 그냥 그럭저럭 까인 줄 아는 모양.
"큿…."
바보같이 웃어버리는 양상에 내가 다 불만이 생겨버린다. 그렇다고 이러한 천성 고치기란 쉽지 않아 보여도.
"자, 자기. 이거나 먹어."
"어 으응, 고마워…냠."
처음엔 한껏 애정을 담아 먹여줬지만, 이번에는 심히 언짢음을 보이며 건네주니까 내 눈치를 살피면서 입에 담았다.
"쿠-훟."
그나마 이런 모습 덕분에 식어가는 성질머리. 상명이가 귀엽지라도 않았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자기야, 요즘은 어때?"
우중충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우쭈쭈 해주려고 보니까, 우리 사이에 별다른 대화거리가 없어서 일단 안부를 꺼내 봤다.
"꿀꺽, …힘들어."
짧은 한숨을 쉬며 힘듦을 토로.
"…왜-에? 뭐 때문에?"
다시 생기를 품고 대해주려는데, 이런 마음 먹기가 싸늘해지게 우는소리를 했다. 더군다나 힘들게 한 원인이 누구인지는 서로가 아는 상태. 그도 그럴 것이, 상명이의 흔들리는 동공이 나를 바라보며 얼추 따지려 들고 있었다.
"뭐가 우리 자기를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을까?"
이처럼 내가 방해물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뻔뻔하게 구는 건, 앞으로의 반응이 궁금하니까.
"오늘은 정말 쉬고 싶었는데, 끙-…."
자신보단 남을 생각하던 상명이가 자기 입으로 고충을 내색해서 정말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에 내가 너무했나 싶기도.
"쿠-훙, 알았어 자기. 자기는 자지만 세우고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 테니까."
가능하면 오늘도 격렬하게 해보고 싶었으나, 이렇게까지 징징거리니까 오히려 안쓰러워졌다.
"끄-응…."
내가 이렇게나 애써준다는데, 썩 탐탁지 않게 뭐 마려운 표정.
"왜 그래 자기? 싫어?"
되도록 맞춰주려고 하는데 자꾸 이견을 내면 자비도 없이 괴롭혀줄 거다.
"아아니 그건 아니고…."
여자한테 맞춰주는 성격은 좋은데, 너무 눈치만 보면 또 우유부단해 보여서 점차 불어나는 싫증. 아무리 기가 빨려서 지쳐 있다고 해도, 나 역시 받아주는 것에 한계가 존재했다.
"있지 자기. 아까부터 우는소리 하는데, 계속 그렇게 나오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사근사근하면서 짐짓 참는 듯한 음성.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는데 굳이 맞춰 줄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사고가 지배하여 상명이에게 경고를 직언했다.
"읓-! 미안해…."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움츠러든 어깨. 딱히 이런 모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기왕 하는 거 즐겁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했다.
"하아, 아니야. 어차피 상명이 넌 희진이 생각뿐이라, 나랑은 이런 소꿉놀이조차 힘들다는 거겠지…."
"…어?"
별다른 징조 없이 차올라버린 분노. 내가 생각해도 난 아이를 키울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냥, 그냥 난. 이미 엎질러진 물, 나하고 있을 때만이라도 온전히 내게 맞춰줬으면 싶어서."
모처럼 잘해주려니까 울상을 지속해서 터지고 만 울분.
"자기가 생각하는 도덕적, 도의적인 거? 내가 또 어떤 명분을 만들어줘야 해?"
안 그래도 착해 빠진 천성을 배려해서 나 혼자 나쁜 년이 됐건만, 이래도 부족한지 여전히 간만 보고 있어서 아직도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자기 사진 뿌리겠다는 공갈? 희진이의 경제적 생살여탈권을 쥔 협박?"
어디까지나 상명이가 내게 복종해야 하는 상황을 주도하기 위한 발언들. 실제로 이러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아…. 자기는 진짜, 내가 나쁜 년이 아닌 걸 감사해야 해."
한사코 착한 척하는 상명이가 얄미워, 참아왔던 답답함을 폭발. 많이 급발진한 까닭은, 솔직히 반만 진심이라서 절반은 영악하게 구상했던 계획이었다.
"아……."
뜬금없이 터트린 화에 놀란 나머지 끝내 입을 떼지 못하는 상명이.
"현찰, 여기 둘게."
시기적으로 지금 사과를 들으면 안 된다. 살짝 뜸 들인 상태로, 미안해서 움직이려고 하기 전에 자리를 떠나 남기려는 복잡한 기분. 상명이를 만날 때마다 연일 연기만 늘어난다.
"돌아갈 거면, 그래도 좋아."
나한테도 조금 미련이 남는 듯한 목소리로 흘깃하지만, 대놓고 쳐다보지 않고서 뒤로.
"대신에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오늘처럼 상냥하게 구는 건 영영 없을 거야."
양자택일을 내놨으나 결코 거부하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았다.
"…."
이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상명이. 솔직히 계속 상명이의 울적한 얼굴을 보고 있다간 울컥하고 소리지를 거 같아서 돈 봉투만 두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쿠-훟."
방으로 들어오자 간신히 내뱉는 미소.
"쿠후후후훟."
문을 꼭 닫고 나서야 고개를 숙이면서 웃었다.
아-…너무했나?
고전적인 수법인 당근과 채찍. 이 경우엔 채찍과 당근일 거다. 물론 상명이가 나를 따라와 속절없이 말을 들어준다는 전제하에. 순박한 상명이의 성격이라면 얼마 못 가 들어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진짜로 가버리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발뺌하여 여태 그랬던 것처럼 대할 거지만.
"하-…."
일단 채찍을 사용했으니, 들어오면 당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잘해줄 거다. 문제는 상명이가 이런 방식에 굴복하냐는 거였지만.
"…괜찮겠지."
항상 이래 왔으니까, 별문제 없을 거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해서 망연히.
"……."
미처 반응할 새도 없도록 떠나버린 희민이의 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뭐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돌이켜 봐도 알 수 없는 행태. 대비하려고 했어도 일말의 징조 없이 이러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다.
"잘못은 자기가 했으면서…."
가해자인 주제에 피해자한테 뭐라 뭐라. 비록 내가 희민이한테 정성이진 않았어도, 그거야 당연한 거였다. 우린 지금 도의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거니까.
"…끙-."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뭔가 설움에 복받쳤던 실태라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 괜히 식탁을 쳐다보니까 절반 이상 먹어버린 고기.
"쩝…."
꾸역꾸역 이긴 했어도, 최대한 나 많이 먹으라고 해줬던 모습들이 눈에 밟혔다.
"하하."
이 와중에 배는 불러서 정리할까 싶은 생각. 이럴 땐 아무런 생각하지 말고 뒤따라가야 정답일 텐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진짜 가도 되는 걸까?
도시락의 뚜껑을 닫고, 일회용품은 분리수거하여 쓰레기봉투로. 희민이의 말마따나 이대로 집에 가기엔 왠지 두려워서, 뭔진 몰라도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일단 그녀를 말리라고.
"…하-아."
근래에 한숨만 늘어서 내가 진짜 뭘 하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그렇게 주방 정리를 마쳤음에도 나올 기미가 안 보이는 희민이. 복도에 서서, 희민이 방과 현관문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등이 생겼다.
지금 즈음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방으로 돌아오고서 기다린지가 대략 오 분 남짓. 정말로 집에 가버린 거라면 내 생각보다 간이 큰 거라고 보면 될 거다. 이미 시물레이션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데, 이런 결과를 상명이가 설마하니 저질러버리리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크-흫…."
점차 시간이 길어지자 애가 타는 건 나 자신이었다. 상명이를 부른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아, 자기?"
실망과 더불어 화가 치밀하게 쌓일뻔 하다가 문이 열려서 기쁨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