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3화 〉자기 차례(1) (103/107)



〈 103화 〉자기 차례(1)

내가 너무 어렵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섹파, 섹파라…해외에서는 제법 자유로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서로 간의 합의가 이루어져서 진행되는 일이다.

근데, 희민이랑 나랑은?

"하-…!"

가스라이팅, 스톡홀름 신드롬.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그럴듯한 단어를 배치해봤지만, 나는 분간할 수 있었다.

"최초의 잘못을 묻어가면서 이득을 취하려는."

그런, 계략….

"…젠장."

이런 요점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는 주제에 이렇게나 스스로 안타까운 건, 나 또한 희진이에겐 배신자 내지 가해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

겉으로는 행복한 우리에게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처음 희민이에게 협박당해서 노리개로 놀아난 것이 원인. 그리고, 중요한 건  사실을 함묵하여 희진이에게 이실직고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희민이의 농락에 이끌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등신."

누가 보더라도 자신은 강간당한 피해자였고, 이제는 협박까지 당해서 안일하게 잊어버린 사실. 정상참작이란 단어를 방패 삼아서, 언젠가는 희민이한테 반격하고 희진이에게 고백하여 용서받는 시나리오를 바라고만 있었다.

"…진짜 등신."

너무 신중했던 까닭일까? 찌질하게 울지만 말고, 급소를 맞았어도 희진이에게 알렸어야 했다. 하나 이때에 와서 언급하기란 심하게 늦어버린 느낌이 다소.

"내가 너무 보수적이었던 걸까…?"

솔직히 희민이의 말처럼 섹파, 백번 양보해서 그래…좋다. 이미 할 거 다 한 와중에 인정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이건 범죄니, 도의적으로 옳지 않느니 따지는 거야말로 진짜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논점은 내가 희민이의 계획에 속절없이 흘러가 버려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희진이만 덩그러니 혼자가 됐고.

"하아…."

피해자라던가 가해자라고 따지는 것도 처량해졌지만, 이게 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져서 변심한 걸지도 몰랐다. 그걸 지금 내가 체험하는 바람에 혼란스러워도 익숙해진 상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점차 아무렇지 않아지는 내가 역겨워졌다.

"그래서."

해결방안은?

"…."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도리가 없었다. 아니, 사고가 가로막혀 막막히! 현재의 형편에서 희진인 피해자이자 인질이었다.

그것도 가족이 주도하는….

가장 해결을 바라면서 어려운 골칫거리이자  문젯거리. 가족이라고 자기 하나뿐인 언니란 인간이 자기 동생을 담보 삼아 협박의 주체로 삼았었다. 심지어 지금 와선 나에게 저질렀던 일을 묻으려는 동시에 희진이에게 자신의 음흉한 꿍꿍이를 설파하기까지.

"…."

만약에라도 희진이가 희민이에게 나와의 관계를 허락하는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 속으로 빠질 거 같았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부여잡기엔 벌써 가까워진 집. 구태여 집안까지 복잡한 마음속을 품고 갈 생각은 없었기에 환기하고자 일단 마트에 들리기로 했다.

"비빔냉면."

비빔냉면이라고 그랬지.

장바구니를 들고서 처음부터 고른 건 희민이가 바랐던 비빔냉면 봉지였다.

그러고 보니 기왕이면 집에서 요리사로 일해달라고 했던 거 같은데….

"……."

딱히 희민이에게 당장 해주려고 사는 건 아니고, 어머니도 좋아하셔서 저녁으로 해드리려고 골랐다. 나름의 죄송함을 담아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맛있게 해드리면 기분도 풀어지시겠지.

"쩝-."

이제  집으로 들어갈 텐데, 희민이에 대한 고민을 미루려다 다른 안건에 대해 새로이 따져보려고 한다.

"알바라…."

돈이라고 해봤자 부모님께 타서 쓰는 것이 고작. 그런 나에게 직접 벌어서 쓰는 돈이란 확실히 특별하게 다가왔다.

"끙-."

함부로 쓰기도 그렇고, 바라는 대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 지갑  사정. 나름대로 저금도 하고 있었지만, 그래 봤자 버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아낀다 한들 한계가 있었다. 특히나 혼자서는 몰라도 씀씀이가 헤퍼지는 건 데이트를 하느라 남자라는 명목하에.

"…."

그렇게 따진다면 희민이의 조건은 파격적이나, 그 속내는 분명 파멸적일 것이다. 과장하지 말고서 의중을 떠본다면, 어차피  몸이 목적이라 심히 불순하다고 봐야겠지. 결국에 희민이가 나를 구태여 집에다 두려는 흉계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벼이 넘기기엔 신경 쓰이는 희진이네 냉장고 상황. 주방도 그렇거니와 맨날 배달 음식이라던가 한쪽에 놓인 과자박스를 생각하면 영양 면에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괜한 참견일까…."

그렇다면 요리해달라고 돈까지 준다면서 부탁하지는 않았겠지.

"솔직히 말이 안 돼."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 내가 누군가의 식사를 책임진다니, 돈 문제를 떠나서 나란 녀석은 그렇게나 책임감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끄응-…."

그렇다 한들 자꾸만 의식해서, 집에 가면 반찬 레시피부터 살펴볼 심산. 이러니저러니 해도 누군가를 위해 요리해주는 것에 대해선 무척이나 환영이었다.



"…저녁 뭐 먹었어?"

반쯤 떠진 눈꺼풀로 희진이를 만나자 물었다.

"이히히, 언니 과자 조금. 언니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시간대가 딱 저녁이라 이렇게 둘이 마주치면 메뉴에 대해 늘.

"글쎄…."

아침은 상명이가 볶음밥 해줬고, 점심 역시 소바를 맛있게 먹다 보니 기묘하게 저녁 생각이 없었다. 포만감이 충만해서일까? 배는 고파도 입이 작아서 많이는 먹질 못하니까.

"그럼 나 나가서 먹고 올까?"

이 시간에?

"이 시간에?"

아까 시계를 보았을 때 오후 6시가 지났던 것이 떠올랐다.

"이 시간이 모?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여름이니까  뜨는 시간이 길긴 해도, 이 정도려나?

"…아니, 새삼스럽지도 않긴 하지."

혹여나 상명이랑 밀담이라도 가지는 건 아닐까 싶은 의심에서 물었나 봤다.

"상명이는. 갔어?"

복도에서 희진이가 뭘 하나 싶었는데, 뒤에 열려있는 안방을 보니까 거길 치우던 모양.

"오빠는 아까 갔어."

얘기하지라고 말하려다가, 자고 있었는데 깨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다면, 친구들이랑 보려고?"

점심에 상명이와 실랑이 도중 잡혔다가 겨우 빠져나왔단 이야기가 떠올라 질문. 게네들은 여태 노느라 집에  들어가나 싶었다.

"으응. 애들이랑은 내일 보기로 했어."

고개를 흔들면서 친구들과의 약속은 내일.

"음, 그래?"

언뜻 심드렁하게 들었지만, 속으로는 연이어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상명이랑 언제  밀회할지가 기대됐는데, 일이 이렇게나  풀려서 무척이나 흡족.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 언니?"

그런 연유로 새어 나오는 즐거움을 감추진 못했나 보다.

"아니야, 그냥."

그나마 억지로라도 웃음을 참으면서 꾹-.

"우-흠…."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머리를 내밀어서 어떻게 해명할까 생각했다.

"왜? 용돈 줘?"

이럴 땐 간편하게 때우는 돈.

"진짜!? 웅!"

이걸 또 쉽게 넘어가서 역시 돈이구나 싶었다.

"아니 잠깐. 언니가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용돈을 또 줘?"

그렇지 않아도 요새 연달아 주다 보니 손쉽게 받기엔 껄끄러웠는지 내비치는 미심쩍음. 너무 남발하는 것도 좋지 않아, 이래서 화근이었다.

"쿠-훟, 사실 이거  돈이야."

그렇다고 사실을 말하기엔 싱거울 만큼 가벼운 징조 수준.

"…응?  돈?"

용돈은 저녁 먹으라고 오만원 정도 줄 생각이었는데, 어차피 식비 카드 가지고 나갈 거라서  수단은 먹히지 않았을 거다.

"오십만 원."
"…아! 그거."

대체 얼마나 좋았길래 받아야  돈을 잊어먹고 있었는지.

"너랑 상명이한테 각각 오십만 원씩."

처음 설득했을  금액을 합쳐 백만 원이라고 언질을 주었다가, 볼 장 다 봤으니까 실질적으로 얻게 되는 액수를 말해줬다.

"와-아, 오십…."

그래도 애들에겐 큰돈이란 건 변함 없었지만.

"현찰로 줄까? 아니면 코-톡으로 쏴줄까?"

갑자기 커져 버린 지갑 사정에 좋아하는 걸 붙잡아다 물었다. 뭐에 쓸까 상상하면서 좋아하는 건 혼자 알아서 하란 의미로.

"히히, 만 원짜리만 준다면 직접 만져보고도 싶지만…역시 코-톡으로 보내줘 언니."
"그래."

비상금이랍시고 현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솔직히 꺼내기 귀찮아 묵혀두기만 했었다.

'코-톡'

"진짜, 오십이야?"

생일 때는 이거보다  배로 준  같은데, 여전히 놀라니까 내심 싫지 않은 기분.

"상명이한텐, 내가 줘도 되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모습이  어릴 때와 같아서 내가 다 싱숭생숭해진다.

"웅!"

어쩌면 자기 못 믿느냐고 빈정 상했을 수도 있는데, 돈이 생기니까 기쁨에 도취 중.

"쿻-."

때로는 밉살맞은 여동생이지만, 이렇게 돈을 받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또 가족이라서일 거다.

"쿠후후후훟."

이어서 음흉하게 미소짓는 건 이따가 상명이한테 돈을 주면서 내일 집으로 찾아오게끔 하여 여유롭게 즐기고픈 심정.

"그럼 언니, 나 나가서 먹고 올께에."

이런 내막도 모르고서 순진하게 나가려고만 하여 웃음 참기가 어려워졌다.

"어-."
"으후훙-, 으흐흐흥-."

적당히 대답해주고는 거실로. 이내 희진이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아, 자기…."

벌써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터라, 가슴 속 깊이 피어나는 욕망을 꺼내 나지막이.

"쿠후훟-."

이제는, 내가 상명이랑 침대에서 뒹굴어야  차례였다.

"-…."

그러기 위해 던지는 떡밥. 시종일관 의미도 없이 불러내기엔 의심 많고 깐깐한지라, 일이 잘 풀릴수록 천천히 돌아가려는 느긋함과 시도가 필요했다.

─2019년 7월 8일 월요일─
1_오후 6:18_[집에  들어갔어?]

"집에 잘 들어갔어?"라고 보내려다 너무 급진전이라 대충 "야!"하니 쫌 무심하려나 싶었지만, "머 해?"라기엔 조금 간 보는 거 같아서 그냥 처음에 쓰려던  그대로 직진. 애인도 아니고 잠깐만 뺏어 먹으려던 상대에게 진짜 애정을 느끼고 질투까지 하는 건 차마 인정하기 싫었다. 비록 이런 자신이 싫었어도 자각하기는 했다지만.

"……."

그렇게 쭈욱 화면을 살펴봐도, 지워지지 않는 숫자에 썩 마음이 좋지 않았다.

'토-크'

왔다…!

"…늦어."

짜증, 늦어도 너무 늦었잖아?

실은 기다리느라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았지만,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 보니까 1이라는 숫자 사라지기가 이렇게나 늦어져 참을성이 없었다.

함상명
[그럭저럭]_오후 8:07

"…."

그렇게 기다렸던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싱거운 대답. 정말이지, 희진이랑은 어떻게 연애하나 싶어서 둘이서도 이런 식일까 걱정스러웠다.

1_오후 8:07_[뭐 했길래 늦었어?]

따로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불만은 불만.

"하아?"

늦게 답한 주제에 답장하자마자 딴짓?

이렇게 토-크하는 상대랑 매너도 꽝. 어쩌면 나는 그렇게 중요한 상대가 아니었단 의민가 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중요하기보다는 성가시겠지만….

함상명
[씻고 저녁 하느라고]_오후 8:08

저녁?

우리 집에서야 내가 해달라 해서 그러려니 하는데, 자기 집에서까지 할 정도면 상명이도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다. 보통은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영역이니까.

오후 8:08_[뭐 만들어 먹었어?]

"…쿻-."

이번엔 다행히도 계속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함상명
[비빔냉면]_오후 8:08

비빔냉면…은 다음에 내가 해달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어머니께 죄송해서, 그래서 저녁으로 해드렸어]_오후 8:08

그렇다면야 뭐….

사실 상명이가 변명할 필요 없이 뭘 하든 간에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 그렇지만,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해져서 참견하고 싶어지는 건 아마….

오후 8:08_[맛있었겠네, 다음엔 우리 집에서 해줘]

그렇다고 집착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수고비도 주기로 했으니까, 이 정도의 언급이야 신경 써준다면 나쁘지 않은 얘기.

함상명
[..그럴게]_오후 8:08

그런다고 하지만, 단답형에다 귀찮은 듯한 말투라서 약간 거슬렸다. 그래봤자 우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돈은 어떻게 받을래?]
오후 8:08_[송금해줘? 아니면 현찰?]

그나마라고,  이야기를 꺼내서 내심 대화가 원활하게 이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함상명
[현찰로 받을게]_오후 8:08

하지만,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오는 답.

오후 8:08_[잘됐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