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백만원짜리 관람(1)
그러나 돈을 받고서 그 쓰임새에 대하여 기록해놓지 않는다면 내가 동조 할 구석이 없는 상태.
"상명아."
"…응!?"
어쩌다 혼나는 분위기의 둘을 우두커니 보다 불려서 황급히 대답했다.
"너 가계부 쓰지?"
"아, 그게-응…."
그냥 둘이서 해결할 것이지, 하필이면 희진이 눈치를 보다 놀라서 희민이에게 찬동하는 양상이 돼버렸다.
"거 봐, 네 남친도 가계부 쓴다잖아."
뜬금없이 가계부 이야기를 해서 왜 날 걸고넘어지는 걸까….
괜히 희진이를 같이 야단치는 거 같아 불안해졌다.
"아니 그, 가계부를 쓰는 게 대단한 거 아닐까…?"
항상 말이 많던 희진이라, 여기서 주눅 드는 모습이 안쓰러워 희민이에게 나름대로 반박.
"그야, 그렇지만…희진아. 니가 대답해 봐."
진정하란 손짓에 급해지던 성미를 가다듬더니, 다시금 희진이한테 질문한다.
"뭘 자꾸, 언니…."
이런 질문에 불편했는지 말대답을 하려다 줄어드는 목소리. 체격 차이가 있어도 언니는 언니인가 보다.
"희진이 너, 내가 한 달에 쓰라고 주는 용돈이 얼마야?"
그렇게 떠들어놓고 물어보는 것이 고작 용돈인가 싶지만, 생각해보니 부모 노릇 하는 희민이의 방식이 어떤지를 엿볼 기회였다.
"이십 만 원…."
…많네, 내가 친척들한테까지 받아서 모았던 돈이 이십 만 원인데….
"그건 내가 적게 줄 때고, 많이 줄 땐 얼마 받았지?"
적게 줘? 많이?!
"오십…."
오-십!?
"거기다가 밥값은 따로 쓰라고 카드도 줬지?"
입이 턱 벌어지는 액수에 놀라려다 더한 내용을 들어서 굳어버렸다.
"…응."
조목조목 따지는 희민이에게 순진한 양처럼 혼나는 희진이. 지켜보는 내가 다 안쓰러웠어도, 어찌할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근데…집에서 밥을 못 먹으니까 밖에서?"
아 아까 그건 변명으로 써선 안 될 말이었네.
"읗…!"
자기도 실언이란 걸 인정했는지 흠칫하며 고개를 푹 숙인다.
"그건 논외로 쳐야지. 밥은 못 해주니까 사 먹으라고 카드 줬잖아."
희민이가 하나하나 옳은 말을 해대니 정신 못 차리는 희진이. 혹시 내게 박탈감이라도 느끼라고 이러는 건 아닐까 싶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서 문제지만.
"밥은 밥대로 먹고 싶은 거 먹어, 애들이랑 노느라고 늦어, 그렇다고 남친이랑은 아주 그냥 그렇고 그렇지?"
점점 잔소리가 심해져 질릴 법도 하건만, 그런 기색 또한 없어서 슬슬 무서워졌다.
"그, 그만하자 희민아. 우리 아직 밥상 앞이잖아? 너는 다 먹었을지 몰라도, 우린 아직인걸…."
막말로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려 했으나…꾸짖는 기백에 눌려 여기까지가 한계.
"…하-, 그렇네. 이번에야말로 도가 심했어. 미안해…."
아까보다 훨씬 진심이 느껴지는 사과지만, 당한 의미가 다르다 보니까 마음이 꼭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 먹어…. 먹으면서 들어 봐."
언제 일어섰는지 모르게 자리로 앉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소리에 시원한 쯔유를 마셨음에도 목이 마른 듯하고 착각하여 침을 꿀꺽.
"끙-…."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겠냐는 불만도, 입 밖으로 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최근 들어 배달 대행으로 말 많은 거 알지?"
계속해서 혼낼 줄 알았는데, 다른 화제가 나오자 드는 안심.
"요새 뉴스에서 난리긴 하던데."
건전한 화제에 지난번 뉴스에서 본 내용을 언급했다.
"솔직히 난 뭐 빼먹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 여자 둘밖에 없는 집에 누가 나쁜 맘 먹고 들어오면…불안하지 않아?"
뉴스에서는 빼먹기가 주요 논쟁거리인데, 다른 쪽으로 접근하는 희민이. 상식적으로 배달하시는 분이 무단으로 침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희민이를 보면 세상에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 거 같긴 했다.
"에-이, 언니. 빼 먹는 건 그럴 수 있다 쳐도 설마 그러겠어?"
여기서 언제 활기를 되찾았는지 아까 혼나서 풀 죽었던 희진이가 참여.
"쿻-,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뜻밖에 자매끼리 동감을 표했다.
…사실 이게 이상적이면서도 당연한 거 아닐까?
"상명이가 우리 집에서 요리하는 거 있잖아."
드디어라고 할까 구태여라고 할까…자기가 여태 빙빙 돌리다가 이제야 본론으로 돌아오는데, 진이 많이 빠졌다. 이게 계획이라면 녀석의 계획대로 휘둘리기만 해서 얼른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지는 심정.
"어차피 방학이니까. 그동안 합법적으로 우리 집에 자주 들락거릴 수도 있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 아니야?"
녀석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 과정이 매우 난잡하여 청개구리처럼 부정하고 싶어질 뿐.
"좋네, 좋아. 언니. 응."
짐작하건대, 희민이가 희진이를 뭐라 뭐라 하지 않았다면 사심을 담아 긍정했을 거다. 당한 게 있다 보니 못마땅하여 시들시들해진 어조라 그렇지.
"그럼…상명이 네 생각은 어때?"
"어, 나…?"
깊이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바로 물어서, 일단 말끝을 흐렸다.
"그래. 우리가 한참 떠들던 이야기가 그거잖아?"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만 말하지, 이런저런 생각 복잡해지게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끌었을까?
"…잠깐, 생각해 보고."
듣다 보면 이게 또 말리게 돼서 어이가 없어도 당해버리는 화술. 잠시 망설일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계약서에 홀리듯 사인했을 거다.
"그건 뭐, 아직 방학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해."
여태껏 서두르듯 타이르다가 천천히 하라고 한들 석연치 않은 마음. 사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거절할 수 있다면 내키지 않다며 딱 잘라 거부하고 싶었다.
"퍽이나…."
듣다 못한 희진이가 내 속마음을 대신하여 혼잣말.
"…."
"후르릅, 햐-. 잘 먹었어 오빠!"
다 들리게 했던 터라 희민이도 희진이를 쳐다보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능청스럽게 행동했다.
"아, 그래? 다행이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모를 신경전을 아직도 하고 있어서 중간에 낀 나만 곤란할 따름.
"쿡-아무튼, 그것보다 너희들…이제 뭐 할 거야?"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싸울 생각은 없어서 앞으로의 일을 물어본다.
"섹스?"
"커-헉!? 콜록콜록."
희민이의 말대로 이제 뭐 할까 싶다가,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급하게 치고 들어오는 파격적인 단어.
'탕-!'
"아 언니 쫌!!"
최대한 자제하려던 희진이도 식탁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이제 와서 왜 그래? 우리 이미 그러기로 약속한 거 아니었나?"
흠잡을 데가 많도록 혼잡한 가운데 희민이 혼자만 태평한 자세.
"그건 그렇지, 오빠가 그렇다면…."
희민이가 이전의 거래를 떠오르게 하니까 기립한 것이 무안하게 금방 앉았다. 그나저나 난 아직 하겠다고 하지 않아서….
"아 참, 대답. 들어야겠지?"
미처 수락하지 않았다고 답변하려다 희민이가 선수를 쳤다.
"말해봐 상명아. 희진이가 네 의견에 전적으로 따른다고 했으니까, 너만 대답하면 돼."
본론이고 결론이고 간에, 이게 목적이었구나….
"…뭐, 그렇지."
그렇지 않아도 이것에 대해 학교에서 내내 고민했었는데, 되려 집으로 오니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은 오늘 점심까지, 난 여지를 충분히 줬다고 생각해."
사실상 희민이가 깔아놓은 판에다 알았다고 끄덕이기만 하면 되는 상황. 이런 농간에 놀아났단 사실이 걸려 쉽사리 알겠다고 하기가 거북하여 껄끄러웠다.
"…오빠."
마지막으로 희진이는 어떨지 의중을 살펴봤지만, 처음과 변함없이 그대로.
"끄-흠…."
되돌아 희민이를 바라보자, 피하지 않은 눈길이 밉살스러웠다.
"…그래, 알았어."
녀석이 들으려던 대답을 듣기 위해서 질질 끌다가 온 것처럼, 나도 마침내 그러겠다는 대답.
"쿠-훟.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거 맞지?"
여기까지 와서 재차 확인을 요구한다.
"너랑 희진이, 둘이서 섹스하는 걸 구경하는 대가로 백만 원."
의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참….
"이번뿐이야."
혹시라도 우리가 할 때마다 매번 참석할 거 같아서 선을 그었다.
"…좋아, 어차피 그럴 때마다 주는 거로 알고 있으니까."
희민이도 대충 이견이 없어 끄덕.
"돈 부족해지면 말해. 기꺼이…내줄 테니까."
그러면서 무슨 여유인지, 잇따라 히죽거렸다.
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겠다며 싱크대 앞에서 선보이는 뒤태. 그걸 구경하려고 희진이나 나나 계속 자리를 고수했다.
"야…니 남친 귀엽더라."
물소리랑 식기 세척하는 소음에 들리지 않음에도 괜히 귓속말.
"당연하지 언니…근데 왜?"
기껏 칭찬해줬더니만, 무슨 꿍꿍이냐는 표정으로 경계심이 단도직입적이다.
"아까 내가 너한테 시비 걸었을 때, 상명이 표정 봤어?"
"…아니, 그게 왜?"
말끝마다 왜 왜…자꾸 이러면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주기 싫단 말이지.
"우리 둘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 하던데…너 그런 거 즐기려고 사귄 거 아냐?"
"읏-, 아니야…!"
버럭버럭하면서 아니라고 해도, 지금까지의 행실이 그걸 부정했다.
"근데, 오빠가 안절부절못했었어?"
지금도 이렇게 아닌 척하던 주제에 감출 수 없는 흥미.
"…상명이랑 있을 때 간간이 시비 걸어줄 테니까, 몰래 상명이 관찰해 봐."
이로써, 이런저런 명분을 대부분 챙긴 거 같았다.
"웃기시네, 시비는 항상 걸었으면서."
상명이가 곁에 없다고 바로 나오는 본색.
"…."
그건…그렇지.
"훙-, 오빠의 곤혹스러운 모습이라…."
입으론 상명이 편을 들어주는 듯하더니만, 내심 끌리는 모양.
"우리 눈치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상명이가 보고 싶지 않아?"
"쫌…! 그렇긴 해."
말투가 다그치는 건지, 공감하는 건지 헷갈렸다.
"그럼 나중에 또 해줄 테니까, 어떤지는 직접 확인해 봐."
분위기상 그렇게 싫어하진 않아 보여서 다음을 예고. 표정을 보아 내심 기대되는 기색이 있었다.
"…오빠를 너무 심하게 괴롭히진 마 언니."
심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의미겠지.
"쿻-, 적당히 할게."
어차피 정도가 지나치면 자기가 만류할 거다.
"근데. 사진 찍어도 돼?"
태도가 풀어지는 것을 빌미 삼아 자연스럽게 물어보는 촬영.
"움, 글쎄? 언니만 사용하겠다면 딱히?"
까탈스럽게 굴던 상명이와 다르게 희진이는 특별히 거절하지 않았다. 역시나 이런 쪽엔 말이 통해서 다행.
"대신 오빠가 싫다고 하면 찍지 마."
"…어."
그 소리가 왜 안 나오나 싶었다.
"그래서, 어디서 하려고?"
슬슬 마무리되어가는 상명이를 두고서, 논하는 장소.
"으으. 언닌 진짜 그 생각밖에 없구나?"
희진이의 눈매가 텁텁함을 내비친 채로 눈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물론, 모처럼 얻은 직관할 기회인데."
그래 봤자 이 순간만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주겠지.
"으으- 미쳤어."
질렸다는 내색을 비췄지만, 질색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쿻-새삼?"
아무렴, 상식적으로 아예 통과조차 되지 못할 사안을 간신히 성사시켰는데.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무척이나 진보적인 성취였다.
"…역시 안방이겠지?"
"그야 모…."
소파에서 하기엔 불편하고 한정적인 체위. 그래봤자 얼마나 다양하게 하려고 따지는 건 아니어도, 어디까지나 편의성을 위해서 침대를 골랐다.
"사실 어젯밤에 할 줄 알고 다 준비하긴 했는데 말야…."
설마하니 상명이가 밤늦게 찾아올 줄은 몰라서 그걸 상정하고 마련한 건 아니어도.
"어젠 언니가 직접 방해했으면서."
살짝 앙금이 남았는지 사소한 불평을 드러낸다. 그땐 희진이가 허락했다면 또 모를까, 그런 분위긴 아니라서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그야 둘이서만 즐기려 했으니까 그렇지."
어제는 보호자로서 구실을 해야 한다고 계산을 마쳤어도, 솔직히 내가 있는 와중에 치사하게 자기들끼리만 재미 보려고 했던 실정이 괘씸했다.
"으-! 그건, 미안해 언니…."
아무것도 모르는 희진이 입장에선 선 넘은 행위. 반대로 내가 저지른 범죄를 알아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몹시 궁금해지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워졌다.
"…괜찮아."
과정이 어떻든 간에, 드디어 희진이의 용인 하에 상명이랑 치근덕거릴 수 있게 됐으니. 당장 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하나하나 공략해 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될 수 있을 거다. 희진이가 묵인한, 상명이와의 섹파가.
장소를 옮겨 안방.
"…기분이 어때?"
아침까지만 해도 잠들었던 잠자리가, 이제는 교미를 위한 곳으로 변모하니 어떤 기분인지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