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자매랑 소바 번갈아 먹기(1)
이건 어쩌면 플러스마이너스의 법칙은 아닐까 싶었다. 내가 예를 들고 싶은 건 극과 극으로, 좋은 일이 있다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라고 하는 걸 실제로 경험하는 기분. 예시로 떠오를법한 명제가 내게 대입되어 이루어지는 느낌이었다.
"하하하하…."
씨발.
속으로 욕이 안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어찌어찌 꺼내지 않은 건 간신히. 누가 본다면 그저 허탈하게 웃는 거로밖에 안 보일 거다.
"쩝…."
지금 이렇게 욕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기에, 다시 모색하려는 방도. 정리하자면…결론만 놓고 본다면, 녀석이 원인이자 문제였다. 너무 남 탓만 하는 건 아닐까 싶어 자신을 돌아보아도, 과실이 있다면 녀석의 잘못이 7할 이상.
"…-."
나머지 3할은, 온전히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
왜 그때 뿌리치지 못했을까? 왜 그때 도망치지 못했을까? 왜 그때 무시하지 못했을까?
"-……."
왜 그때 희진이를 믿지 못했을까…?
이런 생각들이 가슴 깊숙하게 사무쳐져서, 떠올릴 때마다 자괴감에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아-…."
아직 스스로가 어리숙하다고 자각하지만, 희진이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란 걸 잘 아는 상태. 기분상의 직감뿐만이 아니라, 부족하게나마 설명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희진이가 걱정하는 부모님 문제에 대해 확답해주기엔 아직이라 미지수지만. 연애는 나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노력해서 행복을 쟁취해야 한다. 여기에 이런저런 문제를 맞닥뜨려 해결하거나 순응해 정진하는 것이 옳을 텐데….
"……-."
여기서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녀석이었다. 막상 골똘히 생각만 한다 해도 해답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막막해지는 상황.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은 절대로 아니어서, 짙은 안개 속을 억지로나마 헤쳐나가는 심상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대책을 찾지 못하면 녀석이 만든 수렁에 빠져 헤어나오기조차 어려워지니까 나로서는 조급함만이.
"…."
하지만 이미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한 게 현실이었고, 몸부림칠수록 늪에서 점점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만이 확실해졌다. 그렇다 한들 나는 여전히 발악하며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녀석의 흉계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처럼 들릴 사연에 단언할 수 있도록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었다.
"후-우…."
언젠가 들키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밝혀졌을 때, 나는 최대한 노력하고 저항했다고. 절대로 배신하고 상처입힐 생각은 없었다며, 오히려 뻔뻔하게 알아주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변론하고 싶었다.
"…아냐."
결코, 그런 건 아니라고….
녀석 덕분이라고 할까, 오네쇼타물에 빠진 지도 그리 짧진 않았다. 더군다나 쇼타 여장물도 나름 색기 넘치는 상업지들 때문에 근육 거근을 좋아하던 내 취향이 바뀌기까지….
"쿠-훟."
자지도 그렇게 크지 않은 주제에, 여자가 남자를 알게 되면 바뀐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 거 같았다. 아헤가오라던가 그런 표정은 지어지지 않아도.
"훛…."
시작은 너무 두서없었지만, 슬슬 원하는 대로 실현되니까 짜릿한 쾌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디까지 가능해질지 줄타기를 하는 건 서투름에 경황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흥분감에 자신을 주체할 수 없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리겠지. 가끔이 아니라 자주 감정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았으니까 말이다.
'히-죽'
순탄해지는 계획에 자각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
다음엔 어떤 식으로 녀석을 농락할까…?
몹시 기대되었다. 어차피 오늘은 둘이 같이 오겠거니 해서 그리 진득한 애정행각은 하기 어렵겠지. 대신에 간간이 뺏어 먹는 재미가 있었다.
아아, 녀석이 먼저 와버려서 희진이가 오기 전에 조금은 희롱할 수 있을까?
희진이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나를 동정하는 척해도 경계하고 있어서 어려울 거다. 이젠 그것도 합의가 이루어지겠지만.
"……."
그러나 오히려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바로 수락하라니까 버티고 있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의 입장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라서 자기 여친인 희진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한들 알았다고 덥석 물자기엔 거부감이 있었겠지. 아니면 쪼-끔 간 보다 자신은 껄끄러운데 애인이 된다고 설득하니까 별수 없이 알았다고 하려는 듯한 낌새도 없진 않았을 거다.
녀석, 겉으로는 순진해 보여도 제법 까탈스러웠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끝일 거다. 저항하는 몸짓이 많이 죽는 건 조금 아쉽지만, 너무 싫어해도 솔직히 흥이 식기도 하고…솔직히 나라고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
"쿠-훗, 쿡쿡쿡…."
사실 자업자득이었지만, 이왕에 뻔뻔해지는 거 악역에 심취하기로 했다.
지도 앱에서 보여주는 약도대로 걸으니까 마트가 금방 나왔다.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장소.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가까웠기에 내가 이곳을 왜 보지 못했을까 싶었지만, 사실 주변의 풍경이야 기억에 담아두려고 해도 잘 안 될 때가 대부분이었다. 이곳에 들린 까닭은 소바를 사기 위함도 있었지만, 부분부분 부족한 조리용품들을 구매하기 위해서. 아침에 설거지하려니까 고무장갑이 없어서 점심에 올 때 이것도 사 와야지 싶었다. 그러면서 희진이와 어머니께 보냈던 토-크. 아쉽게도 희진이는 뒤풀이가 있는지 친구들에게 잡혀서 먼저 가달라고 했다. 이거야 뭐 그러려니 하지만, 내가 무서워했던 건 어머니의 반응. 그러나 뜻밖에 점심은 먹고 온다고 하니까 양해해주셨다. 어제는 깜박하고 연락을 못 드려서 일어나자 하는 바람에 까먹을 게 따로 있다고 야단을 들었지만, 아직은 해가 중천이라 그런지 쉽게 해주시는 허락. 그렇다면 적어도 저녁 전까진 귀가하는 것이 내가 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보았다.
"하-…."
그건 그거고, 막상 희진이네 현관 앞에 당도하니까 주저하는 손짓.
"…."
여기서 과연 벨을 누를까 그냥 비번 입력하고 들어갈까를 고민한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딩-동'
여기선 당연히 벨을 눌러서 안에 있는 사람에게 왔다고 알리는 것이 당연지사. 이전에 희진이한테 변명했던 내용을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너무나 터무니없던 구실이었다. 그걸 그냥 믿어 준 희진이가 고마울 지경.
"…젠장."
아마 나니까 의심스러워도 넘어가 준 거 같은데, 되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희진이를 배신하고 있었다.
"……?"
혹시 들리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이 시간에 잠이라도 자는 걸까? 새벽에 깨우러 갔을 때 미묘한 상태를 본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딩-동'
그러나 녀석이 직접 점심에 보자고 했으니까, 한 번 더 누르는 종.
"아, 안녕…."
누르기가 무섭게 기척 없이 문이 열리자 얼떨결에 인사를 해버렸다.
"…그냥 비번 누르고 들어오지 그래?"
귀찮다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신뢰…할 리가 없겠지.
"아니, 그냥 뭐…앞으로도 누르려고."
뭐가 됐든 심드렁한 말투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든가."
들어가려니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녀석. 혹여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왔을까 봐 주의하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반대로 녀석이 누군가를 불렀던가.
"실례하겠습니다…."
여기엔 오직 녀석과 나뿐이라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원래라면 이런 나를 비웃거나 흥미롭다는 듯이 구경할 텐데, 분위기가 영 무미건조해서 내게는 다행일지도 모를 일. 이러다가 변덕을 부리며 돌변하던 녀석이라서 긴장을 거두기엔 너무 일렀다. 불안할 만치 희진이도 같이 안 왔고.
'코 토-크'
거실을 지나 주방에다 장 보온 것을 내려놓자, 토-크가 왔단 알람이 들렸다.
'부스럭부스럭'
"…뭔가 많네?"
탁자로 봉투를 올려 내용물을 꺼내자 녀석이 하는 말.
"그런가?"
녀석이 요구한 건 소바였고, 그걸 위해 이것저것 사긴 했다. 일단 녀석이 해달라던 소바랑 집에 얼음틀이 없어서 사 온 돌얼음. 김가루와 혹시 모를 볶음김치랑 비빔소스가 다였다. 그 외로는 칫솔 하나랑 혀 클리너 정도.
"…오늘도 자고 가게?"
칫솔을 꺼내자 바로 관심을 보이더니, 그걸 집으면서 묻는다.
"아니, 오늘은 점심만 먹고 갈 거야."
소바를 해달라고했으니 해주러 온 거뿐. 오늘의 방문은 단지 그거였다.
"훙-…아쉽네?"
우선 얼음은 냉동실에 넣고서 소바랑 볶음김치하고 비빔소스는 냉장고로, 김가루는 그냥 두자 아쉬움을 피력하는 녀석. 어차피 날 꾀어낼 생각이나 할 거기에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일단, 양치부터 하고 와."
그러다 뜬금없이 명령조.
"어? 왜?"
밥도 먹기 전인데 양치를 하고 오라니, 아무리 어제저녁에 양치하지 않고 잤다 해도 입가심은 했었다. 오늘 아침도 나름대로 조치를 해서 치약을 조금 머금고 분해해가며 가글까지 했을 정도. 물론 쾌적하게 되진 않아서 찜찜하긴 했었다.
"그야, …."
이번에는 어떤 궤변을 수놓을지 호기심이 동해 잠자코.
"…아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궁금하게끔 말을 끊어놓고 다가….
"읍…!?"
피할 새도 없이 기습적으로 입맞춤을 당했다.
"츄-흡, 흡-!"
그러면서 혀까지 집어넣으려는 녀석한테 놀라서 반사적으로 밀치는 손.
"하-, 너…!"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목소리가 떨리고, 나오지 않았다.
"쿻-, 쿠후후후훟!"
그런 나를 보고 즐거워하는 녀석.
"확실히 양치하고 안 하고 키스할 때 차이가 있긴 하네."
"……."
겨우 그런 걸 확인하려고 키스를 하다니, 자기가 무슨 과학자라도 되는지 아나 보다.
"미묘하게 아침에 먹었던 그 향의 맛이 나."
후각과 미각을 병합하여 희한하게 표현하는 녀석. 탐구심은 인정하겠지만, 날 실험체가 아니라 인격체로서 대우해줬으면 싶은 바람이 잔뜩 생겨났다.
"어디가 자기?"
녀석과 있어봤자 이런 일만 생길 것 같기에 자리를 피하려니까 질문하는 녀석.
"양치하러."
마침 녀석이 하라고 했으니까 그걸 명분 삼아 화장실로 가려 했다.
"쿠-훗, 계속 키스하게?"
"반대야. 너랑 키스해서 헹구러 가는 거지."
최대한 찡그리며 가시 돋친 말투를 표출.
"킇…이번 건 조금 상처받는데 자기?"
이런 짜증에도 가소롭다는 듯이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한다. 하물며 눈웃음만 지어서 열 받으라고 보이는 저 표정까지.
"…."
이젠 대답해주기도 지쳐서, 뒤돌아 녀석을 잠깐 흘겨보고는 칫솔과 혀 클리너를 챙겨 화장실에 다녀왔다.
"윽-…!"
그렇게 문을 열고 나오면서 희진이가 보낸 토-크를 확인했는데, 친구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늦어진다는 내용. 기다릴 테니 느긋하게 오라고는 대답했지만, 당장 녀석이 나를 맞이해주는 터라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희진이가 뭐래?"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희진이가 보냈단 사실을 알아채는 녀석.
"…어? 음, 거의 다 왔데. 배가 고프고, 판 모밀이 기대된대."
녀석에게 바른대로 말했다가 오히려 상황이 나빠질 거 같은 예감에 거짓말했다.
"칫…."
그런 덕분일까? 무언가 하려던 녀석의 계획을 저지한 모양.
"어쩔 수 없네. 찐하게 키스하는 거로 봐줄 테니까, 자기가 직접 혀를 사용해서 날 만족시켜 봐."
…은 무슨, 이처럼 날 곤혹스럽게 해서 무척이나 즐거운 듯싶었다.
"…희진이가 금방 온대도?"
먼저 시간이라도 벌어 볼 생각으로 내뱉은 거짓말.
"그래 봤자 지금 종례하고 토-크한 거잖아. 집까지 오려면 적어도 삼십 분이 필요하니까 뭐, 이 시간이면 섹스해도 딱히 오래 걸리진 않을 거 같긴 하네."
아…, 이러다간 꼼짝도 못 한 채로 당하고 말 거다.
"지, 집 앞이라고 했어!"
조급해진 나머지 쉽게 들통나버릴 거짓말을 서두르다 무심코.
"…정말?"
얼굴에 쉽게 거짓말이라고 드러나는 모양인지, 미심쩍은 눈초리로 다가왔다.
"어! 정말…."
이미 입에서 거짓이 나온 이상, 이대로 밀어붙일 수밖에. 그렇지 않으면 또 녀석과 원치 않은 행위를 해야 할 거다.
"흐-음…."
영 믿음이 가지 않는단 얼굴로, 곰곰이 생각하는 녀석.
"보여줘."
망했다…!
"…뭘?"
이미 들킨 거 같았지만, 최대한 시치미를 뗐다.
"희진이랑 토-크 내용.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차라리 녀석 말대로 했다면 키스로만 끝날지 모를 상황이었는데….
"으-읗, …싫어."
의미 없는 저항이겠지만, 여전히 녀석에게 싫다고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이 사진을 희진이에게 보내려고 하기 전에 얼른 내놔 당장."
"엏!? 끄-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