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볶음밥과 관음의 찬반토론(3)
북엇국으로 간신히 잠재워서 차분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희진아…."
설마하니 희진이마저 녀석의 마수에 넘어간 건 아닐까? 아마도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라서 녀석이 그런 토-크를 보낸 걸 거다. 이건 보나 마나 뻔한 이야기.
"있지, 그 언니가아. 야설을 쓴데…."
야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지?
"그런데…언니가 남자 경험도 없고, 흔한 남사친마저 없으니까. 우리를 주제로 그, 공부할 겸 해서 배워보고…싶데."
곤란한 이야기란 걸 분명히 알면서도 하는 이야기에 우물쭈물은 약간. 그것보다, 희진이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두뇌를 몹시 사용해야 했다.
"그러니까…얘가 남자 경험이 없다고? 읗…!?"
어처구니없음에 황당한 눈초리로 녀석을 바라보다 되레 맞닥뜨리게 된 쏘아보는 시선.
"상명이 너, 그런 말 여자에게 하는 거 아니야."
지는…!?
그게 자신이 할 소린가 싶었지만, 녀석이 보냈던 토-크엔 그저 상의를 잘하라고만 했었다.
"부끄럽지만, 맞아…나 남자 경험 없어."
뻥 치시네 뻥쟁이가, 입만 열면 그짓말이 아주 자동으로 나와 그냥.
"그러면서 야설은 잘도 쓰고 있지."
"…어."
계속 기가 찼던 나머지 터무니없는 말을 듣고도 희한하게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근데 최근에 이르러 글이 잘 안 써져서 말이야."
혹시 창작가로서의 고뇌인 걸까? 그러나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서, 홀로 심각하게 이야기하니까 밥 먹다 말고 뭐 하는 짓이냐며 제지하기도 그랬다.
"권태기라고 하기엔 뭐랄까, 경험이 부족해서 쓰이지 않는 느낌?"
녀석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나를 제치고 희진이를 먼저 설득하려는 낌새. 마음만은 희진이 거라며 말로는 거부하고 있다지만, 사실 나 따위야 이미 정복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
이건 내가 저항이 불충분해서 일어난 사단. 되는대로 지껄이는 녀석은 둘째 치고, 그런 녀석의 헛소리를 받아주는 희진이에게 면목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랑 만나서 하기엔 별로고, 당장 남자를 사귄다 해도 그렇고 그런 관계까진…금방은 아닐 거 아니야."
일반적으로 그렇겠지만, 이미 범죄를 저지르고서 염치없이 태연해 거슬리는 행태.
"그렇다면 차라리 내 눈앞의 표본을 세워둬서 배워보려고."
의도는 알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녀석이랑 몸을 섞지 않아도 된다는 점일까?
"…."
아마 녀석은 희진이에게 그런 이야기만 쏙 빼놓고 몰래 나를 덮치려고 할 거다.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지.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그러한들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그러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어."
그야…그럴 것이, 녀석에게만 좋을법한 이야기. 어디까지나 녀석에게 국한돼서, 우리의 사생활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거였다. 이런 궤설에 희진이가 넘어갔다면, 무언가 다른 거래가 있었을 테지. 아니면 나처럼 약점을 잡고 협박했을 거다.
"남자 사겨서 거기에 돈을 쓰느니, 너희한테 투자해서 얻어가는 편이 백배는 낫지 않겠어?"
"돈? 투자?"
돈이라…여기서 돈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걸까?
"그게, 있지 오빠."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녀석을 노려보니까, 희진이가 대신 대답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오빠랑 내가 허락하면, 언니가…백만 원, 준데."
"백만 원…?!"
아…어, 음. 협박이 아니라, 돈인가? 어, 그래. 금액이 뭐, 일정 수준을 벗어나면 눈이 돌아갈 만하지. 그럴 거다. 희진이도 사람이니까.
그렇지만…희진이가 모르는 일이 녀석과 나 사이에서 벌어졌기에 의심조차 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들어줄 수만은 없었다.
"그, 언니 이야기도 들어 보니까. 쫌, 딱하기도 하고. 우리 하는 걸 언니에게 보여준다는 게 부끄럽긴 해도, 그 돈이면. 오빠 이제 돈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크-흠, 희진인 돈 때문이 아니라 돈을 걱정하는 나를 위해서 이런 속설에 넘어가 준 건가…. 희진이가 가엽다는 어조로 부탁하니까 차마 거절하기 어려워 망설여졌다.
"…틀린 말은 아니야."
더불어 사족을 더하는 녀석.
"큼, 그래…?"
지금까지 강하게 나오더니만, 인제 와서 약한 척 연기하는 걸까? 어젯밤 둘만 자게 놔둔 건 실책이었다. 이럴 거면 창피함을 무릅쓰고도 셋이서 자야 녀석이 희진이에게 헛바람 불어넣지 않았을 텐데.
"…희진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미 녀석하고 뒤에서 이야기가 끝났다고는 생각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있을 경우를 생각하여 물어봤다.
"난, 오빠 생각에 맡길게."
결론적으로 내게 의견을 맡기겠다는 건가….
"끄-흠…."
녀석의 대참에 답답함이 실로 어지러웠다.
"…킇-."
희진이가 전적으로 나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한 만큼, 녀석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거나 다름없어진 현실. 이미 잡힐 대로 잡혀버린 약점에 희진이마저 침범하여 자신의 손아귀로 놓을 생각이다.
"…하-."
나야말로 녀석의 말에 반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더욱 개탄스러운 상황.
"나는 말이지…."
이대로 승낙해버린다면, 녀석은 어디까지고 폭주해서 우리 사이가 파멸로 이어질지 몰랐다. 지금이라고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채라 어디가 다르냐 싶었지만, 나만 피해 보는 것과 희진이까지 끌어들이는 건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중요한 사항.
"희진이랑 내가 하는 건 사생활이기도 하고,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것은 아니잖아."
일단은 평범하게, 상식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니까, 대가로 돈을 줄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명백한 만능물질이 있잖아?"
그러자 바로 반박을 쳐버리는 녀석. 협박범을 넘어서 이런 대화까지 나누다 보니까 녀석이 사기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건 범죄잖아."
협박이랑 강간에 관련하여 떠보는 단어 선정.
"누가 성매매를 하겠대? 그냥 구경하겠다는 거잖아. 이게 야동 보는 거 하고 뭐가 달라?"
기필코 이겨 먹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했는지, 지려는 기색 없이 또박또박 말에 힘을 실어서 반론한다.
"야동, 하고 이건 엄연히 다르지…. 야동은 합법이고, 이건 불법 아냐?"
내가 여기에 대해서 많이 아는 건 아니어도 세금 내면서 촬영한다는 글을 보았던 것이 떠오른 기억.
"쿻-! 야동도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거든?"
"뭐…? 진짜?"
정말로 몰랐기에 진짜냐고 묻게 됐다.
"모야 오빠? 내가 있는데 야동 보는 거야?"
그런 덕분에 녀석이랑 토론하다가 갑자기 희진이에게로 튀어버린 불똥.
"아, 아냐 아냐. 그게 그건, 희진이랑 만나기 이전에 본 거니까…아하하하-!"
자기 말이 백 번 맞다고 우길 수 있어서 따지려고 했지만, 도리어 희진이에게 변명하는 꼴이 돼버렸다.
"후-웅…."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서도 일단 알겠으니 넘어가겠다는 몸짓.
"…하아, 꼰대처럼 굴기는."
"끟-…!"
희진이에 이어서 항상 비웃던 녀석이, 여기서는 한숨과 함께 빈정거리니까 마음에 상처가 나기 쉬워졌다.
"있잖아 상명이 너, 그래. 네 말대로 야동하고는 다르지. 다르고말고! 이렇게 현장에서 생생히 지켜보는 거야말로 더 대단한 거니까. 그래서, 관람비 내겠다고 했잖아?"
주눅이 들어버린 호기를 놓치지 않고 떠드는 녀석.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렇다고 사뭇 당해주기엔 사안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아아 싫으면 말아. 백만 원이란 돈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니?"
그러자 손바닥 뒤집듯 여태까지의 설득을 그만.
"끄-흠…!"
타이르던 녀석이 오히려 됐다고 하니까, 이번엔 희진이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후-웅…."
희진이가 내 의견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말하면서 보이는 기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은 돈이 탐나는 거 같아 보였다.
확실히…백만 원은 큰돈이니까.
진짜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그게 특이한 거라고 사료됐다.
"난, 오빠가 편한 대로 골라줬음…좋겠어."
갈팡질팡하는 내게 여전히 믿고 의지해주겠단 대답. 큰 금액에 언어로나마 흔들릴 법도 한데, 그래도 내 의사를 존중해준다고 해서 한결 위안이 됐다.
"히히히…."
돈에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말로나마 응원해주니까. 다만, 신경 쓰이는 건 아무래도 협조하라는 듯한 희진이의 분위기였다.
"…."
은근히 녀석의 말에 수긍하려는 것도 아마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액수로 인해. 녀석의 말마따나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란 물질은 명확하고도 확실한 해결책이었다. 감옥에 가도 보석으로 나올 수 있으니까.
"끄-흠…."
대신에 괘씸죄라는 말이 있듯이, 녀석이 나를 두고서 저지른 행실을 돈으로써 묵인하려는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여, 지금 이렇게 고민을 토로한다면 과연 그때도 승낙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 뭐…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건 인정할게."
우선순위로, 희진이가 은연중에 바라는 것 같아서 수락하려다 먼저 선수 치며 녀석이 떠들었다. 쉽게 결정 못 할 문제라 고민이 길었던 건데, 그게 녀석의 인내심을 해치운 모양.
"하지만, 나도 지금 조급함에 여유가 없으니까. 되도록이면 이따 점심에라도 확답을 해줬으면 좋겠어."
아니면 이미 밥을 다 먹어서 이러는 걸지도 몰랐다. 그 증거로 깨끗한 녀석의 밥그릇.
"어, 응 그래. 알았어…."
나름대로 심사숙고하여 녀석에게 긍정적인 결론을 말하려다가 이래 버리니까 알겠다고 답하기조차 껄끄러워진다.
"학교 잘 다녀와."
뜬금없이 인사하는 녀석. 자기는 식사를 다 마쳤다고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이어지는 녀석의 행동에 말문이 막힌 건 희진이 또한 마찬가지.
"아 참, 밥 맛있었어."
그 말 한마디를 끝으로 아예 사라져버렸다.
"하하하…."
맛있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깨끗이 비워진 그릇. 그러나 자기가 먹던 것들을 싱크대로 가져가지 않고 그냥 둬서 일일이 내가 치워야 했다. 이왕에 설거지까지 할 거라 상관은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저건 매너 문제. 너무 제멋대로에 이기적이라서, 확실히 녀석은 남자를 제대로 사귈 수 없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오빠. 내가 이따가 언니한테 한 소리할게."
"…괜찮아, 마저 먹자."
그나마 희진이의 한 마디가 허무해진 마음을 위로해서, 정신 차리고 식사.
"웅-! 히히히, 냠-."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는 희진이와 그런 동생을 닮지 못한 언니란 녀석은 정말 자매인지 궁금해졌다. 이런 생각은 실례지만, 태도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실제로 피해도 받았으니까 겨우 생각 정도 하는 건 녀석에 비해 약소. 하다못해 정당방위일 거다.
"간이 나쁘지 않게 돼서 다행이긴 한데, 어때?"
화제나 돌릴 겸 음식에 관하여 질문했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웅? 당빠 마시찌 오빠-!"
이에 마냥 맛있다고만 하니까 기분은 좋았어도, 객관적이지는 않았나 싶었다. 하기야, 희진이도 벌써 그릇의 내용물을 거의 비워서 설득력이 없진 않았지만.
"후후, 다행이네. 희진이 입맛에 심심하다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 만약 그럴 땐 케첩 뿌리면 괜찮지만."
밥을 다 먹기 직전인 건 나 역시 똑같아서, 식사를 마무리할 겸 끝나가는 투로 대화를 나눴다.
"오-옹, 그건 몰랐네. 다음엔 그렇게 먹어보자- 오빠."
맞장구치며 사랑스럽게 웃는 희진이. 가능한 나를 위해주고 지탱해주는 희진이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
이에 나도 덩달아 되찾은 활기. 먹는 방식도 각자 취향이라, 꼭 간을 맞춰야 한다는 틀에 갇힐 필요는 없었다. 물론 기본을 무시하면 안 되지만.
"…우물우물."
그러고 보면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떠들며 자신이 하고 싶은 제안을 내놓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 만큼 대범하지 못했다.
'부르르'
희진이랑 식사하는 와중에 녀석이 떠올라 급히 흔드는 고개. 이러한 일에서도 어째서 녀석을 신경 쓰게 됐는지 짜증이나, 잠깐 미간을 찡그렸다가 희진이에게 들키지 않음에 안심하며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도와주는 희진이에게 화답하며 서로 몇 시까지 등교랑 언제 끝나는지에 관하여 대활 나눴다. 자기가 한다던 설거지는 손님인 내가 해서, 여유롭게 같이 외출. 희진이랑 헤어져 각자 학교에 왔음에도, 마음은 콩밭이라 얼른 희진이가 보고 싶었다.
"…."
거기에 나아가서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니까 자연스레 참견하듯 떠오르는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