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각자의 대실소망(2) (85/107)



〈 85화 〉각자의 대실소망(2)

"반지야. 그것도 커플링. 초록색의."

굳이 틀리게 말해서 빠져나갈 틈을 만든다.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

그에 보기 좋게 걸려드는 희진이. 이래서 내가 약 올리는 걸 그만두지 못한다.

"쿠-훟. 궁금해?"

이젠 희진이가 입술을 삐쭉거리며 겉보기에도 심술이 난 눈빛을 내게.

"내가 어떻게 너한테 선물해 줄 상명이의 선물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 대해서?"

그래도 죽일듯한 살기는 없어서, 정말 녀석과의 관계를 까발려지기라도 한다면 이 같잖은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할지도 몰라 적당히 해야 했다.

"…대략 짐작은 가긴 하지만, 그게 마음에 안 들어."

아마 깜짝 생파 때처럼 조언을 해줘 안다는 착각. 그게 아니라 직접 만나 옆에서 골라 주고, 그전까지 데이트도 하며 화장실에서 떡 쳤다는 사실을 알면 진짜…난리 날 거다.

"쿠-쿡, 그래?"

때로는 그것이 기대되는 게, 나도 참 성격 나쁘다고 알아차리는 판단점이 되어 우스운 실정.

"응…."
"…어."

서로 끝마무리 겸 대답만 주고받으며 천천히 노려봤다.

"…."

그렇지만, 치고 빠지는 때를 알아야 오래 놀려 먹을  있는 법. 잠깐 조급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곤, 여유를 찾아 느긋하게 침묵을 유지한다면 제풀에 못 이겨서 분한 표정을 지을 거다.

"열어보지 그래? 어차피 네 거잖아?"

그러나 입이 방정이라고,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나. 녀석이 오는 시간도 있거니와 희진이의 반응이 흥미롭기도 했다.

"…그게 언니가 바라는 거야?"

대신 눈치만 늘어서 쉽게 넘어가 줄 거 같지 않은 모습.

"아니, 네가 원하는 거 같은데?"

말은 부정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의도를 들킨  같다.

"…그렇지만, 내가 손대진 않을 거야."

청개구리 심보라고 해야 할까? 하라고 떠미니까 하지 않으려고 해서 반대로 할  그랬나 싶었다.

"왜? 상명이가 너한테 주는 거라고 하던데, 싫어?"

고집을 부리는 희진이에게 너무 뻔한 도발.

"싫지 않아…! 당연히 기쁘지. 오빠가 나한테 준 선물이라면 뭐든지 좋은걸."

염병….

차라리 따박따박 대들 것이지, 연인이랍시고 연인들끼리 할법한 닭살 돋을 짓거리를 떠드니까 내가 다 손해 입었다.

"…그래. 내가 졌다."

순수한 희진이의 고백을 듣자니, 께름칙해져 피하고 싶어지는 자리.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언니?"

알면서 그러는 건지, 진짜 모른다면 친구들끼리 있을 때 자랑하다 뒷담 당하기 딱 좋았다.

"아니, 니들 사이좋은 거. 니 입으로 들으니까 좀, 메슥거리네?"

항마력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내가 정말 외로워 부러움에 이러는 걸까?

"헿-? 아깐 우리 애정행각을 눈여겨보고 싶다더니, 우리 언니가 왜 그럴까?"
"그만해, 징그러. 내가 잘못했어."

실제로 자기들끼리의 애정 행위가 못마땅했지만, 여기선 져주면서 험악했던 분위기를 끝낼 심산이었다.

"푸-훗. 언니, 내가 왜 오빠가 주는 선물을 지금 열어보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아?"

일부로 그랬지만, 기세가 넘어가자 이걸 놓치지 않고 이겨 먹으려고 하는 시점에서 마음이 참….

"몰라, 듣고 싶지 않아."

절레절레 고개를 돌리고, 눈꼴이 셔서 뒤까지 돌았다.

"그건 있지, 헤헤. 오빠한테 직접 받고 싶어서…이히히히!"
"아아아 그만해 그만. 됐어, 니들끼리 알아서 해. 나 양치한다."
"…어?"

듣기만 해도 역정이 나서, 마침 들어오려는 녀석을 지나치며 화장실로 이동하니 의아한 표정을 잠깐 확인.

"잘 씻었어 오빠?"
"아, 응. 덕분에."

이탈하자마자 들려오는 희진이의 콧소리에 눈꺼풀이 파르르 하고 떨렸다.


둘이서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몰라도, 이번엔 희진이가 이긴  같은 느낌이었다. 약간이지만, 녀석의 무표정했던 얼굴에서 샘이  듯 미간을 찡그리고 탐탁지 않다는 기운이 희끄무레.

"헤헤헤헤-…."

대신이라고 희진이는 아까와 다르게 아주 풀어진 듯한 얼굴이라 내가 다 기분이 좋아졌다.

"피곤하지 오빠?"
"응, 뭐…."

이미 오후에 푹 잤다지만,  먹고 씻으니까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건 순식간.

"우히히히히히히…."
"…우-음?"

그나저나 너무 웃으며 반겨주니까, 오히려 불길한 건 짧은 경험에서도 느껴졌다. 상대가 희진이라 그리 걱정은 안 해도, 어째 표정이 음흉해서 이런 생각이 실례임에도 속으로 다잡는 마음.

"옿, 빠-아. 히히히히."
"으응? 왜에?"

혹시 녀석이 술이라도 먹인 걸까? 그사이 취하기엔 너무 짧아서 어디까지나 희진이가 진심으로 내게 장난치는 거라고 판단했다.

"있지이, 헤헿-."

긴급상황! 매우 기분이 좋아 보이는 희진이, 그리고 무언가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 아울러 못마땅해 보이던 녀석의 퇴장…생각해야 한다. 희진이가 지금 바라는 대답….

"하하…너무 기대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내가 조금 민망한데…."

일단 시간을 끄는 것으로 한숨 돌렸다.

"웅-훗, 전혀 민망한 표정이 아닌데 오빠?"

얄팍한 연기력으로는 희진이를 속이기 어려워서, 금방 들켜버린 탓에 귀엽다며 당하는 쓰다듬기.

…내가 연상인데.

"오빠도 참 많-이, 능청스러워 져써-."
"하하하, 흠-."

기대라…섹스에 관한 기대라면 나도 좋지만, 녀석이란 변수가 있었기에 오늘은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그건 희진이도 알만한 사항. 그렇다면 다음으로 알 수 있는 거라면, 직접적으로  수 없어도 야릇한 장난이라면 눈치 봐가며 놀릴 수 있겠네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오빠,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힣-."
"…엉?"

예상했던 걱정보다 그다지 놀릴 생각은 없었는지, 무언의 눈치를 주는 듯한 의도. 특별히 멋들어진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찾으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 응…."

기쁨을 몸소 표현하며 무얼 조르는 느낌인데, 나도 알고 본인도 알지만 내가 말해주길 바라는 인상이….

"…아!"

선물!

탁자에 놓고서 깜박했다. 원래 거실로 돌아오자마자 주려고 했긴 했는데, 언짢은 녀석의 모습과 상반되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 희진이를 마주친 터라 잠시 망각.

"저거, 희진이한테 주려고 산 건데…뜯어 볼래?"

진짜 알면서 여태까지 말하지 않고 내가 손수 말하길 기다렸던 모양이다. 이럴 거면 먼저 뜯던지, 자기가 바로 선물을 언급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던  그만한 감정이 있어서겠지. 인터넷에서 배운 내용이다. 여자의 감정에 이유를 따지는 것은, 여자의 생리에 해박하지 않은 이상에야 하지를 말라고. 지금 보면 또 그 말이 옳았다.

"정말 오빠? 이히힣-웅! 고마워 오빠."

뜯어보라고 권하자 고대하던 몸짓을 보이며 속히 짚어가는 선물. 소파에 앉아 몹시 즐거워하며 포장지를 푸니까 훈훈하면서도 저런 기대감에 값어치가 낮은 물건이라 조금은 걱정되었다. 희진이는 가격을 보고 실망하진 않아도, 남친으로서 해주고 싶은 수준과 사람 심리상 아무리 그래도 최저한의 적정선이란 것이 있었으니.

"우-후흐흐흥-."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니까, 괜스레 목이 타서 음료수 잔이라도 남길 걸 싶었다. 방금 가글을 했음에도.

"…이거, 반지야?"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던 모습에서,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변하자 뭔가 잘못된 거 같은 불길함이 잔뜩 피어올랐다.

"어, 으응…."

정확히는 커플링이지만, 급격히 실망하는 듯한 분위기라 혹시 손가락에 뭐 끼우는 거 싫어하나 싶을 정도. 그때는 녀석이랑 함께 있어서 얼떨결에 산 것도 없잖아 있어서 그런지 생각이 짧았었다. 차라리 목걸이를 줄까 싶었지만, 녀석에게 끌려다니던 탓에 희진이랑 연인이라는 증거를 좀  확고히 하고 싶은 욕심에 택한 커플링.

"후-웅……."

아직 반지함을 열어보기도 전에 무척이나 고민스러운 모습이라 내가 다 떨렸다.

"그, 별로면 다른 거로 바꿔 올 게…."

이내 희진이의 불확실한 의중에 참지 못하고 전하는 다급함.

"아, 아니야 오빠. 싫은  아니고, 훙-."

안색은 한층 진지했으면서,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라도 있을까 하는 희망을 걸었다. 행여나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어쩌면 반지가 손이랑 안 맞으면 어떡할지 고민하는 걸지도….

"……."

정확히 무슨 사연이라도 알려준다면 다음부턴 조심할 텐데, 다시금 침묵이라 바싹 타는 목.

"-…."

녀석에게 떠밀리다시피 산 것부터 나도 썩 좋지 않았었다. 그러고 보면 세안하러 다녀올 때 녀석이 무슨 짓을 하지 않으리란 장담도  했지. 희진이네에 놀러 왔다고 너무 안일하게 굴었던 거 같아서 뒤늦게 자책감이 들었다.

속내를 살피느라 꿀꺽하고 삼키는 마른 침….

"아, 에헤헤-. 본의 아니게 오빠를 긴장하게 해버렸네."

그걸 그대로 보이고 말았다.

"아냐, 뭐, 큼-."

아닌 게 아닌지라, 아니라고 말하기 아니긴 뭐가 아니냐는 상태. 그렇다고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이 살짝 서글퍼졌다.

"히힣-! 난 오빠가 주는 선물은 뭐든 좋아."

장기화한 긴장감에 슬슬 심신이 지쳐가다가, 나에게 하는 말인지 본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로 가다듬고서 반지함을 여는 희진이.

"…오-."

드디어 희진이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처음엔 약간 놀란 듯한 눈동자와 나쁘지 않은 호응에 일단 안심이야 할 수는 있었다.

"이거 커플링이야 오빠?"

자꾸 알면서 물어보는   입으로 대답해주길 바라는 소망 탓일까?

"어, 응. 맞아. 커플링."

불길했던 것치고는 감응이 괜찮았지만, 그렇다고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후훙-…."

반지함을 바라보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져서, 간간한 미소로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

"반지는 그, 너무 이른 거 같기도 하고. 내가 뭐랄까, 첫 월급 타면 살까 싶기도 하고."

희진이의 태도를 무척이나 신경 쓴 탓인지,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서 되는대로 대답하고 있었다.

"원래 목걸이를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너무 싸거나 비싸서 돈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싼 
주려는 건 아닌데, 내 주머니 사정에서 가장 비싼 액세서리지만, 그게…실은 다른   떠오르지도 않기도 하고 또 팔찌를 살까 하다가 헐렁해서 잃어버리진 않을까 하다가 이거 살까 저거 살까 하다 보니 너무 빨리 결정한 건 아닐까 싶고, 차라리 이럴 거면 같이 가서 고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다….

"오빠, 진심은?"

서론이 길었고, 변명이 길었다. 이럴수록 재미없는 이야기만 늘어놔서, 적절하게 끊어주는 희진이.

"너랑 연인인 티를 내고 싶었어…."

내가 횡설수설할 때 희진이가 본론만 말하도록 훈련한 결과, 즉각 본심이 나와버렸다.

"우후훙-! 에헤헤헤헿."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대답인데, 희진이라고 그러지 아니할까? 몹시 흡족했는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게 가까워졌다.

"오빠, 기대해. 오늘 잠 못  줄 알아."
"앟-…!?"

어떻게든 희진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지, 적극적으로 변해버린 행실. 도망가지도 않을 거지만, 잡아먹을 것처럼 돌변하여 테이블에다 반지함을 두고서 일어서길래 괜히 뒷걸음질 치고 싶어졌다.

"개소리하지 말고 자라."
"읗-!"

그러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녀석.

"끙, …쩝."

녀석의 등장에 그리 좋아하기는 어려웠어도, 저돌적으로 변하려는 희진이가 멈춘 건 다행이었다.

…쫌 아쉽네.

"이것들이 봐주다 봐주다 하니까 진짜…."

나를 협박했던 녀석이 맞는지, 뜻밖에 옳은 말을 하려는 분위기.

"암만 시험이 끝나고 방학한 데도,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항시 녀석을 향해 반발심을 내비치던 희진이도 잠자코 있었다.

"하…안 되겠다, 결정해."

실컷 떠들다 말고 팔짱 낀 모습이 마치 잘못한 아이를 타이르는 정형적인 어른의 형상 같은 위화감.

"셋이서 같이 잘래? 아님 희진이 너, 나랑 잘래?"

그러면서 제멋대로 제시하는데, 살짝 자신의 소망을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언-니이…!"
"그건 좀…."

아무리 희진이가 잘못했어도 이의가 있어서 나도 슬쩍 동참.

"너무하단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왜 이러는지, 희진이 너 자신이 더  알잖아?"
"으…."

슬며시 희진이랑 같이 녀석을 바라봤지만, 형식상으로는 우리가 밀리고 있었다.

"잠깐 자리를 비워줬다고 그새를 못 참고 남친 따먹으려고 하네."

원색적인 단어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 녀석. 그런데 생각보다 말을 잘해서 좀 놀랐다. 물론 논리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순전히 많이 한다는 뜻에서.

"아 언니! 따먹다니! 단어 선택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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