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대놓고 몰래 남친 희롱하기(5)
나름 부유하게 사는 거 같아도 실질적으로 보호자의 관리가 부족하니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정.
"…테이블에서 같이 저녁 먹는 것도, 오랜만인 거 같아."
"후훟-그렇구나."
먹다가 뜬금없이 말다툼했어도, 정작 먹는 것에 대해선 좋았던 거 같았다.
"희진아. 이거 가져가 줄래?"
"웅-! 알았어 오빠."
케이크랑 푸딩부터 그릇에 놓아 탁자에 올린 곳에다 눈짓하니까 기운차게 응이란 대답. 그러고선 주저 없이 들고 소파로 가버렸다.
"후훟."
나는 과일을 마저 그릇에 옮기고서 포크도 꺼내 탁자로. 이어 희진이가 가져온 빈 플라스틱 용기의 잔여물을 씻어내고선 버리니까 희진이가 한 번 더 와서 과일이 담긴 그릇을 가져갔다.
"음료는, 포도 주스 하나면 될까?"
저번처럼 녀석의 흉계에 빠져 수면제를 먹는 건 아닐까 조심하면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꺼내는 주스. 우유라던가 다른 음료도 있었지만, 컵과 함께 들고 가기엔 번거로워서 그냥 이대로 가져가기로 했다. 물론 원한다면 우유도 챙기겠지만.
"좋아."
언제 다녀왔는지 빈손으로 돌아온 희진이가 남은 그릇과 음료까지 요령을 부리면서 들자 내가 짊어질 무게가 가벼워져 기어이 왼손으로 우유를, 오른손으로는 포크랑 컵을 인원수에 맞춰 들고 갔다.
"…맛있겠네."
계속 앉아 있던 녀석의 순수한 감상. 둘이었다면 아마 그릇에 옮기기 귀찮아서 포장만 뜯고 먹었을 거라, 담긴 용기만 달라져도 미관상의 입맛을 돋우는 인상이 틀리다. 그걸 노렸던 것이 헛수고는 아니어서 녀석의 사소한 반응을 이끌어 낸 것으로 만족. 취미긴 해도 요리를 하는 처지로서 차린 음식을 긍정적으로 대해주면 싫어할 수 없었다. 비록 내가 조리한 것이 아니지만.
"더 있으니까, 부족하면 더 가져올게. 하하…."
어째 내가 더 집주인에 어울리게끔 권하니까 조잡해진 기분에 뒤숭숭했으나 애써 삼키곤 웃었다.
"풓…, 그래. 잘 먹을게."
돈도 자리도 내가 아닌 녀석의 것으로 마련한 건데, 오히려 녀석에게 인사를 받으니까 괜히 머쓱.
"잘 먹을게 오빠-. 힣…."
희진이까지 동참해서 말해주니까 어색함을 떨치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웅? 오빠는 안 먹어?"
분란이 생기지 않게 희진이의 옆에 앉아 내 앞으로 된 그릇을 두 사람 사이로 치우고선 포도 알갱이 하나를 집으니까 의문을 표하는 희진이.
"별로, 케잌보단 과일이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냉큼 껍질 채 입에 넣어서, 달곰한 과즙을 만끽하다 씨앗이 닿지 않게 어금니로 부수자 밋밋하니 떫은맛이 느껴지려 하자 바로 삼켰다.
"허-엇? 껍질 안 뱉어 오빠?"
과육의 끈적한 여운이 남으려는 찰나에 놀란 모습으로 질문.
"응, 난 다 먹어."
나랑 달리 희진이는 껍질이랑 뱉는지 눈이 똥그래져서 신기한 것을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아…응, 히히."
포도를 먹는 방식에 따라 차이는 있었어도, 그리 특이하다 생각되진 않아서 희진이의 반응을 그러려니 받아들이곤 이어서 입에 넣은 포도알. 그러나 입 안의서 퍼지는 달달함과 다르게 희진이와 녀석의 시선에 평상시처럼 삼키기가 힘들어졌다.
"끙…, 꿀-꺽."
그다지 구경거리도 되지 않을 텐데, 먹는 사람 부담스럽게 자매가 쳐다보니까 불편해지는 목 넘김. 쉬워 보여도 나름 속에서 정비가 필요한 작업이라 목구멍에 넣으려면 얼추 비율을 유지해야 해서 포도의 핵심인 알맹이를 먼저 먹지 않고 기다렸다가 어느 정도 즐겼다면 액체와 함께 골고루 삼켜야 했다.
"하하, 큼…."
자칫 잘못하면 사레가 걸려서, 과일 중 제일 좋아했어도 포도에서 손을 뻗는 건 미루어 자두를 한 입.
"냠-."
베어 물자 과즙이 터져 입술까지 새콤달콤함을 뿌렸다.
"음, 맛있네."
말랑하게 부서지는 식감 즐기기 힘든 눈망울에 포도는 이만 먹기로 하고, 괜스레 목이 타서 잔에다 따르는 포도 주스. 과즙으로 혓바닥 뒤를 포도의 식감이 액체를 묻혀줌에도 갈증이 난 건 아마 고체 상태로 목을 건드렸기에 그랬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희진아."
"웅?"
여전한 눈길에 관심을 내가 아닌 대화로 돌리기 위해 떠올리는 화제.
"소바 말야, 어떤 방식으로 먹고 싶어?"
말이야 뭐든 된다는 식으로 했지만, 사실 할 수 있는 건 판모밀 하나뿐이었다.
"방식?"
그러나 갸우뚱하는 걸 보아 아무래도 희진이가 아는 소반 한 가지인 듯한 모습. 물과 비빔의 냉면처럼 소바도 종류가 있어 물냉면처럼 시원한 육수에 먹을지, 아니면 판에 두어 적셔 먹을지를 알고 싶었다.
"냉이나 온 아니면 판."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잠깐 까먹었다면 떠올리기 쉽도록 종류를 언급하여 원하는 걸 고르길 대기. 그러면서 따라놓은 음료를 입에 가져다 대는 동안, 내게로 고개를 돌렸던 희진이와 눈을 오랫동안 마주쳤다.
"…세 개나 돼 오빠?"
보편적으로…아니, 내가 아는 한 세 개.
"어디까지나 내가 아는 건."
전문성도 지식도 부족하다 보니, 내가 모르는 방법 말고 다른 종류가 있을지도 몰라서 단정 지어 말하긴 곤란했기에 적당히 대답해줬다.
"냉은 물냉면처럼 시원하게, 온은 우동처럼 뜨겁게. 그리고, 판은 국물 없이 면만 집어서 쯔유에 찍어 먹는 거야."
솔직히, 직접 해 먹는 거라면 판모밀이 무난했다. 그리고…판 말고 다른 걸 먹겠다면, 엉성하게 해주느니 그냥 사 먹으라고 권할 거고.
"찍어?"
할 수 있는 건 판모밀 뿐인데, 그것에 관심을 보여 왠지 마음이 놓였다.
"응, 냉면을 보면 물냉 비냉 있잖아? 소바는 냉모밀 온모밀 그리고 찍어 먹는 판모밀이 있어."
설명도 상대가 아는 내용을 떠들면 알은체한다 생각해서 눈치를 보자, 알려달란 기색에 아는 정보를 간략히.
"우-움, 종류가 많네."
실제로는 진짜 많을지 모르겠지만, 겨우 세 가지인데 많다고 하기엔 과장인 거 같으나 주관은 서로 다르니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언니는 뭐가 먹고 싶어?"
그러자 바로 상체를 뒤트는 희진이. 해달라고 이야기를 꺼낸 건 본인인데, 어째선지 녀석에게 묻는다. 설마하니 종류별로 먹고 싶다고 하면 빠르게 포기하고 시켜 먹자 말해야 하는 상황. 희진이의 질문에 급히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소바."
지금까지 내가 떠든 건 뭐가 되는지, 불안함을 지니고서 뭐가 먹고 싶은지 기다리니까 나온 단어는 여전히 불명확한 이름. 냉면도 물이 있고 비빔이 있듯이 앞에 추가로 주어가 붙어야 했다.
"그러니까…, 오빠가 방금 설명해줬잖아? 냉인지 온인지 판인지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희진이에게 희미하게 미소. 아까의 앙금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원래 녀석에게 말투가 은연히 따갑게 구는지 어조가 약간 사나워도 이번엔 희진이 편을 확실히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녀석을 쳐다보자 계속 정면을 향해 무관심한 태도로 케이크를 먹는 상태.
"…."
아예 흥미도 없어 보였다.
"판모밀…."
주목받으면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다 뒤늦게 대답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빨리 협조해주니 고마워해야 하려나?
"판모밀? 그럼 나도."
메뉴가 정해지자마자 희진이도 금세 골라주었다.
"좋아, 그럼 내일 점심에 판모밀 해줄게."
주방에 도구가 뭐뭐 있는지 자세하게 살펴보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정집에 냄비 하나 없을까? 비록 채반조차 물을 끼얹으니 먼지가 흘러나와 걱정스러웠어도, 전부 판모밀을 선택하니까 마음이 놓였다.
어디, 이따 주방에 돌아갈 때 얼음도 준비해야지.
"히히, 좋아! 고마워 오빠!"
녀석과 함께라 접촉이 없던 희진이가 기회를 잡았는지 냉큼 어깨에 뺨을 기대며 팔뚝을 안는다.
"어, 응…헤-."
아닌 척해도 솔직히 기대했던 몸짓이라, 익숙해져서 얼떨결 한 미소가 아닌 태연히 받아들이는 표정. 적응했다 하여도 헤벌쭉거리는 건 참기 어렵긴 해도 생각할 여윤 있어서 조그마한 불안감에 녀석을 힐끗 훔쳐봤으나, 여전히 우리에겐 흥미가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포크를 입에 넣었다.
"잘 됐다 언니. 그치?"
녀석도 괜찮은가 싶어 보여서 안심하며 풍만한 가슴 감촉을 즐기다가, 금방 떨어지길래 아쉬움을 드러내려다 희진이가 녀석을 부르니까 애써 무엇도 내색하기 싫은지 꾸욱하고 다무는 입술.
"…-."
여태껏 희진이가 내게 보여준 행실만 보면 녀석에게도 친근하게 기대 애교를 부릴 것 같았는데, 말은 활기차도 그다지 녀석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기왕 이럴 거면 계속 붙어 있어 주지….
"…크-흠."
처음 조심스러웠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최근 욕망에 솔직해진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러게."
그나마 희진이가 대답해줄 때까지 쳐다보자, 마지못해 대답하는 듯한 녀석.
"히히힣-."
이게 정말 여자들 간의 기 싸움인 건지 알 수 없었어도, 기어이 답변을 들으니까 옆에서도 알 수 있게끔 희진이가 한순간 자신감을 얻은 표정이 되어 귀여웠다.
"그럼 내일도 오빠하고, 언니랑 같이 식사하는 거네? 헤헿…."
약간 공격적인 어조로 싸움을 걸다, 인제 와서 내일도 함께하는 사실을 좋아하니까 도리어 의미심장한 느낌.
"쿡-, 그러게."
그렇다고 녀석은 희진이의 명랑함에다 초 칠 생각은 없었는지 같이 기뻐는 해줬다. 비록 약간은 기대했던 희진이와의 정사는 오늘내일 불가능하겠지만, 같이 있는 것에 행복함을 느꼈으니까.
"근데 오빠."
"응?"
키도 비슷하면서 올려다보는 얼굴로 부르니까 은근한 색기에 어제오늘 잔뜩 했으면서 발기하려는 자지를 막으려고 애써야 했다.
"어디서 잘 거야?"
"어-…."
그건 내가 아니라 자기가 정해줘야 하는 것을 모르는 걸까?
"…."
손님인 주제에 잠자리도 모르면서 어디서 자겠다고 말하긴 껄끄러웠다.
"…소파?"
딱히 생각나는 장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희진이 방에서 자기엔 녀석도 있어 너무 노골적이라 염려한 대답. 여기서 생각 없이 장난으로라도 받아쳤다가, 나중에 녀석에게 어떤 놀림을 받을지 몰랐다.
"여기? 움-…."
혹여 밤새 티브이를 보려는 건 아닐 테고, 장난기를 머금으려던 입꼬리가 올라가려다 멈춰 뜻밖이라는 눈동자에 아마 자기 방에서 잘 거라는 장난을 기대한 모습. 아쉽게도 아직은 그리 능청스럽지 못해서 주저하고 말았다.
"내 방은 어때 오빠?"
생각은 했지마는….
"어, 어…? 그게, 읗-…."
살짝 바랐으면서도 우려하던 문장이 나오자 끝내 당황스러움을 비추고 말았다. 이미 상정까지 했었지만, 직접 들으니 흔들리는 동공에 희진이와 녀석을 번갈아.
"훟-! 너무 놀라는 거 아니야 오빠?"
그러자 배시시 웃어서, 추론했던 대로 놀란 반응을 보고 싶어 녀석이 있음에도 이런 질문을 한 거 같았다.
"야밤에 여자친구 집으로 오면서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봐?"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이론과 실전은 달라서 생각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거뿐.
"아아니 그건, 끄-응…."
녀석이 있음에도 거리낌 없이 놀리는 솜씨를 발휘하니 다물 수밖에 없는 입의 의미를 과연 알고 있을까? 가족이 곁에 있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애정행각을 벌이는 희진이도 놀라웠지만, 이런 둘 앞에서 태연히 있는 녀석도 끈질겼다.
"히히힣, 왜 그래 오빠? 언니 앞에서 이런 모습이 부끄러운 거야?"
내가 희진이만이 아니라 이따금 녀석도 쳐다봤던 사실을 의식했는지 구태여 녀석을 끌어들이며 지적. 이러니까 가급적 녀석과 관련 지으려 하지 않으려던 행위가 전부 허사가 되는 거 같았다.
"괜찮아 오빠. 언니는 되려 우리의 이이-런 모습으을! 구경하기 좋아하는걸?"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지, 번번이 녀석을 자극하는 언사. 몸은 완전히 내게 기댔지만, 눈길은 분명하게 녀석을 흘겨보고 있었다.
"…그래도."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밖에서든 안에서든 쑥스러운 마음. 두근거리는 심장이 긴장해, 이게 좋아서 그런 변화란 걸 알지 못했다면 얼굴까지 빨개졌을 거다. 나름대로 경험이 쌓였기에 간신히 입술만 옴짝달싹할 뿐.
"글쎄 있지 오빠, 언니가 우리 둘만 있을 때 했던 짓에 대해서 무척, 흥미가 짙은가 봐."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답이 예상가는 의도를 짐작하기 무서워졌다.
"우리의 아-주. 끈끈한 사랑을 말야."
잘도 낯부끄러운 말을 하면서, 어째 희진이의 뉘앙스가 녀석을 도발하는 분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