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대놓고 몰래 남친 희롱하기(4)
난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희진이랑 날 한데 묶어서 하는 말. 나와 희진이 사이에 녀석이 있다는 것이 불만인 건 나 역시 그렇지만, 지금은 녀석이 우리에게 민폐임에도 배려해주는 처지였다. 그걸 희진이가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오늘따라 감정 기복이 이상한지 낌새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눈치.
"아니, 그건 아니지만…그래도…!"
기세 좋게 대들려고 해도, 녀석의 논리와 주어진 상황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희진이였다. 희진이가 오로지 감정만 가지고선 역전할 수 없음에도, 굳이 이러는 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던 탓일까?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언니보고 사회성을 기르라고 떠들던 건 너란다.
쌓인 건 희진이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입안의 내용물을 삼키고는 또박또박 반박.
"어…?"
"그런 언니가 지금 새 친구랑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데, 혹시 질투하는 거니?"
말이 끝날 무렵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곤 나를 희롱하던 팔을 들어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당했다.
"이런 걸 바란 건, 희진이 너 아니야?"
그걸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허용. 희진이가 어이없어지려는 표정을 참으며 파르르 눈썹을 떨었다. 실제로 어이없는 표정은 내가 하고 있지만.
"헤-…? 그렇네, 보기 좋아! 친구 하나 없는 불쌍한 언니에게 내가 멋진 친구를 소개해줬으니까 좋아해야겠지. 그야 우리 오빠는 아-주 귀여우니까!"
밥 먹다 말고 이게 무슨 소란인지, 자매의 싸움 같지 않은 말싸움에 휘말려 이도 저도 하기 어려워졌다. 그러고 보니 문득, 처음 놀러 왔던 날 자신의 친언니 보고 좋지 않은 말을 꺼냈던 게 그걸 직접 언니에게도 했던 발언이란 걸 깨닫자 비로소 좋지 않은 예감이….
"쿠-훟. 맞아. 귀엽지, 아주."
"읗-…!?"
이젠 아예 다툼을 빌미 삼아 내게로 뺨을 문댄다. 부드러운 감촉이 어깨에서 광대뼈로 이어지는 동안 맡은 녀석의 비누 향은 희진이의 샴푸 향과 미묘하게 다른 느낌.
"으읗, 그만…."
그렇다고 야릇하니 좋은 기분을 희진이 앞에서 내색할 수 없기에, 불편하게도 어색하니 껄끄러운 표정 드러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알았으면 이만 떨어져 줄래 언니? 친구 하나 없는 불쌍한 언니에겐 막 새로 사귄 친구일지 몰라도, 오빤 내 하나뿐인 남친이거든?"
노골적으로 시기를 유발하는 녀석에게 걸려든 희진이의 행동이 단순해져서 이만 말려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 하나 벗어나기엔 밀착된 감촉이 좋아 본능이 이성을 누르며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를 사겼다면서 동생 남친에게 달라붙는 건 보기 흉해 언니."
그렇게 떨어져야 하나 이대로 있어야 하나 머릿속에서 싸우다가 툭툭 내뱉는 희진이의 강도가 심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굳어버리는 표정. 흘깃하고 녀석은 어떤지 살피니까 여전한 무표정에 살얼음 같은 차가움이 설핏 느껴졌다. 동생에게 무시당하는 것이야 당연히 좋지 않겠지. 사실관계가 어찌 됐든 상관없지만, 그게 감싸줘야 할 가족이 그런 거라면 더더욱 듣기 싫을 거다. 비록 녀석이 먼저 시비 걸었다 하여도.
"그래? 이런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를 데려오는 넌 흉하지 않고?"
어느새 좋지 않은 감정싸움으로 치달아 이상함에 얼른 박차고 일어나 말려야 함에도 몸이 뻣뻣해져서 쉽사리 움직일 수 없어졌다. 어찌 보면 안일함에 가까운 태도였으나, 처음부터 나서서 바꾸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은 자신에게 의아함이 들었을 땐 이미 끼어들 타이밍이 늦어서.
"으-…."
여자들의 싸움에 무턱대고 제지하기 어려움도 존재했다.
"그, 그만하자…좋게 밥 먹고 있는데. 응?"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말이 어울리는 분위기. 당최 이해하기 어려운 희진이의 행태는 설마하니 녀석과 나의 비밀을 들킨 건 아닐까 싶은 조마조마함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심각한 분위기를 구태여 자처할까?
"아…, 오빠."
잠깐 시야에서 내가 사라졌었는지, 비로소 맨눈으로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듯싶었다.
"…그러게. 미안해 언니. 내가 좀, 많이 흥분했나 봐."
다행히 발끈하며 시작했다가 폭발로 끝난듯한 사태가 가까스로. 그러면서 희진이가 일어서기도 전에 서둘러 일어서자, 겸사겸사 녀석의 손길에서 벗어나니 한결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녀석과 나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끊임없이 쏘아붙이거나 태도에 변화가 확실할 텐데, 지금 건은 변명처럼 단순한 흥분이었을까?
"내가 그리로 갈게. 그럼 됐지?"
그런 것치곤 격앙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웃고 있어도 내심 화를 품은 모습에 달래주려고 소파 뒤를 돌아서 희진이에게 가니까 녀석이 내가 있던 자리로 이동했다.
"쿻…귀엽긴."
희진이의 사과에 받아주기는커녕 쫄래쫄래 도망가는 나를 보고 웃는 녀석이라, 밑도 끝도 없는 마이페이스란 사실을 재차 깨닫곤 겸연쩍은 미소가.
"먹자…."
얼른 희진이의 옆에 앉아서 일어서려는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진정시켰다.
"웅…오빠."
그러자 다행히 잔뜩 솟아 일어나기 직전인 상태에서 힘이 빠지고는 추욱. 처지진 않은 채로 순수하게 풀어져서, 인상을 쓰던 표정이 차차 누그러졌다.
"후-."
별안간에 희진이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서 놀랐으나, 덕분에 둘 사이의 골이 예상보다 크고 깊다는 것을 대략적으로나마 짐작. 아무래도 성인이 되기도 전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사촌오빠라는 사람이 얼마나 보호자로서 책임을 다했는지 몰라도 현재 둘을 돌봐줄 만한 성인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런 걸 거다. 착잡함을 감추며 괜히 둘의 일에 섣불리 참견해봤자 좋을 건 없으리란 예감이. 끝내 동정심이 들어도 결국,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상처가 더욱 곪아 심해질 거라 섣불리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쩝…."
그렇지만, 희진이가 장난을 자주 쳤어도 실제로 화라던가 진심으로 짜증을 내는 모습은 사실 오늘이 처음. 그래선지 어설프게 달래기보다는 그저 조용히…설령 눈치만 보는 걸지라도, 희진이가 먼저 멀끔해진 인상을 풍길 때 비로소 편하게 운을 띄우자고 마음먹었다.
"웃-, 하…."
몸은 자리를 옮겼어도 음식은 저쪽 그대로라 녀석이 옮겨 줄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귀찮아도 테이블 앞을 돌아 내가 먹던 음식이 담긴 도시락을 당기고선 드디어 앉는 자리.
"…움, 우물."
묵묵히 음식을 먹는 희진이가 살짝 무서웠지만, 나름의 찔리는 구석도 있다 보니 어느 정도의 짜증이나 안 좋은 감정은 받아 줄 용의가 있었다.
"…."
그러나 이렇게 직접 느닷없는 화를 겪으니까, 제 딴에 각오했던 것이 초라하게 느껴져 다시금 상기. 녀석이 오기 전에 암만 어른처럼 연인 행세를 했어도 우리 둘의 본질은 아직 어리기에,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만을 알려주었다.
"하-…."
사과를 했어도 엎드려 절받는 식이라 그런지 희진이나 녀석이나 다 먹을 때까지 음식 삼키는 소리 말곤 별로 내지도 않아 무거운 분위기.
"쿡…."
이런 나의 심정을 필시 알고 있기에,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나를 향해 보기 좋게…가벼이 비웃었다.
"………잘 먹었습니다."
냉랭해진 분위기가 단지 에어컨 탓은 아니어서 피하고 싶은 맘에 후다닥 먹은 건 나뿐일까? 말없이 식사해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희진이와 평시 무표정이었으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꼬리가 계속 올라가 내려 올 생각 않고 느긋하게 우물거리는 녀석하고 뭔가 대비되는데, 그래도 자매라고 먹는 속도가 일정하니 비슷해서 느긋이 절반가량 해치우고 있었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서로 입이 작아서 그런 걸까? 희진이가 디저트를 먹을 땐 나보다 많이 먹는다고 생각했지만, 밥 배와 간식 배가 정말 따로 있는지 여기서는 둘 다 깨작깨작.
"아, 푸딩이랑 케잌 사 왔는데. 밥 다 먹고 나서 더 먹을 거야?"
희진이가 입을 열기 전에 조용하겠다는 생각을 보류하고선 식사도 마쳤겠다, 녀석하고 희진이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간식을 언급했다.
"…움-?"
그러자 드디어 나를 쳐다보는 희진이. 녀석도 덩달아 쳐다봤기에 찜찜했지만, 엄연히 그럴 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기에 시도는 성공적이라고 봐도 좋았다.
"…분명, 언니 것만 사 오지 않았어 오빠?"
희진이가 요구했던 물건이 전부 녀석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설마하니 자기 건 말하지도 않아서 갸우뚱하는 고개.
"아니, 먹는 거는 다 같이 먹어야지. 거기다 희진이가 좋아할 법한 케잌이 있길래, 챙겨왔어. 하하-."
사실 내 돈을 쓰는 게 아니라 고르는 것에 망설이다가 이내 따로 돈을 청구하면 줄 생각으로 잔뜩 골라 왔다. 단지 희진이가 불러준 음식이 녀석 혼자 먹을 양이란 생각은 못 했어도.
"힣…그럼 부탁할 게 오빠."
언짢던 기분도 한결 누그러졌는지 굳은 표정이 활기를 되찾아서 안심했다.
"그래. 먹고 있어. 준비하고 있을게."
뾰로통한 표정도 사라지자 기쁜 마음에 대답하곤 간식 대접할 생각에 서두르는 발길. 사실 접시에 보기 좋게 케이크를 놓는 거 말고는 크게 할 일도 없겠지만, 소소하게 포도랑 자두하고 사과 하나도 같이 사 와서 세척한 뒤 먹기 좋게 두려는 계획도 있었기에 마음이 분주해졌다.
"…휴-."
밤이 늦어서 쿵쿵 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걸음. 그나저나 나도 그렇지만, 희진이까지 늦게 자도 괜찮을는지 돌연 걱정되었다.
"흠-…."
이미 둘에게 벗어났기에 플라스틱 용기의 잔여물을 싱크대에다 대충 씻고는 어제 사용했던 쓰레기봉투에 찢어지지 않도록 나무젓가락 중간을 부러뜨린 뒤 버려 흐르는 물에 집어넣어 비비는 손. 손의 물기를 닦고 냉장고를 여니까 썰렁함에 위화감을 느껴졌지만, 희진이가 넣어두었던 케잌과 푸딩하고 과일을 꺼내 탁자 위로 놓았다. 그러고선 그릇을 찾는데, 있을 만한 곳인 싱크대 위의 서랍을 여니까 생각처럼 위치한 그릇. 음식을 따로 덜어 먹기 알맞은 크기라 인당 하나씩 총 세 개를 꺼냈다가 과일 놓을 그릇도 함께 꺼냈다.
"…응?"
그렇게 만지고 나니까 부자연스러운 감촉이 느껴져 그릇을 놓고 손가락을 보니 껄끄러이 뭉쳐지는 먼지.
"큼…."
도대체 얼마나 사용을 안 한 건지, 닫으려던 서랍 문을 두고서 안을 확인하니까 수북하진 않아도 먼지가 옅게 쌓여 있었다. 싱크대 옆에 설거지한 그릇 놓는 통이 비어 있진 않아서 사용하긴 하는구나 싶었는데, 이건 좀 심각하단 생각. 그나마 포크는 깨끗한 게 나은 점이라고 생각하기 싫어서 냉장고를 열었을 때부터 느꼈던 어긋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반찬이 없네."
주방에 들어서서 느껴지던 말끔함은 그저, 자주 사용하지 않았기에 때 묻지 않은 흔적의 결과. 그렇다고 아예 깨끗한 것도 아니라서 타일을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색이 바랬고, 가스레인지 역시 사용 후 전혀 닦지 않아 용도에 떠오르는 의문.
"끙-."
이럴 거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
이래서야 내일 점심에 겨우 메밀 하나 해줄 수 있을까 싶은 걱정에 냄비라던가 채가 있나 아래쪽 서랍을 여니 있어서 안도. 기왕 내일 사용할 거 같이 세척하려고 과일을 먼저 씻으려 꺼내 채 위로 놓고는 물을 틀어 적당히 세정했다.
"…하하, 하-."
잠깐 곤란했던 건 약간이긴 해도 채 역시 먼지가 묻어나와서 홀연 헛웃음이 나왔던 점. 식사는 오로지 배달로만 해결한단 생각에 영양 면에서 섬뜩한 근심이 생겼다.
"에-효…."
작게,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면서 어른 없이 둘이서 생활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있구나 싶은 생각. 가볍게 보진 않았어도, 서투르게 참견했다간 반발심만 느껴질까 봐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이런 실태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간섭하고 싶은 기분. 오지랖인 것은 알았어도, 최소한 먹는 것엔 욕심을 부려서 좋은 걸 먹이고 싶어졌다.
"……."
해도 마땅한 해결책은 없어서 생각을 접고, 과도를 찾아 이것 또한 씻고는 사과를 깎으려다 말아서 내일 먹기로 하고 자두랑 포도만 손질. 칼은 괜히 집었단 생각에 살며시 통에다 두었다.
"히힣, 집에서 과일 먹는 건 또 오랜만이네?"
자두를 두고 포도의 물기를 털어 그릇에 놓으니까 어느새 다가온 희진이가 녀석 거까지 싱크대에 넣고는 하는 말.
"그래? 잘됐네."
둘만 있다는 말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이 정도까지 나쁜 줄은 몰라서 살짝 눈물이 날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