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야밤의 초대(1)
안아달라는 듯이 두 팔을 녀석에게로 뻗자 내 행동을 해석하려 잠시 놀랐다가 이내 파악하여 알아서 뒤를 돌아 쭈그리는 녀석.
"흫-! 좋아…!"
달려들어서 와락…안으니까 반동에 녀석의 몸이 흔들렸지만, 남자답게 버티자 무의식적으로 본심이 흘러나왔다.
"…택시까지, 어버-죠."
그러다 문득 창피함에 붙이는 말은 과다한 콧소리.
"알았어…."
한숨을 섞어 내뱉은 대답에 약산 짜증이 깃들었어도, 힘들었으니까 애교로 받아들이고는 등에 얼굴을 묻으며 상체를 살짝궁 올라탔다.
"히히힣…."
이제 막 오후가 시작될 무렵에 끝을 달리는 분위기라, 머리는 쌩쌩해도 편안해지니까 금방 피로해지는 몸.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을법하지만, 나 때문에 귀찮게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도 모자라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니까 양심이 많이 찔렸다.
힘들겠지…?
자존심이 뭐라고, 얼마 안 가 에스컬레이터에 도달. 이제 내리면 되는데, 잠깐 업혔다고 고집을 부려 어깨를 부여잡으니까 묻지도 않고 한숨 쉬며 계단으로 가는 녀석이었다.
"하-. 하-아."
두 층 정도 오르자 지친 모습이 보여 지금이라도 내릴까 하다가,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이고 원피스 앞부분도 아직 마르지 않아 좀 더 어리광부리기로 했다.
"끟, 차! 후-…."
이쯤 되면 한 번쯤 힘들다고 혼잣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도 않고서 땀만 뻘뻘 흘리며 오르는 녀석. 원체 이러는 이유가 원피스의 젖은 앞부분이 너무 노골적인 부위라 가리려고 이러는 거였다.
"하아, 하-아. 하-아…."
계단에 오르느라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더니,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닿아서 원피스에 젖었던 부근이 넓어지는 실태. 너무나 미안해져서 나만 택시로 가는 것이 아니라 녀석에게도 택시비를 쥐여주며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
인내심 굉장하게 택시 타는 곳까지 업고 와서 멈추니까 군말 없이 내리는 체구. 택시가 네 대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 바로 타고 가면 되지만, 그 전에 녀석에게 보답을 전해줘야 했다.
"헤헤헤헿, 고생했어 자기-쪽!"
둘 다 땀이 곳곳에 흐르는 와중에도 내가 하고 싶어 해주는 뽀뽀. 너무 진득하게 놀았던 탓일까? 조금은 풋풋한 감정도 느껴보고 싶었다.
"엇-!? 하하…"
나름 가벼이 살랑거리며 귀엽게 쪽하고 물러나 배시시 웃었는데, 녀석은 별로 기쁘지 않은 모양. 하기야…우리 사이를 생각하면 좋아하는 것이 이상했다.
"…이거 받아.
어색한 표정의 녀석이 보기 싫어 얼른 손가방을 열어서 꺼내는 오만 원권 한 장. 한 번밖에 접지 않았기에 깨끗한 상태로 녀석에게 건넸다.
"뭐야 이건?"
설마 지폐를 보고 돈이 뭐냐고 묻는 건 아닐 테지. 그러나 수긍하며 받기엔 까다로운 녀석이라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까탈스럽긴.
"그, 어울려준 보답."
그러나 그 조건을 말해주기엔 피곤해서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함축하여 말했다. 사실 돈 주는데 이러쿵저러쿵 사유를 붙이는 것도 귀찮았고.
"전에도 말했지만, 이건 나 말고…."
"희진이 주긴 싫어."
녀석이 말을 하는 도중에 끊어서 딱 잘라 말했다.
"저번이야 걔가 생일을 구실 삼아 너랑 함께 쓰라고 돈을 준 거지만, 이번에 주게 되면 분명 지 용돈인 줄 알고 다른 데 쓸걸? 아깝지 않아? 네가 고생해놓고 희진이가 펑펑 쓰는 게."
상명 오빠랑 있을 때 나랑 같이 가계부라던가 돈 씀씀이에 대해서 배운 것이 있긴 해도, 관여하진 않다 보니까 희진이가 돈 관리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랐다.
"난 차라리 그게 좋은데? 굳이 나랑 돈을 쓰지 않더라…."
"내가 싫다고."
희진이도 몰랐지만, 녀석도 모르니까 답답해서 높아지는 언성.
"그럼, 알았어…."
돈 문제가 돼서 확실하게 하려는 심정은 알겠는데, 꼼꼼한 부분이 괜찮았어도 당장 흥분이 앞서 녀석에게 화를 낸 것처럼 굴었다.
"…고마워."
그러자 서둘러 받는 돈.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고 들었다.
"하하…, 근데 이러면 나보다 돈을 더 쓴 거 아니야? 이래서야 내가 속옷을 사준 의미가 없는 거 같은데?"
좋았던 흐름이 무너지려니까 화제를 돌리려는 듯한 모습. 녀석의 그런 배려를 알아차리곤, 머리에 피가 쏠린 자신을 자각하여 떠올랐던 어깨를 내리고 진정했다.
"자기는 나보다 데이트를 많이 한 주제에, 겨우 그런 걸 따지는 거야?"
대화의 방향을 바꾸느라 어설퍼진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따지는 건 나만의 방식대로 장난스럽게 받아치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렇게, 자기랑 내가 함께 즐기고 먹고 했는데."
내가 녀석에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듯이, 녀석이 희진이랑 데이트하고 있다면 필시 같은 마음일 거다. 별로, 추잡스럽게 질투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하하, 쩝."
여전히 반론하지 않으니까 재미없는 대화. 소통이 별로 소통 같지 않았으나,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었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눈썹을 찌푸려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오히려 나쁜 인상만 자꾸 심어주는 셈.
"아무튼, 이걸로 대충 데이트가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아. 어울려줘서 고마워 자기."
다시 한번 인사하면서 맨 앞의 택시 뒷문을 열고 좌석에 앉았다. 그러고서는 기사님께 목적지를 말하기 전에 내리는 창문.
"자기야, 오늘 즐거웠어."
제멋대로 휘둘리다가 인사받는 처지라면 어이가 없겠지만, 순수하게 진심으로…남자와 인연이 없을 거라 상정한 청소년기의 끝자락을 좋은 추억으로 남게끔 어울려줘서 고마웠다.
"그래…잘 들어가."
안타까운 점은 녀석이 나를 언짢게 생각해서 이런 감사조차 좋게 받아들이지 않고 설렁설렁 넘긴다는 거. 첫 단추부터 잘못 꿰맨 시점에 자초한 일이라 불만을 가져봤자 내 손해란 걸 알았지만, 단순히 섹파로만 보기엔 억눌려왔던 감정 덩어리가 욕심을 부려 녀석에게 욕구의 해소가 아니라 의지를 하게 돼서 곤혹스러웠다. 당연하게도 글을 쓰는 작가로서 이런 감정까지 기록하며 또 여운에 잠겨 마음을 달래지만.
"후훟…."
키홀더야 보여주지 않으려고 꼭꼭 숨겨 두겠지만, 지금 선물 받은 머리핀은 들어가면서 볼 수 있도록 착용할 생각이었다.
"쿠-훟."
숨긴다는 건 어디까지나 키홀더지, 머리핀이 아니니까.
눈썰미가 좋다면 나랑 같은 머리핀을 받았다고 언급하겠으나, 거기까지. 희진이에게 우리 사이를 알리고 싶은 생각이야 없었지만, 완전히 숨기기는 별로라 교묘하게 힌트를 줘서 긴가민가한 의심 정도만 주면 재밌겠다고 장난기가 생겼다.
"어디 갔다 왔어 언니?"
아, 말하는 걸 깜박했네.
간소한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복도에서 희진이랑 마주쳤다.
네 남친이랑.
"영화 보러…쿻-!"
속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기니까, 차마 흘러나오려는 웃음 참기가 어려워졌다.
"웅…요즘 자주 나가던데, 남자라도 생겼어?"
어제도 영화 보러 가긴 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 대신에 연애 이야기로 넘긴다. 자긴 이미 남친 있다고 여유를 부리는 건지, 표정에서 같잖은 우월감을 보인 건 기분 탓일까.
"…뭐, 그렇지-."
다름 아닌 네 남친 말이야.
요새 기어오르는 터라 언제 한 번 기를 꺾으려고 생각하는데, 마땅하게 야단칠 것이 없어서 조용히 넘어갔다. 건수야 생긴다고 바로 닦달하기엔 체격 차이도 있었지만, 녀석을 상대하다 보니 왠지 희진이가 애달파져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지 의문.
"진짜!? 누군데 언니? 내가 아는 사람이야?"
짜짠-! 놀랍게도, 네 남친이야….
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그랬다간 사이가 완벽히 틀어질 게 뻔해서 간신히 참고.
"쿻-! 아주 잘 알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훙-, 누구냐면…."
네 남친 오늘 쩔더라.
라고, 변명과 녀석을 번갈아 가며 상념으로 무심코 내뱉을 것처럼 위험해진 상황. 가까스로 사고를 정리하여 누구라고 말하려니까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자, 그냥 거짓말이라고 말하려니까 비웃음 살 거 같아서 갑자기 말을 꺼내기 어려워졌다.
"또 최애캔지 먼지 하는 거랑 다녀왔다고 하면, 난 듣지 않을래."
…야발련이?
그러다가 짐짓 추정하고는 단정 지어버리는 태도에 울컥했지만, 그래 봤자 실제로는 자기 남친이 내게 목줄이 채워져 생체 딜도로서 활약하는 사실을 알려주기엔 가여우니까 언니인 내가 참아야겠지.
"쿠-쿻, 그러던가."
생각해보니 희진이가 조바심을 내던 때가 언제더라…맨날 떼를 쓰며 내 걸 빼앗아가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금방 성장해서는 건방지게 몸매도 언니보다 좋아지고. 괘씸해서 이대로 넘어가기엔 언니로서의 위신이 떨어져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게 최근 희진이만 보면 느끼던 알 수 없는 감정이었는데, 설마하니 이러한 불안감일 줄은…. 생각보다 희진이에게 느끼는 질투가 커서 한심했어도, 이런 기분을 묘사하여 소설에 이입시키면 제법 좋은 심리묘사가 될 거다.
"난 먼저 잘게."
"…그래-."
영감을 받아서 얼른 글을 쓰고 싶어지니까 희진이를 지나쳐 들어가는 방. 마침 주인공과 라이벌, 히로인을 다룬 삼각관계다 보니 대략적인 줄거리를 얼추 써놓고는 잠들 생각이었다.
"쿻…난 정말 최악의 언니야."
노트북을 켜며 짐을 내려놓더니 글을 쓰면서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처럼 행동하여 아무도 없을 방에서 혼잣말. 원초적인 피로함에 글을 다 쓰면 대충 샤워 후 수면에 들 생각이었다.
"쿠후훟-!"
다음엔, 녀석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며 섹스를 즐길지 망상하면서….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녀석과 있는 것에 자괴감이나 죄책감이 서서히 어설퍼지는 단계. 이 점이야말로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급격한 피로에 수면으로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버틸 수 없었다.
"끟, 하-아…."
기력이 다한 건지, 상상 이상이라서 쓰러지기 전에 인간은 피곤해지면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그냥 자고 싶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잠들었다가, 현재.
"…-."
스마트 폰의 화면을 보니까 저녁을 넘기고 벌써 밤이었다.
"쩝."
원래라면 밥 먹자고 말씀하셨을 텐데,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으신 모양.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파서 내려가려다가, 누구한테 연락이 왔을까 확인하니까 희진이에게서 온 것이 있었다.
─2019년 7월 7일 일요일─
희진♥
[오빠]
[모해?]_오후 2:11
"…."
시간을 보니 씻고 막 잠들었을 시기. 그리고 지금은 열 시에 가까운 시간이라 그동안의 공백을 어떻게 설명할까가 걱정됐다.
[미안, 잤어 ㅎㅎ;;] ◎ ▶
정확히는, 왜 공백이 되었는지가 솔직하게 말하기가.
[ ] ◎ #
"후-…."
여태 화면을 보며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일이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무사히 대처해야 했다.
"…쩝."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목이 마른 상태를 참고서 전화. 시간이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토-크로 대화하느니 직접 통화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불어 희진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기도 했고.
"웅, 오빠-."
송화음이 네 번 지나고서 받았다.
"어 희진아. 토-크했길래, 지금 봐서."
늦게 답장 준 게 마음에 걸리니까 연락했다는 어조로 감정을 실어 말했다지만, 전해졌을까?
"아이, 참-. 오늘 바빴어 오빠?"
당연하게도, 왜 그랬는지 묻는다.
"아니, 오후 내내 잤어. 기절한 것처럼."
주말에 푹 잤다는 것에 대해선 딱히 이상할 것 없으니 비유를 붙여 답변. 그러나 어째서 잠들었는가에 대해 무척 켕기는 일이 있다 보니까, 그것에 관해 묻는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변명을 골똘히 찾아야 했다.
"에? 어쩌다가?"
그러기도 전에 곧장 단도직입적으로.
"어, 그게…."
너희 언니 속옷을 내가 입었다가 찢는 바람에 새로 사준다고 만나서 밥도 먹고 영화도 보다가….
"섹쓸…큼-!"
하-. 말 절대 그렇게 안 할 거다. 아니, 못해.
"쎅…?"
그렇다곤 해도 이미 내뱉어버린 단어의 일부분을 어떻게 변명할지가 또 골치였다. 나른한 나머지 실수를 저지른 덕분에 잠은 확 깼어도.
"크-흠! 어제, 희진이 너랑…너무 좋았는지 여태 자고 있었지 뭐야?"
참으로 가당찮은 변명이란 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머리가 아직 깨 있지 않아서 변명은커녕 정리조차 되지 않으니까. 농담 같지도 않은 말로 유야무야 넘기기엔 너무 뻔뻔했다.
"뭐야 오빠…내가 그렇게 맛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