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언짢은 시달림(3)
"자기, 안 힘들어?"
그러다 무거울까 싶어 예의상 하는 질문.
"…솔직하게 말해도 돼?"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응, 아니…하지마."
저도 모르게 긍정했다가 부정해서, 충분히 헷갈릴만한 응답이라 섣불리 입을 벌리기가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나도 내 본심을 몰라서 정말 솔직하게 해주길 바라는지, 아니면 듣기 좋은 말만 해주길 원하는지 갈피를 못 잡았으니까.
"하하…."
굳이 답하지 않아 기운 빠지는 웃음으로 무마하고는 엘리베이터로 어슬렁어슬렁. 주변에서 쳐다보는 눈길이 거슬렸지만, 그럴수록 더욱 파고들어 온몸으로 문지르자 더는 허리를 굽히지 않기 위해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후-훟."
최대한 자신에게 몰두하며 열심히 비비니까 거의 나은 듯한 종아리. 겨우 이런 거로 고통을 겪어 보니까, 앞으로는 녀석에게 무언가 육체적인 시도를 할 때는 준비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집은 지하철로 가?"
거리가 조금 되다 보니까 버스보단 지하철일 거 같았기에. 엘리베이터가 현재 층까지 오길 기다리며 물었다.
"뭐, 그렇지."
녀석을 밑도 끝도 없이 붙잡아 두는 것은 아무래도 욕심이라 판단하여 내 입으로 만들려는 작별 분위기.
"그럼 그리로 가자. 배웅해줄게."
비록 업힌 채였어도 따라가 준다면야 그게 배웅이라고 생각했다.
"하-, 너는…?"
말대꾸할 가치도 없는 건지, 태클을 걸지 않고 순응하길래 괜히 입술이 삐쭉 나와 이 기세를 몰아 어깨를 검지 끝으로 야릇하니 문지르며 장난칠 생각.
"혹시, 같이 가고 싶어 자기?"
"아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칼답에 나왔던 오리 주둥이가 더 뾰로통해졌다.
"너무행, 나는 자기랑 같이 가고 싶은데."
말은 애교를 부리면서 명랑했어도 내심 상처. 그렇게나 내가 싫은 걸까?
"………."
불리해질 것 같으니까 이젠 아예 침묵으로 대응한다.
인색하긴….
"너무 우려하지 마 자기. 난 그냥 택시 타고 갈 거니까."
내가 먼저 심한 장난으로 녀석이 정색하게 했지만, 반대로 그런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도 나. 하렘 만화의 주인공은 대화가 매끄럽게 잘만 이어지더니, 어째 나는 녀석과 순탄치 못해서 공연히 조급해지기만 한다.
"그럼 내가 택시 타는 곳까지 데려다줄게."
더군다나 내가 배웅하겠다고 하니까 본인이 그렇게 하겠다는 반항까지. 이래서야 약소하게 끝맺음을 하려던 계획이 무산된다.
"음-…그보단 지하상가에서 사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그렇다고 우회하여 유도하자니 말주변도 없어서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구상.
"…그래? 그럼 지하로 갈게."
이유를 묻지 않고서 그런다고 하니, 여전히 대척 없으니까 편해서 처음부터 이럴 걸 하는 생각 또한 기시감이란 것을 알았다.
"쿠-힣."
이럴 땐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웃는 편이 나나 녀석에게나 좋은 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와서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멈추게 한 뒤 내리니까 노골적으로 안심하길래, 이번엔 아무 말 않고 그저 쳐다보자 알아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부족해.
왠지 반사작용처럼 되어서 내게 한정하여 이런 방식으로 적응한 모양. 이러면 놀리는 것이 단순한 반복 작업이 될 수도 있어서, 신선한 반응을 보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귀찮긴."
고개를 돌리고선 무심코 들리지 않게끔 작게 녀석에 대한 불평을 살며시.
"응…?"
"아니야 자기. 일단 걷자."
실제로 가벼운 투정에 가까워서, 지하로 내려가기 위한 에스컬레이터를 거쳐 가려고 했다.
"손-."
이동하기 전에 다시 둘이 걷게 되니까 잡아달라고 내미는 손.
"큼…."
"헤헤."
희진이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지 종일 싫은 표정이었으나, 녀석이 내게 익숙해지듯 나도 이런 녀석에게 적응해서 웃어주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친히 좋아하는 감정을 내비치며 접근하는데도 철벽이라 좋지만은 않은 기분.
"헿-, …."
겉으론 네깟 녀석이 암만 밀어내도 웃으며 받아치는 여유를 보여주려 했으나, 실제로는 보이지 않게 마음이 다소 상했다. 거기다가 녀석은 진짜로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행동해 더욱 열 받을 수밖에 없는 실체. 상냥하게 대해주고 싶어도 이러니까 더욱 골탕을 먹여주고 싶어지는 악순환이 되었다.
"…있잖아 자기, 업었을 때 내 엉덩이 감촉은 어땠어?"
두고 보면 유치한 짓이지만, 솔직히 골려줄 때마다 재밌어서 그만두기도 아쉬웠고.
"엉, 머…?"
놀리는 패턴은 비슷하나, 당황하는 녀석은 아직 질리지 않아서 귀여웠다.
"가슴은 뭐…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해도. 엉덩이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거든."
어째 자폭이 되어버린 말투였지만, 다행인 건 녀석이 빈정대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 탄력…이라기보단 골반이 유독 넓어서, 위로는 빈약해도 아래론 부유했다. 가슴이 작은 대신 골반이 여성스럽다는 점이 참으로 웃펐어도, 내게는 장점이라고…어필할 땐 강조해야지.
"아까도 박을 때 실컷 문지르더니, 남들이 본다고 업을 땐 조신하게 잡더라 자기-."
뭐라 대답할지 고민하는 틈에 더욱 몰아붙이며 적나라한 섹드립을 쳤다.
"읗-…!"
만일 도망치더라도 손을 잡고 있어서, 벗어날 수도 없는 현재라 아마 울고 싶은 기분일 테지. 녀석이 내게 반응해주지 않을 때마다 보답으로 난처하게 해버리면 그제야 속이 풀렸다.
그러니까…이러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날 기쁘게 하면 될 텐데, 어리석긴.
"그건 네가…넣으라고 시켜서 그런 거잖아…!"
제 딴에는 반박하려고 언성을 높이려다 주위를 의식하고는 소리를 낮춘다. 그래 봤자 아까처럼 업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서 우릴 신경 쓸 사람도 없는데 말이지.
"쿠후훟-! 그럼 섹스는 내가 원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그런 거야 자기?"
누가 들으면 충분히 오해 살만한 단어를 구태여 골라 떠들었다. 이럴 때만 머리가 잘 회전하는 걸 보면, 나는 천생 남 괴롭히는 체질이란 사실을 새삼.
"그보다 여긴 바깥이니까…그런 건 둘만 있을 때 해줘 제발."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다가 나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애원한다.
"쿠-훟!"
장난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니까 무심결에 폭소. 정말이지, 녀석을 놀리면 심심하진 않았다.
"그거 알아 자기?"
남들이 들을까 유난을 떨길래 어쩔 수 없이 귓가로 속삭여주려고 어쩔 수 없이 드는 까치발.
"자기 자지 내 보지에 넣을 때 무척 기분 좋아따?"
거짓 없는 사실에 희진이랑 공포영화 보다 놀란 것처럼 화들짝 옆으로 몸을 피한다.
"……뭣!?"
뒤늦은 말에 행동과 발음이 반 박자 따로 노는 양상. 눈꼬리와 눈썹이 씰룩이는 걸 보니까 많이 놀랐나 보다.
"쿠후후훟…! 알았어, 자기. 이제 그만 놀릴 테니까. 이리 와."
너무 놀란 나머지 팔을 들어 자기방어 자세를 취하느라 놓치고 만 손.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대로 도망칠 수 있어서 계속 놀릴 의지 가득한 주제에 그러지 않겠다고 거짓말로 회유했다.
"으으, 하-…."
마지못해 다가와 손을 잡으나, 치를 떠는 모습이 보여서 문득 내가 심했나 싶은 생각. 장난치는 것도 좋지만, 과유불급이라고 이만 마쳐야 했다.
"자기, 아까 내가 사줬으면 하는 거 있다고 했잖아."
녀석과 함께 있는 건 적잖이 즐거웠지만, 헤어질 때를 알아야 다음도 오늘과 비슷할 수 있겠지.
"어, 응…그랬지."
시원찮은 대답에서 살짝 경계심이 묻어나길래 나만 좋았나 싶은가 싶어도…그게 맞았다.
"저거, 사조."
아까 지하철에서 내려 올라오기 전에 보였던 머리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냥 구매해도 됐지만, 눈독을 들인 건 남자에게 작게나마 선물 받아보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 어차피 말해봤자 입만 아플 텐데, 그러느니 녀석을 구슬리는 쪽이 재밌고…기쁘겠지.
"…어떤 거?"
손으로 가리키지 않고서 고개만 돌려 봤으니 엔간해선 알기 어려울 거다.
"헤헿, 맞춰 봐-."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로 다가가 무방비하게 진열된 상품 앞에 가니까 일어서는 주인아주머니.
"음…알려주면 안 될까?"
대충 이것저것 보는 시늉을 하다 금방 포기한다.
"시-렁. 자기가 봤을 때 난 뭐가 어울리는 거 같아?"
그러고는 묻는 녀석한테 짐짓. 홧김에 나긋하니 돌려 말했지만, 물어봐 놓고서 사뭇 남이 봤을 때 나는 어떤 것이 어울릴지 궁금해졌다.
"음-…잠시만."
얼렁뚱땅 넘기기엔 집요하게 구니까 어쩔 수 없이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녀석. 귀찮아도 계속 쪼니까 제대로 움직인다.
진작 이럴 것이지….
평소 성실한 인상을 주는 녀석이지만, 때론 요령도 부릴 줄 알아 방심할 수 없는 녀석. 그렇게 녀석의 눈길 따라 무엇을 쳐다보나 보는데, 쉽사리 고르지 못하여 간혹 내 표정을 확인한다.
"…끙-."
그렇다고 정답을 알려 줄 생각은 없었기에 모르겠다며 안쓰러운 표정 지어도 오히려 활짝 웃으니까 다시 살피는 액세서리. 그러다 머리핀, 귀걸이 등 사람에게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라 스마트폰 전용 액세서리 쪽으로 눈동자를 옮긴다.
"후-웅…."
아무리 힌트를 주지 않았다고는 해도 일부로 머리핀 앞까지 끌고 왔는데, 옆으로 가버리니까 묘한 기분.
설마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마음에 드는 캐릭터라도 있다면 혹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에 부착하는 거야 번잡스러우니까 해봤자 키홀더나 스트랩이 다일 거다.
"큼…."
한층 진지해진 눈빛에 옷깃을 잡아서 아니라고 하기 곤란할 만큼 집중하는 녀석. 이젠 나를 신경 쓰는 모습이 아까와는 달라서, 감각이 조금 내 예상과는 엇나간 고민에 빠진 거 같았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살 거면 사."
확실하진 않아도 못 먹는 감 한 번 찔러나 보기로.
"…어?"
사달라고 한 주제에, 마치 내가 아니라 딴 사람을 의식한 듯한 발언을 내뱉었다.
"딴청 피워도 들켰어 자기. 저거, 희진이가 좋아할 거 같아서 본 거지?"
팔만 안 뻗었을 뿐이지, 이미 마음은 저 키홀더에 갔다는 것을 내색.
"…응."
다행스러운 점은 가능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사실이었다.
묘한 데서 성실하긴.
"좋겠네, 희진이는. 이렇게 남친이 다른 여자와 데이트 하고 있는데도 자기 여친 선물 챙겨 주고."
그야 뭐, 억지로 끌려 나온 처지니까 그렇겠지.
"아…."
그런 생각 자체가 실례라는 걸 아는지 멈칫하고 깨달은 듯한 소리를 낸다. 하지만 내가 불만을 드러내봤자 그뿐이고, 아니면 다른 걸 조심하는 걸까?
"걱정하지 마 자기. 안 뺏을 테니까…."
혹여 내 짐작이 틀렸을까 봐 덧붙여서 말했다.
"대신, 나도 사줘. 똑같은 거로."
"뭐…?"
의아한 대답에 이유를 추리하니까 설마하니 거기까지 신경 썼을 줄이야.
"염려하지 마 자기. 어차피 기념이기도 하고, 차고 다니지 않을 거니까."
어디까지나 사진처럼 간직해 볼 심산이었다.
"들킬 일은 없을 거야. 그냥 서랍 속에 넣어 둘게."
녀석이 조심하는 건 분명 그거라, 희진이에게 선물했는데 나도 똑같은 걸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의심하겠지.
"그렇다면…알았어."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대놓고 착용할 거란 생각을 한 걸까…이것에 관해서 뭐라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는데, 애써 알았다고 말한다.
순진한 건지…이쯤 가면 미련한 거다.
희진이를 자주 인질 삼아 협박하긴 하는데, 나도 들키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인 처지. 단지 빌미로 잡아 허세를 부렸을 뿐이었다.
"…훙-."
이런 어수룩한 함정에 걸렸다 해도 조금만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이상하리란 걸 깨달았을 테지만, 그러기 전에 나와 섹파인 상황이 익숙해져서 이젠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되길 유도하는 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
그래도, 희진이하고 떨어져 있을 땐 껴야지….
"쿻-…고마워 자기."
그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 학생."
결국 녀석이 고른 건 같은 눈여겨보던 키홀더 두 개랑 머리핀 두 개. 기어코 내가 원하는 것을 지목해야 알아차려서 아쉬웠지만, 이걸로 만족했으니까 괜히 사족을 붙이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키홀더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갖고 싶다던 머리핀을 두 개 사서 하나만 준 것이 의아했지만.
"데려다준다고 했지?"
받은 물건을 파우치에 넣고는 아까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구실 삼아 말했다.
"어…? 응, 그랬지."
'히-죽'
성실하긴, 그래서 좋아…!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