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끌려 나온 데이트(5)
저 정도의 거리감이면 벌써 키스도 해봤겠지?
결코 부러워서 이런 생각한 것은 아니다.
저런 애들 소꿉놀이를 내가 부러워할 리가 없잖아.
"…맘대로 해."
여자친구로 보이는 여자애가 남자애를 아주 좋아하고, 그에 반해서 남자애는 귀여운 인상과 달리 무덤덤한 표정.
약간 체념에 가깝게 느껴져서, 저런 일방적 애정 과시를 보면 여자애가 먼저 고백한 거려나?
아무튼, 눈꼴사나워져서 저절로 시선을 피했어도 청춘은 청춘이었다.
"쿠-힣, 자기가 말 안 해도 구럴 거다-!"
이쪽을 무시하며 염장질을 하는 걸 보면, 안내 필요 없이 둘이서만 속옷을 고를 계획이겠지. 괜히 둘 사이에 끼어서 추천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혹여나 도난당하지 않게 눈여겨봐야겠다.
"와…자기-이, 이거 어때?"
생각하기가 무섭게 바로 주시해야 하는 위치로 가는 둘. 애들이 사입기엔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액수에 놀라 되돌아가기만을 바랐다. 여자애들끼리 오면 호기심에 입어본다고도 하지만, 본 제품은 구매해야 입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살 거 아니라면 건드리지도 않겠지.
"…읏!"
여자애가 내미는 팬티의 값을 확인한 모양인지, 대뜸 싫은 목소리부터 들렸다. 보통 남자는 여자에게 지기 마련인데, 이 커플은 상황이 반대라는 기대감에 싸구려도 좋으니 부디 다른 곳으로 가줬으면.
아니면 그냥 나가주던가.
"헤헿, 여기 아래도 막 벌어져-. 이거면 아무 데서나 박힐 수 있겠따-."
뭣-…!?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요즘 애들이 성에 대해 아무리 무분별하다지만, 이건 좀 심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자격 운운하며 훈계할 처지는 아니어도.
"큼…됐으니까, 사고 싶은 거 사."
여자애를 다급히 말리면서도, 혹시 들었나 싶어 남자애가 내 눈치를 보니까 내가 다 무안해진다.
"-."
미안하지만, 다 들렸어…그래도 어색하지 않게 잠깐 딴청 해줘야지.
"키-힣!"
…무슨 여자애가 수치심이 없는지 수위 높은 말을 쉽게도 떠들었다. 그래서 남자애가 저런 달관한 표정이었을까? 귀엽게 생겼는데, 각오한듯한 얼굴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이거!"
더 둘러보지도 않고 결정했다는 듯이 밑트임 부분을 검지와 중지로 펼치면서 남자애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대니까 몹시 꺼리는 기색의 남자애.
"하…알았어."
상대하기 귀찮은 투로 대답하고는, 보는 내가 다 가슴 아프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여자애가 너무 쉬워 보이도록 행동하는 것도 있겠지만, 남자애가 너무 무신경한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니겠지. 자칫 상처받을 수 있는 손놀림에 지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서는 여자애에게 괜스레 응원하고 싶어졌다.
"이거 입어 봐도 되나요?"
그래도 곧장 탈의실로 가지 않고 물어는 보네.
구매 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못 봤는지, 대답해주기가 귀찮았어도.
"죄송합니다만, 손님께서 들고 계신 제품은 구매 후에 착용할 수 있으십니다."
이 나이에 갈라 팬티라…상체는 빈약해도 얼굴도 반반하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괜히 성숙한 척 무리하게 어른스러운 속옷을 구매하는 애들도 있긴 하니, 저 여자애도 그런 부류일까?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알았어도, 이래서야 본전도 못 찾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물론 남자친구가 속옷구매에 같이 어울려준다는 건 서로 내가 모르는 유대가 깊어서 무척이나 굉장한 일이다만…정작 그것을 여자애 본인이 스스로 망치는 거 같았다. 저게 만약 두 사람만의 애정이라고 하면 내가 관여할 껀덕지도 없지마는.
"…그거면 돼?"
언제 다가왔는지 지갑에서 꺼내는 카드.
"웅! 난 자기가 사주는 거면 바보에게 보이지 않는 옷이라도 입을 수 있어!"
니-미 씨팔, 우라질…!
"호호호호…여자친구분께서 남자친구분을 몹시 사랑하시나 봐요."
영업하면서 이런저런 닭살 행위는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꼬맹이들한테서 귀에 피가 날 만한 타격을 입을 줄이야….
"…그런가요?"
그런가요-오!? 그런가요오오!!?
여자애가 볼썽사납게 구는 것도 그렇지만, 남자애는 관심 없다는 듯이 구는 것도 아니다.
아아, 짜증!
별거 아닌 일에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지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내가 서비스 직종이란 사실이 참으로 한탄스러웠다.
어디 그 객기가 어디까지 갈는지 모르겠다만, 조만간 파멸을 부를지도 모르니 조심하거라 꼬맹아.
어른이면서 애에게 꼴사나운 저주나 속으로 생각하곤 주는 카드를 받아 긁으면서 함께 건네는 영수증.
"그럼 난 입고 올 게 자기-."
계산이 끝나자 여자애가 속옷을 들고서 탈의실로 이동했다.
"자기도 같이 들어 올래?"
그러면서 뒤를 돌아 남자애를 보더니 하는 말에 같이 들어 오란 소리가 여기선 그리 특별한 건 아니었어도, 저 나이대의 커플이 해대니까 어수선한 기분. 사랑에 나이 차가 무슨 상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말 그대로 나이였다.
"벼, 됐어…!"
여자애가 너무 저돌적인 나머지 남자애의 무감각한 거부가 오히려 정상적으로 보이는 신기함. 저러니까 남자애가 이러는 거구나 살짝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 속으로 욕한 주제에 말이지…. 갈대처럼 쉽사리 변하는 이 성격도 고쳐야 얼른 나도 결혼할 텐데, 혼기를 놓친 노쳐녀가 되니까 나도 모르게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태 드러내지는 않았다는 거. 오늘 이러는 거야 진상도 아니고 그저 당황스러움에 그런 거라고 판단했다.
중학생이, 그것도 커플이 이런 곳에 오는 게 흔한 건 아니니까.
"헿…훔쳐봐도 돼 자기."
그 말을 끝으로 닫히는 탈의실 문. 당황스러움이 역력하던 남자애의 얼굴이 풀어지고는 팔짱을 끼고서 둘러본다. 겉으로 관심 없는 척해도 역시 사귀는 사이니까 몰래 자기가 골라 주고 싶었던 걸까? 비록 탈의실 근처로는 가지 않고 일부로 빙 돌아서 아까 그 자리로 가더니 손으로 만지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눈으로 탐색. 브래지어는 답이 없을 사이즈 탓에 고를 필요가 없을 텐데, 어째 여자애와 전혀 맞지도 않은 큰 브래지어 사이즈를 본다.
역시 쟤도 남자구나.
슬렌더의 여친을 사귀고 있어도 가슴에 대한 욕구는 차마 못 버리는 거겠지.
그야 원초적인 거니까…쳇!
어찌 됐든, 구매했으니까 담아 갈 쇼핑백을 준비했다. 갈아입더라도 입고 있던 팬티를 담을 곳은 없어 보였으니까.
"자기야…! 안 봐?"
여자애가 속옷을 갈아입느라 생긴 평화로움이 탈의실 여는 소리와 함께 깨져서, 그새를 참지 못하고 남자애를 부른다.
"하-아…."
그에 익숙한지 절레절레 젓는 고개.
"히히…그럼 나중에 봐-."
알 거 다 아는 나이니까 너무 난잡스럽게만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간섭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여자애의 문란함에 야단이 치고 싶어졌다.
"…."
남자애도 무안한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연신 흔들리는 동공이라서 그렇게 안 보여도 잡혀 사는 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남자애만 가엾게 느껴졌다.
"하하하…."
"호호호…."
여자애가 문을 닫고서 들어가자 시선을 의식했는지 눈이 마주쳤을 땐 괜히 멋쩍은 웃음만이. 억지로 말을 걸어 기분을 환기하기엔 그런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 거 같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부스럭부스럭'
그러길 잠시,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남자애에게 자신이 어떻냐고 물어도 겉으로는 바뀐 점이 없어서 곤혹스러운 표정. 골드미스인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여자애가 참 남자 잘 만난 거 같았다.
나도 저런 생떼를 부려도 받아 줄 남자 어디 없으려나….
"이거 챙겨 가시겠어요?"
머리로만 남기는 하소연은 둘째 치고, 귀찮게 굴지 않은 채 얼른 골라서 바로 가주는데 쇼핑백 하나 쥐여주지 못하면 영업사원으로서 자존심이 안 선다.
"아, 감사합니다."
여자애가 남자애에게 뭔갈 하려던 참에 부르자 환한 표정으로 내게 와서 약간 당혹. 그래 봤자 또 분수에 맞지 않은 이상야릇한 짓일 거다. 초면에 장담할 수 있는 까닭은 막 치맛자락을 잡으려는 거동에서 설명 끝.
"쿠-힣! 고마워 자기!"
나갈 때까지 남자애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며 놀리려는 까닭에 제삼자의 시선으론 너무 막무가내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무리해도 남자애가 아닌 척 다 받아주니까 자유분방한 태도의 여자애가 부럽다 싶었다.
인내심을 시험하는 태도에 어디까지 받아줘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으니까 샌드백이 된 기분.
"자-, 이거 가져 자기야."
더군다나 자기가 입던 팬티를 건네는데, 담아 달라는 건 줄 알았다가 이어진 말에 경악스러울 지경이다.
"…됐어."
그나마 적응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손으로 받지 않고 쇼핑백을 벌려 주니까 시큰둥하게 골인.
"이걸로 딸 쳐도 돼. 아니면 얼굴에 뒤집어쓰던가."
"안 써…!"
저번에 입어줬다고 설핏 그런 농담을 할 줄 알았으나, 과해도 너무 과한 장난에 더는 어울려주기가 어려워졌다.
"이제 됐지? 그만 집에 가자."
원래 목적인 속옷은 구매했으니까 용건은 끝. 뭐가 그리 비싼지 천 쪼가리 하나가 칠만 원이나 해서 속이 쓰라렸지만, 이 정도까지 해줬으면 이만 보내주겠지.
"어-머. 자기. 집에서 하고 싶은 거야?"
"아니야…!"
녀석과 대화할수록 조용하게 큰소리친다는 이상한 능력만 생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희진이가 오늘은 집에만 틀어박힌다고 했으니까. 집에서는 다음에 하자. 웅?"
"아니라니까…."
하-아…반박조차 싫증이 날 줄이야….
장난도 어지간해야지, 진짜 지쳤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 피곤할까…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변화에 적응하기도 벅찰 지경.
"집은 나중에 가기로 하고, 우리 영화 보자."
실컷 부려진 탓에 더뎌진 머리로 녀석이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영화?"
쉽게 보내주리란 기대까진 하지 않았는데, 영화라면 무난한 편이니까 괜찮으려나?
"웅-! 내가 다 예매해놨어."
괜찮다는 말은 취소. 녀석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니까 몹시 불안해졌다.
"…그래?"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수긍해도 별안간 갈 수밖에 없는 현실.
어쩐지….
지도로 보면 가까운 곳도 있던데, 굳이 여길 고른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헤헿."
안 그래도 심란한데 웃고 지랄. 녀석이 수줍게 치맛자락을 내려 잡으면서 얼굴에 홍조를 띄워도 뭐라 반응하기가 껄끄럽기만 하다.
"올라갈까?"
고작 위로 가자는 말에 부끄러운 듯이 구는 이유가 뭘까? 여자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생물이었다. 아니, 선입견은 치우고서 녀석은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존재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면 힌트라도 알려주지 않을까? 별로 묻고 싶진 않았어도.
"자기야, 이리 와 봐."
손가락으로 꼼지락꼼지락 주저하다가 손목을 붙잡고 끌려간 곳은 구석진 화장실 앞이었다. 주변 눈치를 보길래 큰 거일까 싶어서 휴지 판매기라도 찾나 같이 봐주려다….
"힠!?"
녀석이 신경 쓴 건 실은 나여서 냉큼 치맛자락을 붙잡고는 하반신이 훤히 보이도록 들어 올렸다.
"그, 그만둬…!"
펄럭이는 치마 소리에 두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반 박자 늦은 탓에 눈에 아른거리는 팬티의 색감.
"잘 봐봐. 어울리는지."
두 손을 가슴까지 올린 상태로 내게 봐주기를 바란다. 아까 그렇게 보여주려고 하더니만, 기어코 이런 곳에서 노출해야 직성이 풀리는지…이래서야 노출증 환자나 마찬가지인 행동.
"망측스럽게 무슨 짓이야…!"
대담한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그저 사람 하나 놀리자고 이런 정성을 들이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가리지 말고 제대로 봐 자기-."
눈을 감지 않고 뒤에 사람이 오지 않나 망을 보느라 맨정신이 아닌 상태. 기다려도 가릴 생각을 하지 않아서, 내가 보지 않는 이상 내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알았으니까…지, 진정해."
인질을 잡고 위협하는 협박범에게 회유하듯 손바닥을 보이며 천천히 아래로 내리니까 보이는 녀석의 음란한 하반신.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아까 고른 야한 팬티라, 속옷 주제에 중요한 부위는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으."
상대하면 할수록 더욱더 기이한 짓을 벌이는 녀석.
"쿠-훟! 어때? 잘 봤어?"
피하지 않고 똑바로 봐주니까 그제야 치마를 내린다.
"별로 노출엔 흥미 없지만, 처형 될 사람이 바깥에서 보지 보이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싶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