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끌려 나온 데이트(4)
"휴-…, 끅-!?"
이크, 트림.
"풉! 자기, 배불렁?"
그걸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서 팔짱을 끼며 은근히 검지로 배를 문지르는데, 찌를 것처럼 굴다가도 스-윽 만지는 게 전부라는 점에서 다행이었다.
"…응."
햄버거 하나 더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괜찮았어도. 굳이 무리해가며 먹을 생각은 없었다. 혹여 새로 주문할까 봐 얼른 정리하고 서두르는 발걸음.
"후-…."
밥도 먹었겠다…곧장 속옷을 사주고 헤어졌으면 싶은 바람이 굴뚝같지만, 음흉한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터라 싫어도 나를 오랫동안 실컷 골려주고 나서야 보내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쩝."
어차피 오늘은 다른 약속도 없었고, 부모님도 오밤중에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 늦어도 이해해주셔서 상관없지만….
"…."
녀석과는 결단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쿠-훗! 자기란 말에 대답하는 거 봐."
다급히 나온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 얄밉게 키득거리는 녀석.
"자기란 그렇게 말이 좋았어?"
그러고선 이러나저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해석하여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이 다분해 보이는데, 이것마저 발끈하여 아니라고 정정해야 할지…대충 의도는 알았어도 정작 해법을 모르니까 심란했다.
"…그러게."
역공을 취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남발해볼까?
"귀여운 여자애랑 데이트도 하고 자기란 말도 듣고, 나쁘지 않네."
마냥 당하고만 있자니 성질을 살살 긁어서, 반대로 이쪽에서 수비가 아닌 공격을 하면 기세가 역전될지도 몰랐다.
"어-머-. 자기. 드디어 인정한 거야?"
그런 바람이 부질없었는지 내 딴엔 용기 내서 바꾼 태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모습.
"내가 그렇게 귀여워?"
이게 어딜 봐서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걸까?
"…."
남의 말을 귓등으로나 듣지도 않는 거지. 능청스러움은 이미 만땅이라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내숭을 떠는데 완전 고단수나 다름없었다.
"웅? 웅?"
동갑이니까, 내심 칭찬에 부끄러워한다거나 하등 그런 기색이라도 있었다면 나름의 방어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그런 낌새 하나 없어서 진짜 뭘 하든 소용없을 거 같은 절망감.
"…뻥이야."
설마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워 속히 거짓말이라고 변론했다.
"쿠-훟. 부끄러워하긴."
녀석과 다르게 스스로 아쉬운 점은 녀석처럼 익살스럽게 굴어 장난이란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게끔 연기에 능하지 못하다는 사실.
"자기, 귀여워-."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면서 끝에 귀엽다는 말을 들릴락 말락 속삭이듯이 들려준다.
"읏…."
침묵도, 공격도 통하지 않으니까 미치고 팔딱 뛸 노릇. 이러니까 죄책감이니 뭐니 고민한 내가 바보 같아졌다.
아니, 바보 맞다…제대로 대처를 못 했으니까 이딴 일이 발생한 거고.
"큼, …쩝."
이래서야 완벽하게 노예 신세. 녀석이 말했던 육노예가 필시 이런 걸까 싶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그대로 움직여주는 인간. 노예에겐 의사 따윈 무의미해서, 하라는 대로만 움직이고 그렇게 사용된다. 녀석에게서 느꼈던 꺼림칙한 기분이 아마 이런 점에서 일지도.
"왜? 자기-. 희진이는 이렇게 안 해줘?"
이어지는 질문에 희진이를 걸고넘어진다. 보통 데이트 중에 다른 이성의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예의건만, 구태여 꺼내는 건 무슨 심보일까?
"…적어도 날 곤혹스럽게 하진 않아."
이렇게라는 건 무슨 뜻인지 구체적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넓게 봤을 때 장난을 쳐도 희진이랑 있을 때는 즐거웠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었다.
"그 소린 항상 재미없었다는 뜻이겠네?"
어떻게 그딴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지…?
"하기야. 침대에서도 먼저 싸버리는데, 평소에 재미가 없으니 쌤쌤이겠다."
"…뭐?"
머리가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말을 듣자,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고선 변명이 될지도 모를 말을 기다리며, 내가 생각한 그게 아니기를.
"아! 내가 말을 잘못했다. 희진이랑은 소파에서 했을 테니까 침대에서 한다는 건 틀린 말이었네. 쿠-훗! 미안."
정색하는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과장 된 몸짓으로 살살 쪼개는데, 나도 참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저기, 우리 싸우려고 온 거 아니지…?"
여태껏 견뎌왔던 표정 관리가 힘들어져 내지 않으려던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왜? 기분 나빴어 자기?"
녀석의 눈에도 내가 분노를 겨우겨우 참는 것이 다 보일 텐데, 정말 우습게 보였나 보다.
"…스-읍! 하-아……."
그러나 칼자루를 쥔 건 내가 아니라 녀석이어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 지금으로선 최선.
"기분 나빠쪄?"
'탕-'
다만, 건방지게 입을 놀리고 주저 없이 비아냥대는 꼴을 그저 가만히 당하고만 있기 싫어서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
물론 큰 소리 나지 않을 정도로 약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죽일 듯이 째려보는 거. 그러다 속으로 녀석이 바라는 섹파로서 상황이 올 때, 후회할 만치 범해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머 자기, 진짜 화났나 보네?"
제 딴엔 크게 화났다 표현한 건데, 눈도 깜짝하지 않아서 되레 당황하려는 자신을 최대한 다스리고는.
'성큼성큼'
발끈한 기색 감추지 못한 채로, 녀석을 두고 나갔다.
"쿠-훗!"
그대로 집에 갈 것처럼 굴더니, 성실한 천성은 어쩔 수 없는지 바로 돌아와서 먹었던 잔여물을 분리수거대에 정리하곤 박차고 가버렸다.
"쿠후후후후-…!"
아마도 한계점이 임박한 화를 삭이려고 나를 피해서 매장 밖으로 나온 거까진 좋았으나, 결론적으로 행선지는 내가 앞장서야 갈 수 있기에 얼마 못 가 멈추고선 감내하기만.
…귀여워라.
내가 생각해도 절제 없이 너무했으나, 별로 사과하거나 그러고 싶진 않았다. 녀석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도 괜찮았고, 데이트는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놀라서 언성 높이는 건 봤어도 녀석이 진짜 화를 내는 건 처음 보는데, 이건 희진이도 못 본 모습이겠지?
"스-읍."
그래도 너무 자극한 걸까?
"후우-……."
대화도 거부하고 요란스럽게 한숨을 내뱉더니 진정하려는 듯 눈을 감은지 이제 오 초 정도 지났다. 이 상태에선 건드리지 말라는 기운도 풀풀 풍기길래 대신 의식하라고 뻔히 쳐다보지만, 무심결에 장난쳤다간 진짜 폭발할 거 같아 약간은 조심스러울 따름.
"하-!"
그러다 언제 또 들이마셨는지, 한숨을 내뱉으며 마침내 눈을 뜨자 격분이 많이 가라앉은 눈동자의 흔들림이 멈추었다.
"…헤-."
이런 고요가 사실 각성 상태일지도 몰랐기에 인내심에 내심 감탄. 기생오라비처럼 나약하게 생긴 주제에, 참을성 하나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했다.
"다음은 어디야?"
뒤에서 껴안아 볼까 싶다가도, 목적지를 물으니 어디로 움직여야 하나 싶도록 보채는 목소리. 딱히 생각해두진 않아서 오늘은 영화를 보고, 다음은 아쿠아리움이나 놀이동산까진 다음 날의 일이었다.
"음-…, 그럼 이제 자기가 그토록 원하는 내 속옷! 고르러 가자."
일정이라고 해도 큰 틀은 식사, 속옷 구매, 영화 감상 이게 전부라서 지금은 괜히 화를 돋우기보단 녀석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음, 좋아!"
떼쓰는 아이처럼 싫은 티를 팍팍 내던 녀석에게 기어이 긍정적으로 듣는 대답. 물론 내가 한 말을 이해하기까지 조금 더뎌서 팬티 사달라는 핑계로 같이 있으려고 자꾸 뒤로 미룰 줄 알았나 본데, 속옷은 어디까지나 녀석과 데이트를 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자기는 내 팬티 사주는 게 그렇게 기뻐?"
자꾸 자신이 표독스럽다며 화를 뿜어내는 모습이 귀여워서 기분 좀 풀어주려고 내뱉어버린 음흉한 농담.
"믛…! 난 그저 내가 네 팬티를 찢어서 어쩔 수 없이 사주려고 하는 거뿐이야."
아니나 다를까, 귀여운 반응을 하며 금방 화내는 표정을 무너뜨렸다.
"어머나. 역시 우리 자기. 멋지다니까-."
"앗-."
이어서 반박하려다 무언갈 깨달은 듯한 커져 버린 동공.
"읗…."
끝으로 당했다는 표정까지 보여주니까, 희진이가 어째서 녀석을 그토록 놀리는지 이해가 됐다.
"쿠후훟."
이래서 장난을 안 칠 수가 없다니까.
"끙…."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입을 꽉 다문 녀석은 아직도 내 손아귀 안이었다.
"귀여워라-."
또 엉덩이라도 토닥일까 하다가, 그래선 다시 도망치듯 멀어질까 봐 머리를 아이처럼 두드리는 거로 타협. 이도 저도 못 하는 녀석의 팔을 안으면서, 이제 녀석에게 할 짓을 망상했다.
"…."
처음부터 목적은 연인다운 기분을 내는 것과 이 상태로 과연 어디서 섹스가 가능할까 싶은 장소의 확인이었다. 망가에서처럼 골목길이나 그런 데서 하고 싶진 않았어도, 노래방이나 멀티방 등 커플끼리 할 수 있는 공간이야 찾아보면 제법 그럴듯하기에.
'히죽'
막상 가보면 되지 않는 곳이 태반이겠지만, 되는 곳도 시시티브이가 있는 탓에 함부로 노출하기 꺼려졌다. 주변이 막힌 곳은 우리가 미자다 보니 혼성 동반 출입에 허가를 주지 않을 테니까.
"히히힣-."
그러면 많이 원색적이긴 해도, 괜찮은 곳은 화장실이었다. 게다가 영화 상영 도중 녀석에게 많이 마시게 하여 화장실로 도망치게 한 다음, 따라가서 대뜸 따먹을 계획. 어제 보니까 칸막이도 두 칸에 주말임에도 사람들이 그다지 들락날락하지 않아서 괜찮다 싶었다.
"키-힣."
살짝 화색을 보이는 녀석의 얼굴이, 이따 화장실에서 조마조마하며 나를 박을 때 어떻게 변화할지 무척 궁금해져 히죽. 서서 한다는 것과 야외에서 해버린다는 점은 내게도 도전이었지만, 야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경험이 부족했던 내게 이런 체험이야말로 바라지 마지않던 상황이었다.
섹스 묘사는 제법 호평인데, 연인과의 데이트나 그런 심리 묘사는 상상력만으로 부족했으니.
개연성이 모자라서 디테일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녀석과의 데이트는 오로지 경험을 통한 실력 향상과 개인적인 욕심의 일환. 단지, 그거뿐이었다.
"휴-…."
한적하다고 말하자마자 세 팀이 우르르 들어오길래 혼자서 상대하느라 진땀 뺐다. 한가하다거나 오늘은 조용하네라는 단어에 무슨 마라도 끼었는지, 그런 기분이 들어 무심코 말을 꺼내게 되면 필시 정반대로 이루어지는 오묘함. 그게 혼잣말이라고 해도 말이다.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매니저니까 마냥 손님이 없는 것도 그렇지만, 반대로 월급루팡 하기에는 너무 조용한 것도 그래서 극단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살짝 두려울 지경. 아예 파리만 날리는 것보다야 나을지 몰라도 주책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 난 뒤의 가게는 바쁘기 전에 했던 말 그대로 이루어져서 한시름 놓은 상태. 겨우 세 팀이었지만, 넓은 가게에 비해 주말의 오전 타임은 혼자서 관리하는지라 긴장감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르긴 해도 미리 점심을 먹어 둘까?
알바생에게 일을 맡길 정도로 잘해준다면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런 인재가 이런 곳에 들어오기란 복불복. 어딜 가든 사정이야 비슷하겠지만, 돈을 주고서 사람을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
항상 그렇듯 신경이 곤두섰다가 가라앉으니까 습관처럼 내부를 두리번. 유독 내용물 전부를 바꾼 진열 자리에 눈이 갔다. 일본 상품 관련 불매운동이 시작한 이후 점장님께선 이미 이 사태를 예견이라도 하셨는지, 최근 한 달간 일제 거래를 미루시다 명확한 이유가 생기자 바로 끊어버리신 계약 연장. 덕분에 지금이라면 하나도 팔리지 않았을 일본 상품이 비어 그 자리를 고급화한다는 명분으로 비싼 제품들을 들이셨다.
"흐-음…."
나야 잘 팔리기만 하면 되니 상관없었으나, 아무래도 재질이 고급이다 보니 도둑질에 유의하지 않을 수가. 특히 재력 없는 청소년층의 절도 비율이 제법 있다 보니, 손님 수가 많아질 때는 자연스럽게 예민해졌다. 선입견이지만, 나이 어린 손님이 들어오면 속으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어서 오세요."
말하자마자 들어오는 중딩 커플 한 쌍. 이번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는데도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이 이루어지자, 눈은 웃고 있어도 짜증이 확 치솟았다.
"자-기. 나 비싼 거 사고 싶은데, 괜찮아?"
염병…, 해봤자 이제 중2나 중3 정도 돼 보이는 주제에 발랑 까져서 벌써 팔짱 끼고 호칭도 눈살찌푸려지게 부르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건 멀어서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