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끌려 나온 데이트(3)
애초에 스트레스의 근원이 녀석이었으니까.
"밥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으면 내가 알아서 들어갈게."
선택권을 주는 건지 마는 건지….
"희진이는 고르라고 하면 한참 고민하지? 그러느니 차라리 이렇게 골라주는 편이 낫지 않아?"
내용을 곱씹어 보면 주는 거 같아도 아닌 거 같아서 헷갈렸다.
하-참….
"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거 먹을게."
괜한 유도심문에 넘어가지 않고서 대화가 이어지게끔 할 말만 해준다. 이래야 후에 희진이한테 내 이야기를 할 때 탈이 없겠지. 녀석이 마음만 먹는다면 없을 리가 있겠느냐마는….
"내 질문은 그게 아닐 텐데…?"
확실히 대답해주기 전까지는 물고 늘어질 생각일까?
귀찮다.
"알았어 자-기이. 피곤한 거 같으니까 넘어갈게. 대신 밥 먹고 나면 기운 차려야 해…."
팔짱 낀 손에 하나가 풀려서 스르르 등짝을 문지르는 손뼉.
"잌!?"
미친!
여기저기 사람 다니는 한복판에서 대뜸 엉덩이를 쓰다듬길래 바짝 놀라서 빨라지는 발걸음.
어딜 만지는 거야…!?
"훟, 말랑하네."
손길이 향하던 곳을 볼 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분명 앞부분을 쓰다듬었을 거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녀석의 행태. 경계하려고 해도 꼼짝할 수 없이 묶여서 발버둥 치기조차 벅찼었다.
여자가 성희롱도 마다치 않더니, 하다 하다 이젠 바깥에서 성추행까지….
당장에 신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음에도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울고 싶어졌다.
"쿠-힣!"
이럴 때도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 자신은 즐기고 있다는 걸 보여줘서 속으로 참을 인을 한 자 쓰고.
"후-…."
숨을 내쉬었다.
"그냥 간단하게 햄버거 먹을래."
계속 걷고 있다간 다른 봉변을 당할 거 같아 서둘러서 앞에 보이는 곳을 지목. 마침 패스트푸드 가게가 보였다.
"우-흠…자기가 먹고 싶다면 좋아. 먹여줄게."
앞의 말도 만만치 않았지만, 뒷말처럼 오싹할까?
무슨 햄버거를 먹여준단 말을 하는지 어이가 없었어도, 녀석이라면 할 거 같아서 다른 메뉴로 변경할까 싶었으나.
"쿠-훟."
하등 소용없을 거 같아서 포기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목줄만 안 채워졌지, 그런 셈이나 마찬가지니까.
"맘대로 해…."
부디 바깥에서조차 황당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했다. 부질없는 희망 사항일 테지만.
"움-, 이걸로 하는 건가?"
녀석이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무인판매기에 관심을 보였다.
"…처음 봐?"
대략 중학생 때부터 생겼으니까 약 사 년 이상은 실용화돼 있을 텐데, 초면인 양 유난히
드러내는 호기심.
"아니, 사용은 처음이지."
어쩐지….
간혹 녀석이 지금 시대보단 사오 년 전 정도 흐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얼핏 느꼈다. 나도 비슷한 성질이다 보니까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이런 성격만 아니었으면 아마 잘 맞는 친구가 아니었을까.
…괜한 상상에 기분만 팍 나빠졌다.
"기다려 봐. 내가 해볼 테니까."
해주려고 자연스럽게 앞장서려니까 가로막고선 본인이 조작하려는 움직임.
"흥-…."
첫 사용이라고 해도 기계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건 아니어서 흔히 만지면 고장 낸다는 기계치의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만지자마자 망가뜨리는 것이 신기하리만큼 대단한 거겠지만, 집에만 틀어박힌 탓에 쓴 적이 없다고 해도 어플로 주문 정도는 해봤을 테니까. 너무 문외한 취급하면 기분 나쁠 거 같아서 느려도 혼자 해나가는 것을 기다려줬다.
"쿻-."
느렸어도, 음식 고르느라 그랬다 치면 적당한 시간. 유별난 점은 캐릭터 상품도 같이 골랐다는 거였다.
"…넌 뭐 먹을래?"
무난한 메뉴에 추가 상품 고른 거로 가격대가 한 자릿수 늘어나서 살짝 놀라다가도, 자기가 사고 싶다는데 그러려니 하면서 보는 화면.
"…이거."
이름 말해주기도 귀찮아서 그냥 추천 메뉴 세트 중 가장 싼 걸 지목했다. 그러면서 꺼내는 지갑.
"자, 받아."
잔돈이 남지 않게 알맞은 가격이라 천 원짜리 지폐 여섯 장을 건네니까 내 눈을 싹 보더니, 대꾸 없이 받는다.
"사주려고 했는데…돈도 못 벌면서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런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으면서.
내 돈 내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싶었다. 그러면 자신은 무슨 돈을 버나 따지고 싶게 하는 말투. 말을 해도 상대방이 기분 나쁠 만한 소리만 하니까, 처음 희진이가 경고했던 말은 한참을 순화해서 일러준 거였다고 느꼈다.
"…그래."
그렇다고 진짜 말싸움하기에는 괜한 체력 소모만 할 거 같아 손해라 피하는 편이 상책. 꼭 협박으로 인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친구 없다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 통감했다.
"…-."
반박할 가치가 없어 넘어가자, 딴 데로 이동하는 녀석의 시선. 영수증을 받고 번호가 나오는 전광판을 주시하는 걸 보니 순서가 어떻게 되나 확인하는 거였다.
…같이 기다릴까?
오래 걸리는 음식을 주문한 것도 아니라서, 조금 기다리다 받아도 괜찮겠지. 그리 북적이지도 않은 까닭에 자리도 여유로워서 미리 선점할 필요까진 없었다.
"…."
그렇게 기다리려는데, 막상 그 시간이 어색해서 무안해지는 기분. 근처에 앉는 것도 아니고, 금방 나온다 한들 분 단위로 있어야 하는데 마냥 서 있으려니까 무료해서 옆의 빈자리에 앉혀 놓아야 하나 간섭하고 싶어졌다.
"…."
근데 괜히 그랬다가 또 팔짱을 끼려고 달려들까 봐 쉽사리 그러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 그렇다고 혼자 앉아 있으려니 그건 또 영 아닌 거 같아서, 겉으로 보면 일행인 여자애가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남자인 나는 좌석에서 편하게 늘어진 모양새가 된다.
"…내가 가져올 테니까. 앉고 싶은 곳에 앉아 있어."
안 그래도 함께라는 사실이 스트레스인데, 그런 오해까지 받는 것은 죽어도 싫어서 녀석의 돌발행동을 주의한 채로 영수증을 받기 위해 펴는 손.
"…?"
차례가 되어 불리는 것을 노골적으로 집중하길래 오히려 이런 상황을 노렸나 싶었다. 이에 내가 물어보면 달려들까 봐, 뒤로 피하고자 뒷발의 발꿈치를 조금 들어 두는 몸의 중심.
"…."
그러나 되려 아무런 조짐 없이 무덤덤하여 내심 짜증이 울컥했다. 마치 일부로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의심도.
"쿠-훟, 괜찮아 자기. 내가 가져갈 테니 자긴 쪼-기서 앉아 있어-엉."
그런 마음가짐으로 경계를 품고 있었는데, 뜻밖에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었다. 정색하다 웃으니까 속으로 놀란 것도 모자라 애 취급하며 자리를 지정하니 떨떠름해도 되돌아갈 수밖에.
"…씁."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는, 여전히 서 있는 상태로 전광판을 주시해서 순순히 돌아가려는 찰나에 문득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뭔가 싸늘하면서도 답답했다.
"그럼 그냥 둘이 앉자. 여기 앉아서 기다리다가 나오면 이동하면 되지."
배려를 사양하고 스스로 하겠다는 건 좋은데, 굳이 계속 선 상태로 있을 모양이라 차선책으로 회유. 바쁜 시간대라 북적거리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비어 있는데 사오 분이지만 일어나 있으면 보고 있기가 또 좋지 않았다.
"…자기가 그러라면야 뭐, 내가 져줘야겠지?"
남은 기껏 배려해줬더니, 이래서야 챙겨주니만도 못한 결과. 이럴 거면 그냥 남의 시선이나 자신의 미약한 죄책감 따위 무시할 걸 그랬다.
"하…고마워."
혹겨 이게 녀석의 노림수라면 놀아나지 않으려 무시하면 됐겠지만….
"우리 사이에, 훟-."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런 거라면 얼마나 속이 좁은 건지 이런 거로 사람을 놀려 먹는 걸까 한심하다고 생각할 거다. 밴댕이 소갈딱지란 말이 여기에 어울리겠지. 악취미도 악취미 나름인데, 기분 나쁜 정도를 넘어 추잡하다고 느낀다면 녀석도 창피하지 않을까?
"…-."
그러기엔 얼굴은 썩 진지해서, 장난이라기보단 여태 녀석이 보여줬던 행실이 그런 편견을 만든 거 같았다. 아니면 긴장했다거나….
녀석이?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거의 녀석의 잘못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반성해야지.
의심이 나쁜 건 아니어도 실례인 건 맞으니까.
"41번 손님."
카운터에서 우리를 부르자 동시에 일어나 받으러 갔고, 맛있게 먹으라며 주문한 음식이 놓인 쟁반을 받았다.
"아-…."
내가 받으려니 녀석에게 떠맡겨진 파우치가 걸리기도 했고, 대뜸 녀석이 앞장서서 받으니까 빨대랑 물티슈를 따로 챙기는 손. 뒤따라가니 점점 구석진 곳으로 가길래 말리고 싶었어도 녀석은 이미 앉아버렸다.
"큼-."
어쩔 수 없이 합석하여, 식사하기 전에 여기선 손을 씻기 어려워서 가져온 물티슈를 주고 남은 한 장으로 구석구석 닦는 손바닥. 번잡스러운 파우치는 옆 테이블에 둬서 언제라도 녀석이 집어갈 수 있도록 했고, 그 옆에 폰을 올려놓았다.
"…."
각자 빨대를 음료에다 꽂고는 세트 메뉴다 보니 감자튀김을 쟁반 가운데에 뿌리니까 따라 하는 녀석. 그 사이 케첩을 원래 감자튀김을 담았던 종이갑을 뜯어 그 위로 뿌렸다.
"잘 먹겠습니다."
이후 자연스럽게 버거 포장을 열어서 드러난 버거를 크게 한 입. 먹는 방식이야 제각각일 테지만, 나는 버거부터 해치운 다음 천천히 감자튀김과 콜라를 처리했다.
'우물우물'
녀석이 어떤지야 별로 관심 없었어도, 나와 달리 버거를 한쪽에다 두고 감자튀김부터 집으니까 이런 점에선 또 식성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음-."
바깥에선 자기 자기 좋을 대로 떠들더니, 안에선 어째 얌전한 녀석. 이런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나, 이러다 태세 변환하여 어떤 식으로 장난을 칠지 알 수 없으니까 괜히 더 불안했다.
"자기, 아-…."
걱정 끝나기가 무섭게 뭔진 몰라도 이상한 수작. 케첩을 찍은 감자튀김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서, 버거를 씹고 있는 나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머?"
우물우물하며 반쯤 삼킨 상태로 의아한 대답.
"이거 몰라? 먹여주려는 거잖아."
모르진 않는다.
모르진 않지…근데 그걸 왜 네가 나한테 하느냐고.
"아-."
"냠."
항거하려고 해봤자 내 처지를 생각하니 순응하는 편이 뒤탈 없을 거 같아서 입안의 내용물을 빠르게 씹고 벌어지는 입술.
"쿻-."
이런 낯간지러운 행위에 뭐가 기쁜 건지…연인 사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녀석은 그저 나를 놀리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 골리고 싶은 거지.
그래서 이러는 것을 알기에 상대하기 싫었어도, 그러지 못하는 처지가 참으로 서글펐다.
"자기, 또 아-."
금세 재미라도 들었는지, 고작 두어 번 씹자마자 이어서 내미는 감튀. 베어 물었던 버거는 조금 줄었는데, 바삭바삭하는 도중에 계속 튀김의 의의를 느끼라고 해주는 배려심이 돋보여 입의 내용물을 흘리지 않게끔 턱을 조심히 열어 받아먹었다.
"쿠히힣-."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뭐…, 인정.
섹파라던가 협박범만 아니라면 좋은 이성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첫인상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이런 능청스러움 마저 괴리감으로 느껴져 착잡함만 늘어났다.
"아-앙."
"우물우물, 냠-."
본인은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 같지만.
"쩝…."
희진이랑은 못해도 최소 케이크를 서로 떠먹여 줬었다. 그런데 녀석은 모양 안 나오게 감자튀김이라도 상관없었던 걸까? 기분을 내고 싶은 거라면, 밥풀 쪼가리를 들이밀어도 서로 좋다면 그게 낭만이란 거겠지만….
"마시써 자기?"
"…응."
그러나 녀석이 캐비어 등 산해진미를 내 입으로 공손히 넣어 주더라도, 의도가 불순할 것이 뻔해서 편하게 씹지 못하고 경계하며 두려워하기만 할 거다.
"우후후후후훟, 더 먹어 자기."
인간불신인 양 녀석의 꿍꿍이를 여전히 잘 모르다 보니 신용을 못 하는 거지.
"…꿀, 꺽."
그래도 평범하게 친구 하자고 한다면 어느 정도 장단은 맞춰줄 용의는 있었다.
"천천히 좀 줄래…."
섹파라던지 허무맹랑한 짓거리만 빼줘서 제발 상식적으로 행동해준다면.
결국, 감자튀김의 식감이 바뀔 때까지 입으로 넣어주는 짓은 끝나지 않았다.
"우물우물."
맛있어도 끊임없이 먹으면 당연히 물리는데, 콜라 리필까지 할 정도로 처리하고 나서야 각자 버거에 입을 대기 시작.
"쪼오오-옥."
내가 먼저 먹었다지만, 녀석이 나보다 빨리 포장했던 용지를 구겨 치울 수 있었던 건 간교한 계략 탓에….
"냠냠."
나도 반격 삼아 녀석의 입에 감자튀김을 넣어 준다는 발상을 할 수 있었으나,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아서 묵묵히 다 받아먹기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