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연인과의 오붓할 시간(2)
아니면 점심 전에 주문해서 두 시간 전인 오후 즈음에 또 먹었다는 편이 딱 들어맞겠지….
"후-웅…."
겨우 이런 거 가지고 머리 써봤자 귀찮기만 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남은 조각도 랩을 벗겨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이미 준비된 피자를 한입.
아, 내일 오빠랑 집에서 데이트하니까 언니에게 몇 시에 나갈 거냐고 물어봐야지.
"우-으움, 쩝-."
맛있네….
미디움보단 두꺼워서 도우도 같이 두툼해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언니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급하지 않았기에 천천히 먹은 다음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바로 잠들진 않겠지.
"훟-…, 햐-."
고기를 먹자 육즙이 입 안 가득히 퍼진 것처럼, 치즈 또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혀를 자신의 맛으로만 찍어 눌렀다. 뒤이어서 토핑된 재료가 혓바닥을 두들기며 재촉하길래 괘씸해서 마시는 콜라. 세 입째에 다시 우물거리다가, 네 입째에 띵하고 울리는 소린 전자레인지의 알람이었다. 피자가 다 돌아갔다는 신호에 입안의 내용물을 삼키지 않은 채로 이동.
"앗뜨-!"
별생각 없이 가지고 오려다가 뜨거운 접시에 놀라 옆의 행주를 접시 밑에다 조심스럽게 받치고는 서둘러 탁자 위로 놓았다. 다행히 화상을 입지 않고 반사적으로 손을 뺐기에 멀쩡한 손.
"…힝-."
잠깐 칭얼거린 것은 사소한 불평이었다. 그 까닭은 바로, 이렇게나 맛있는 걸 혼자서 먹고 있다는 아쉬움에.
"힣-…."
약 이십 일 가까이 오빠와 놀지 못한 것 같은데, 내일이 기대돼서 무심코 입꼬리가 올라갔다.
공부하느라 고생한 우리 오빠랑 이제, 시험 진도 말고 연애 진도도 쭉 빼서 이번에야말로 꼭….
"히히-히…."
먹는 것도 잊고서 가능하면 오빠가 먼저 껴안아 주고, 키스도 오빠가 리드해줬으면 하는 망상에 푹 빠졌다.
정말 간만의 외출로, 볼만한 영화가 있을까 싶어 찾아보니 다행히 상영 중인 애니가 있어 그걸 보기로 했다. 보고 싶던 영화만 본다 한들, 얘네도 영화 보느라 바쁠 테니까 적당히 시간 때우려면 두세 편은 봐야 하겠지.
"…칫-."
희진이에게 물려 줬던 옷이 여전히 어울려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쓴웃음만 가득한 채로 거울 앞에서 혀를 찰 뿐.
언제부터 성장하지 않았던 걸까….
원인을 특징지어 본다면, 필시 밥이 아니라 과자만 먹는 생활패턴 때문일 거다.
"…."
자매면서도 가슴 크기가 확연히 차이 나서, 바깥에서 본다면 내가 동생이라고 보인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해도 도리가 없을 일.
"후…."
청소는 귀찮아도 꾸준히 했다지만, 내 몸을 내가 챙기지 않았으니 누구에게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다. 유전자를 탓하자니 이미 우월한 몸매의 소유자가 동생인지라, 소용없었고.
더우니까 대충 머리만 올려 묶자.
업 포니테일로 마무리하고 나갈 채비를 하니까 희진이랑 마주쳤다.
"어디 가?"
서코 간다고 말했는데 귀찮게 뭘 또 묻는 건지.
"영화 보러."
위치를 물은 거 같지만, 대답은 특정 장소였다.
아, 그러고 보니 줄 게 있었지.
"…자-, 맛있는 거 사 먹어."
지갑에서 오만 원 권을 한 장 꺼내 건넸다.
"왕-! 고마웡 온뉘-!"
돈 쓰러 가는 주제에 돈을 쥐여 주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이번 달 인세가 나쁘지 않았기도 하고. 특히 녀석을 촬영한 대가라고 치면, 같이 밥이나 먹으라고 주는 셈이니까 나쁘지 않았다.
"…재밌게 잘 놀아."
마침내 해방, 어찌나 징그럽게 녀석이랑 집에서 데이트한다고 쫑알대던지…. 알았으니까 입 좀 다물어줬으면 싶었는데, 어제는 기어이 몇 시에 나가고 몇 시에 들어올 건지 확답을 해주고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우라질년.
"언니 둥-."
돈 받을 때만 애교 부리긴….
"…쿡-."
녀석의 동정을 가져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녀석과 헤어지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내가 할 생각은 아닌데도 잘 되길 바라며 미소 지었지만, 솔직히 일을 저질러버린 탓에 눈치가 빨랐다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을 거다. 감추려 해도, 이러면 안 되는데 배덕감에 자꾸 입꼬리가 씰룩였으니…. 그리하여 오히려 내가 의도치 않은 눈초리로 경계하며 문을 닫는데, 희진이는 히죽이면서 배웅해주었다.
"…흥, 쩝-."
별 신경 안 쓰는 모습에 혼자만의 민망한 착각이라 생각하니까, 창피함을 머금고 제 딴엔 의연하게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불쾌감이 느껴진 이윤 참말로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더워서…. 삼십 도를 훌쩍 넘기는 날씨에다, 특히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하느라 짐이 생기는 바람에 힘들 이유가 늘어날 만했다.
"후-아."
그런 인내심도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서서히 나아져서, 역시 더위가 모든 짜증의 근원임을 새삼스럽게.
"…아!"
무심결에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손을 태연히 초인종으로 옮겨 눌렀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방문하는 희진이네. 그러나 오늘은 고대하던 희진이와의 데이트라서 어제의 두근거림과 다른 진짜 설렘이 있었다.
"어서 와- 오빠."
문 안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지다가 문이 열리자 반갑게 맞아주는 얼굴. 얼마만의 데이트인지 몰라 어제 일만 아니었다면 두근대느라 늦잠을 잤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녀석에게 고마움 따위 일절 없었지만, 내가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녀석이 아니라 희진이었기에 웃는 얼굴로 실례.
"헤헤…역시 잘 어울려 오빠."
갑작스러운 칭찬에 뭘까 싶어서 희진이를 보니까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희진이가 선물해준 커플티로 입을까 말까 고민하다 입은 거라 조금 쑥스럽지만, 그럴 만한 보람이 있어 좋아해 주니까 좋았다.
"그야…희진이가 골라 준 거잖아."
말하면서도 희진이의 차림을 보자 희진이도 나름 의식했었는지 똑같은 차림.
부끄럽다고 안 입고 왔었다면 위험했을지도….
"히히히…오빠. 우리 사진 찍을까?"
"어…? 으응, 좋아!"
예의상 주고받은 인사치레가 갑자기 사진으로 변해서 놀랐지만, 희진이가 신발 벗고 들어가려던 동작을 제지하며 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실행한다. 현관이란 점만 빼면 딱히 불만은 없어서, 꼼짝없이 잡히는 자세.
"하트, 오빠 하트!"
"어? 으응…!"
키 차이는 현관에서 복도로 가는 턱 하나에 그쳐 비슷해지자 희진이가 왼팔을 올렸고, 나는 오른팔을 올려서 각자 하트의 반을 표현해 하나의 모양을 만들어냈다.
"헤헤헤, 치-즈."
"-즈으…."
'찰-칵'
"잇-! 모야 오빠-. 좀 더 활짝 웃어 봐."
카메라의 소리가 어째 어제 그 일을 생각나게 해서, 찍힐 때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기에 재촬영. 나는 여태까지 희진이가 나랑 사진에 찍힌 것이 창피해서 안 찍어 주는 줄만 알았다. 근데 오늘 이렇게 갑자기 사진부터 찍으려고 하니까 아이러니한 기분.
"히히히- 조아."
고작 두 번째 셔터음에 벌써 만족했는지,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사진을 확인하면서 내가 들어갈 수 있게끔 뒷걸음질 친다.
"어서 들어와 오빠. 밖에 상당히 더웠지?"
그에 덩그러니 남은 나를 향해 손짓으로 환영해주면서 이야기해주니까 그제야 놓이는 마음.
"응, 화창한데 덥더라고."
옷이 젖지만 않았을 뿐, 땀이 언제라도 온몸을 적실 준비가 된 느낌이라 얼른 식히지 않으면 냄새를 풍길까 봐 조심스러웠다.
"히히, 집에 있길 잘했다. 그치?"
개인적인 욕심이자 좋아함의 표현으로써 돈을 과하게 소모해도 괜찮으니까 솔직히 다채롭게 놀고 싶었던 바람. 그러나 희진이는 그걸 헤아려줘서, 집안에서 하는 데이트라 장소의 걱정도 금전적인 부담도 적었다.
"응- 희진이 덕분에 무척 편해졌어."
인터넷에서 여자친구가 돈도 안 들이고 편하게 일을 진행됐을 때 칭찬하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닌 징조라 떠보는 것을 조심하라고 했던 조언이 생각났으나 이미 대답한 상태.
"정말 고마워서 말로 표현 못 할 정도야!"
무르기도 그러니까…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럴 거라 상정하고 대처한 방법은 칭찬이었다.
"정말이야 오빠? 히히, 오빠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분 좋은걸?"
복잡하게 꼬이고 꿍꿍이가 있던 인터넷의 연애 조언과 달리 너무나 쉽게 기뻐해서 안심하는 한편, 아직은 놓지 않는 긴장의 끈.
"응…! 그렇지만, 너무 집에만 있는 건 그러니까…다음엔 내가 좋은데 찾아보고, 괜찮다 싶으면 데려다줄게."
이어서 다음을 기약하는 말로 혹시나 언짢았을 마음 달래 줄 법한 답변은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대응이었다.
"힐…, 마음은 기쁜데 오빠…그건 더위가 좀 사그라지면 같이 가자."
현실적인 대답에 무난한 반응. 별로 요행을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티 없이 순수한 진심이었다.
"아무튼, 얼른 들어와 오빠. 거실에 에어컨 틀어서 시원하게 해놨으니까 시원할 거야."
"하하 그래-."
드디어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강렬히 느껴지는 향긋한 샴푸 냄새에 자세히 보니까 머릿결이 은근히 젖어서 야릇한 머리카락. 어제 두 번인가 녀석과 해버렸음에도 순식간에 벌떡이고 말았다.
"아, 오빠! 뭐 마실래?"
그래서인지 나를 보고 걷지 않고 있음에도 질문에 화들짝 놀라서, 발기한 거 들킬까 봐 제 혼자 조마조마.
"…뭐 머 있는데-?"
향기를 남기며 걷던 희진이의 질문에 대답하며 보는 거실은 변함이 없어서, 안내하던 희진이가 소파를 가리키니까 앉으며 물었다.
"음-…물이랑 우유. 주스하고 콜라…맞다, 오빠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어…응-. 먹고 올 걸 그랬나?"
점심은 여기서 시켜 먹을 생각으로 그냥 왔는데, 혹시 먼저 먹어서 곤란하다면 점심 정도야 거르는 것도 염두에 둔 상태.
"아니야 오빠. 나도 사실 오빠가 그럴까 봐, 안 먹고 기다리고 이써따-아."
"하하하…그, 래?"
아, 확실히 이 시간대면 먼저 먹기도 그렇지만…너무 노골적이었을까?
"그야 오늘은,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있어야잖아…."
걱정스러운 설레발이 우습게, 말도 참 예쁘게 해서 기분이 행복하게끔 입꼬리를 올렸다.
"게다가 이찌, 언니가 우리 맛있는 거 먹으라고 용돈도 줬다 오빠?"
그런 와중에 주머니에서 보여주는 오만 원 권의 출처가 어디인지 짐작되니까 사뭇 웃기 어려워 어색해진 미소.
"어, 조좋네…. 그래서, 희진이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녀석이 줬다길래 석연찮아서 반사적으로 미간 찡그리려다 힘껏 씽긋거리며 메뉴 선택권을 넘겼다.
"음-…잠깐만 오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부엌으로 가서 들고 오는 책자. 배달 앱도 아니고, 각종 음식점 전화번호와 메뉴가 담긴 잡지를 가지고 오늘 걸 보면 아마 자주 시켜 먹어서 그런 거 같았다. 아니면 이게 더 편했을 수도 있고.
"고르고 있어 봐. 음료수 가져올게."
뭐 마실지 아직 고르지 않았는데, 냉큼 가버렸다. 아마 주스를 가져오겠지만, 사실 뭐를 가져와도 괜찮기에 괘념치 않고서 일단 고르는 메뉴. 생일의 주인공이랍시고 희진이에게 양보하려 했다가 번거롭긴 싫어하는 거 같아 떠넘긴 듯하니 그러질 않길 잘한 듯 했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 맛있어 보이네.
책장을 넘기면서 이 시간에 가능한 것을 고려하니, 튀김보다 밥에 곁들여진 것이 많아서 유독 훈제구이가 눈에 들어왔다.
"…오리가 괜찮으려나?"
혼잣말로 입맛을 다시면서 가격을 보니까 기본이 삼만 원가량.
비싸…근데 오만 원이면 이 정도 사치를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녀석에게 직접 받으면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까 봐 거절했는데, 막상 비싼 음식을 보니까 높은 가격에도 금액이 허용 범위라 주문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뭐 골랐어 오빠?"
왼손에 컵 두 개와 오른손엔 주스가 든 병. 저 컵을 보니까 저번에 기절했던 것이 떠올라 떨떠름하지만, 설마 희진이가 그렇겠느냔 생각에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속에선 이미 오리고기에 꽂혔지만, 금액이 가볍지 않다 보니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
"이거…어때?"
하며 속으로 삭이고서 고르지 못했다고 하려다 이미 말해버렸다.
"오리고기?"
책자를 펼쳐 보여주자마자 가져가서, 직접 확인하는 눈동자.
"음- 괜찮다아. 센스 좋은데 오빠?"
비싸다고 아쉬운 소리 들을 각오했는데, 반대로 긍정적인 대답에 안심했다.
"근데 사실 값이 만만치 않아서…."
그러나 싫은 소리 하고 싶지 않았어도, 삼만 원이란 돈은 작은 것이 아니라 덧붙이는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