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연인과의 오붓할 시간(1)
남자가 여자 속옷을 사주는 행위가 각별한 애인 사이에나 있을법한 일. 그걸 자기 입으로 꺼냈으니, 쉽게는 무르지 못할 거다.
"아니, 그게 아니라 돈으로…."
당황하면서 은근슬쩍 금전으로 해결하려는 말투.
"아아…! 그거 내가 제일 아끼던 속옷인데…."
거짓말이다.
"백화점에서 겨우 찾은 건데."
시장에서 대충 산 싸구려다.
"용돈을 한 푼 두 푼 모아서 겨우겨우 구입한 건데…."
그런 거 안 받은 지 몇 년 됐다.
"디자인이 심플해서 언제나 입고 다녔는데…!"
겉으로만 봐도 중앙에 작은 리본이 달렸을 뿐인 순백의 단조로운 팬티다.
"지금은 단종 돼서 비슷한 모델 찾아도 느낌은 다르겠지…."
그게 그거다.
"아, 끟…!"
누가 봐도 연기란 걸 알 수 있게 과장 되게끔 말하면서 투정하니까 쩔쩔매는 녀석.
같이 가서 고르는 게 아니라 겨우 돈으로 때우려고? 어림도 없지.
"그랬는데, 다시 한번 말해줄래? 어-떻-게-…해줄 거야?"
멀리서 보면 벌거숭이끼리 노려보고 당황하는 우스운 모습이라 희극이겠지만, 그건 나도 똑같이 재미 보고 있었다. 비극인 건 눈앞의 불행한 녀석 혼자겠지.
"끄-응…그래. 골라, 줄게."
진심으로 곤란해하는 녀석이라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누르고 단단히 화가 난 연기를 하자 빠르게 승복했다.
"후후훟. 그래, 그래야지."
녀석에겐 거짓말처럼 표정을 싹 바꿔서 이겼다는 기분을 만끽. 찢긴 팬티가 조금 안쓰러웠지만, 딱히 특별한 추억이 깃든 물건도 아니어서 바꿀 시기가 된 것뿐이었다.
"자-가서 씻고 와.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녀석이 생각을 바꾸기 전에 일을 처리하며 하려는 방 정리. 녀석은 너무 성실한 나머지 억지스러움에도 수긍해버리면 어울려주느라 피곤함을 자처해서 끌어당기는 성격이었다. 덕분에 나의 억지가 통한 거겠지만.
"…음-."
알몸이라 그대로 들어가면 될 텐데 고민하는 녀석.
"왜? 화장실 안에 욕실 있는 거 보지 않았어?"
지난번 그냥 간 줄 알았다가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에 헛웃음을 흘렸었는데, 모른다고 위치를 묻는다면 이거 또한 의아할 거다.
"아니, 그게…큼-."
뭐가 문제였는지 망설이니까 호기심이 문득.
"왜?"
"…아니야, 잘 쓸게."
설마하니 낮의 집에서 몸을 씻는 것이 불편했던 걸까?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니까 확신할 수 없었으나, 구태여 추궁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불금을 친구들과 보낸 뒤에야 맞이하는 낭만적인 토요일이란…내게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할 수 있다면 당장 오빠랑 만나고 싶었지만, 끄적끄적 공부하는 우리와 달리 진지하게 공부하는 수험생이니까…오늘만 견디면 만날 수 있었기에 조급해하지 말고 다 끝났을 시간인 오후가 돼서야 고생했다는 격려의 토-크를 남기는 거로 참았다. 사실 칼답까진 바라지 않았어도 응원하는 자신을 알아줬음 싶은 대답 한마디 정도면 족했는데, 하교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무소식인 걸 보면 피곤해서 집에서 바로 잠든 걸까? 아무래도 수험생이니까, 무척 고생이 많았을 거다. 내년이면 나도 비슷한 처지가 되고, 또 졸업하면 어엿한 성인.
그러고 보니 장래를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네….
"후-웅."
오빠하고도 미래에 대해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서로 아직은 어리니까, 그런 핑계를 두고서 꽁냥거리기만 바빴지 막상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된다는 상상을 하니까 머리가 불투명해져서 불안하기만.
나도 마찬가지지만, 오빠는 뭐가 되고 싶을까?
수업 내용 따위 기말도 끝났고 해서 반의 절반은 딴청을 피우느라 바빴고, 그중에 나도 포함됐다. 그래서일까? 공상에 젖어 턱을 괴고 쓸데없이 진지해졌던 건. 그 여파가 현재 애들이랑 걷는 와중에도 남아 있어서, 자기네들끼리 뭐라 떠드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후."
혹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오른쪽 무리에 신경 쓰는데, 노닥거리며 웃느라 꺄꺄. 단연 돋보이는 채리의 걱정 없는 미소가 영양가 있는 대환 아니었음을 증명해서 공상을 이어 진행했다.
생각해 보니 요새 언니의 씀씀이가 좋아졌네, 하고 있다던 일은 잘되는 걸까?
그렇다 해도 언니의 취미는 존중해주기 어려웠다. 단지 소감은 자매라도 취향은 맞지 않는 걸까 의아스러울 뿐. 그러나 역시 저번에 오빠 앞에서 깎아내린 건 그래도 언니인데, 내가 심히 무례하긴 했었다. 사과는 안 할 거지만, 자기가 먼저 우리 사이에 끼니까 그런 거지.
…근데 다시 생각하니까 열 받네?
언니라 해도 동생이 남친하고 오붓하게 있으려는데, 눈치 없이 중간에 들어와서 방해나 하고. 동생이 행복하게 연애하는 꼴 보기 싫은 건지 묘하게 거북하도록 군다.
"흥…-."
노처녀 히스테리인지, 부러우면 지도 남친 사귀던지. 몇 년째 성장하지 않아 외형처럼 사회성 없는 애새끼 같은 년.
언니가 없는 자리에서, 언제나 그렇듯 속으로 나지막이 언니 욕을 했다.
저녁까지 먹고 들어가기엔 애들에게 잡히는 바람에 늦을까 봐 식사 권유를 마다하고 서두르는 발걸음.
아, 배고파-아…!
하늘은 구름 약간 있을 정도로 맑기만 하고 바람도 적당한데, 더위가 날씨를 기분 나쁘게 하는 요인이라 얼른 집에 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히히."
집에 가자마자 씻어야지-.
그 뒤 알몸으로 에어컨 바람 쐴 생각에 기분이 부풀어서, 그 상태로 오빠랑 토-크를 나누면 오늘 하루 완벽한 마무리. 물론 언니에게 저녁 뭐 먹을지 같이 고민하고 식사를 마친 다음에 말이다.
"헤헿."
맨날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최근 들어 그나마 같이 얼굴을 보며 밥이라도 먹으니까 한편으로 놓이는 마음. 요즘 과자보단 다른 걸 먹는 언니다 보니까 바깥에서만 말고 집에서 자주 먹어서 그런지 뭐 시켜 먹자는 말을 한다. 가능하면 다음엔 내가 언니를 바깥으로 불러내 맛집 가자고 하면 되겠지만, 아직은 너무 더우니까 집에서 먹어야지. 조금씩이지만, 언니가 긍정적으로 변하니까 내가 다 좋았다. 항상 집 밖으로 나가질 않아서 먹는 거라곤 과자뿐이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잔소리를 하자니, 경제권은 언니가 가지고 있었기에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
"후-…."
딴맘 먹지 말자. 지금은, 억지로라도 엇나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
복잡해지려는 생각 주저해서 흩트려버리고는,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현관문을 열었다.
"언니-. 나 왔어-."
평소라면 조용히 언니 방의 문을 두드렸을 테고, 서로 싸웠다면 무시하고 제 할 일 했을 거다. 그런데 현관에서부터 친근하게 부르는 건 생일 이후부터 저녁만큼은 틈틈이 같이 먹어서. 방으로 찾아가기보단 어차피 열려 있을 문이기에 부르면서 가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매일 나오진 않더라도, 요즘 여유가 있는 모양인지 가급적 식탁에 얼굴을 드러냈으니. 게다가 주말이면 먼저 찾아와서 뭐 먹을지 말을 꺼낼 정도니까 정말 친언니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긍정적인 변화니까, 기뻐…해야지.
"…빨리 왔네."
복도를 반쯤 걷자 언니가 마중 나왔다.
"곧 저녁이잖아. 언니랑 오붓하게 먹으려고."
언니랑 말하면서도 마음은 오빠를 생각하느라 어쩌다 새어 나온 오붓이란 단어. 너무 기대한 나머지 입에 붙었나 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그러면 뭐 어때서-.
"히히, 어? 오랜만에 보네 그 옷."
항상 입던 체육복이 아니라 하늘하늘한 민소매 원피스. 거기다 어깨는 끈으로 되어 있어서 통풍 잘 되는 재질에 가벼워 보였다.
"빌렸어. 좀 입을게."
다른 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언니 옷 입었다고 얻어맞는다는데, 나는 반대로 언니가 옷가지가 적어서 내 옷을 입는 현상. 사실 빌렸다는 언니의 표현도 애매한 게, 어렸을 때 언니가 입던 옷을 내가 입었다가 그 옷을 지금 언니가 다시 입은 거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다 보니 꾸미지도 않고 사 입지도 않는 상태. 집안일도 혼자 하니까 괜히 잔소리하는 것도 우스워서 별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착잡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응-."
예전엔 언니 것만 보면 다 가지고 싶어 떼를 썼는데, 세월이 흐르니까 오히려 내가 나눠주는 현상. 거기다 겉으로만 보면 내가 언니라고 착각될 체형이라 이래서 키와 가슴의 유무가 중요하다고 새삼 깨달았다.
"…속으로 내 욕했지?"
쳇, 이럴 때만 눈치가 좋아서는.
"으-응! 아니야. 히히-. 배고프다. 뭐 먹을 거야 언니?"
비록 매번 배달이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음식이 올 때까지 거실에서 같이 티브이를 봤었는데.
"…난 먹었어."
"뭐? 언제?"
저녁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내 하교 시간에 맞춰 이른 식사를 했었기에 지금은 늦은 편이었다.
"두 시간 전에."
두 시간…?
언니에게 토-크를 보낸 게 세 시간 전이었으니까, 애들이랑 놀다 간다고 해서 저녁 먹고 오는 줄 알았나 보다. 다음부턴 먹고 들어가나 안 먹고 들어가나 알려줘야지.
"뭐 먹었는데?"
음식이 두 시간이나 상온에 있었을 린 없을 테고, 냉장고에 있다면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맛없을 거 같아서 마음의 준비하고자 메뉴를 물었다.
"…피자."
피자….
치킨이나 밥이 아닌 점이 그나마 다행.
"뭐, 나쁘진 않네."
뜨겁게 데우기만 해도 원래의 맛과 비슷할 테니 안심이었다.
"씻고 와. 차려 놀게."
어쩐 일인지 차려준다고 말해서 갸우뚱…이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언니답지 않아서 묘하게 친절한 태도.
"고마워 언니. 그치만 먹고 씻을래."
알아서 먹으려고 했다가, 언니의 친절을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더워서 땀을 좀 흘리긴 했지만, 우선 방에 들어가 가방부터 놓고 에어컨을 켠 다음 얼른 먹고서 시원하게 샤워하려는 것이 나의 소소한 속셈.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장 주방으로 가는 언니였다.
각자 목적지가 정해져 생각했던 방향대로 다녀왔다. 방에서 간단하게 정리한 뒤 거실로 나오니까 접시에 피자가 두 조각이. 처음 고소한 치즈 냄새를 풍기면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맛깔스러워 보였다.
"맛있겠다. 페페로니야?"
오늘 점심이 부실해서 이걸로는 부족했지만, 어차피 다 못 먹었을 테니까 냉장고에 따로 남겨둔 걸 먹으면 됐다.
"…맞아."
피자만 먹으면 목이 메니까 컵에 콜라도 따라주는데, 보이지 않는 피클과 핫소스.
벌써 다 먹었으려나?
꼭 필요한 건 아니었어도, 없으니까 허전해서 좀 꺼내주면 좋지 않았나 싶었다.
"헤헤-."
거기까진 해주지 않으니까 스스로 꺼내기로. 겸사겸사 싱크대로 다가가 손을 씻고는 걸이에 걸린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아마도 넣어뒀을 냉장고를 향하여 몸을 돌리다 문득 재활용 봉지에 구겨진 피자 박스를 포착. 사이즈가 딱 봐도 라지여서, 접시에 놓인 피자가 어째선지 크다 싶었다. 그런데….
냉장고에 있지 않고 왜 여깄지?
"…설마?"
혹시나 한 마음에 분주히 이동했다.
"헐………."
미친, 피자가 달랑 한 조각 남았어….
냉장고 문을 여니까 겨우 한 조각만 접시 위로 랩에 씌워져 있었다. 원래라면 귀찮다고 상자째 넣었을 텐데, 어쩐지…. 라지 사이즈를 혼자서 다 먹었단 생각에 큰 배신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그렇지, 난 이렇게 언니 생각해서 일찍 집에 왔는데….
"자기가 뭐 때지야?"
특히나 미디움은 작고 여섯 조각에 불과한데, 라지는 크고 여덟 조각이니 차이가 컸다. 저번에 케이크야 맛있으니까 서로 먹는 바람에 빨리 소모된 거야 당연히 그러려니 하지만, 과자 말고 다른 걸 혼자 주문한 것도 모자라 남기지 않았다는 건….
"…응?"
미디움이라면 그나마 이해했을 텐데…만져보니까 물렁물렁해서 넣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언니가 요 며칠 사이에 이렇게나 식성이 늘어났다고?
"수상해…."
나 몰래 누굴 부른 걸까? 그거밖에 설명할 길이 없지만, 대체 누굴…?
언니가 나 몰래 불러 같이 끼니를 때운 상대가 이다지도 궁금했지만, 언니도 언니 나름대로 사생활이 있을 테니까 차마 당분간 묻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나야말로 둘만 있는 집에 오빠를 데리고 왔으니까 따지고 보면 은혜도 모르는 년은 나겠지. 혹여 물어보려 해도 어디로 가버렸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보나 마나 방으로 돌아갔겠지만.
"아침부터 먹었으려나…?"
만일 언니가 누군가를 데려왔다는 상정을 하지 않고서 결론은 내린다면 필시, 일찍 일어나 아침부터 피자를 주문하여 먹은 뒤 점심에도 먹어서 세 조각 남았다는 추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