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해답 없는 고민(2)
[웅 ㅎ]
오전 6:54_[희진이두 잘 잤어?]
아침부터 깨가 쏟아지는 대화였지만, 전송을 누르는 손짓이 편치 않아 지문 대신 괜스레 입술을 깨물었다.
희진♥
[웅ㅎㅎ]_오전 6:54
어제의 일은 모르는지 의심할 여지 없이 돋보이는 활발함. 비록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고역이었지만, 희진이가 기분 좋아 보인다는 것을 위안 삼아 굳게 다문 입술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중간에 술을 마셨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젠 정말 고마웠어 오빠]_오전 6:55
"술…?"
분명히 녀석 말고는 희진이나 나나 먹은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고 언급하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거겠지. 어쩌면 녀석하고 이미 대화가 먼저 끝났기에, 나한테는 같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당시 어땠었는지 교차 검증하고자 묻는 거로 느껴졌다.
[ㅎㅎ 당연하지]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생일인데]
오전 6:55_[오히려 선물을 주지 못해서 무척이나 가슴 아픈걸]
그러나 녀석은 나하고 입을 맞추지 않았기에 경솔하게 술에 대해서 덧붙이기보단 뒤의 말에 화제를 돌리려고 억지로 높이는 텐션.
희진♥
[에헤헿ㅎ헤]_오전 6:55
이런 내가 희진이와 처음 봤을 때랑 비교하면 딴 사람이라고 생각될 만큼 변화가 크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헤헿."
아니나 다를까, 희진이도 짓궂은 농담보다 애교가 늘어 상념이 많았던 어제의 나는 그새 사라졌는지 헤벌쭉-.
[근데 오빠]_오전 6:55
하고 즐겁던 분위기가 철렁…걱정 없을 희진이와 달리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였다.
[시험공부는 잘 돼?]_오전 6:56
"…후-우."
가슴이 내려앉을 찰나, 그냥 가벼운 걱정이란 걸 깨닫자 도둑이 제 발 저린 상태에서 안도의 한숨.
오전 6:56_[…그럭저럭?]
공부도 시작하자마자 일이 터지니까 쉽게 잡히지 않던 펜이었는데, 지금이라면 녀석과의 일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 집중할 수 있을 거 같긴 했다.
희진♥
[그럭저럭이 모야!?]
[오빠 생각해서 자꾸연락하려는거 참고있었는데]_오전 6:56
오해가 있었던 이후가 아니더라도 이전에 대화가 소원했던 까닭이 왠지 그럴 거 같더라.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하면 보통 무색해져서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 희진이가 그렇다고 하니까 기특해서 알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꼭 좋은 성적 받아야해!!]_오전 6:56
어제도 얼추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거 같은데, 잊은 모양인지 재차 알려주는 게 사실 나도 긴가민가해서 덕분에 솟는 의욕.
오전 6:56_[웅 ㅎㅎㅎㅎㅎㅎㅎㅎ]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도록 표현하는 것이, 그동안 오해하느라 섣불리 대화를 나누지 못한 몫까지 채우려는 듯 적극적인 애정이라 은근히 서로 자기가 더 상대방에게 애착을 가졌다고 토로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기분파라 내키는 대로 말하는 걸지 몰라도, 그것 또한 진심이기에 망설임 없는 대화란 곧 머리를 거치기 전에 내뱉어버리는 경솔함.
"후-훟."
사실 나의 경우엔 이렇게라도 토-크를 나눠야만 그나마 희진이에게 내 진심을 전해줄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런 대화를 면전에서 하라고 하면 어버버 거리다가, 희진이의 짓궂은 장난의 먹잇감이 되겠지. 그런 것도 싫진 않았으나, 아무리 그래도 연상에다가 남자라는 현실은 내가 싫어도 세간의 부담감에 얽매이고 말 거란 걸 알았다. 누구나 소인배로 보이긴 싫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평범이라는 기준에 적합한 아량을 지닌 사람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단 걸 알았기에….
희진♥
[원래 시험끝나고 단둘이서 생일을 맞이하려고 했으니까]_오전 6:56
그런 의중이야 그 입으로 들었어도, 단둘이란 단어가 제법 매혹적으로 들려왔다. 사실 희진이의 계획을 생각하면 합리적. 중간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변수로 작용했지만, 희진이 입장에선 해결됐으니 다시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끌어 가면 좋았을 계획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오빠랑만 있고 싶어]_오전 6:57
다시 한번 강조하는 둘만 있자는 내용. 생일 파티는 어제로 끝낸 줄 알았는데, 제법 아쉬운 모양이다. 하기야, 얼마 먹지도 못하고 기절해버렸으니까. 희진이는 먹고 왔다 쳐도, 성대하게 배달 음식까지 준비해놓고는 수면제라니…미묘하게 어수룩해 보여도 간결했다. 거기에 맥빠지게 당했지만, 희진이가 먼저 올지 모르니까 어서 와달라고 하더니 세 시간은 족히 기다리게 해놓고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었지. 솔직히 이건 예의 차리느라 마셔도 되냐고 묻지 않은 내 잘못이 크지만, 변명하자면 녀석과 함부로 말 섞기도 위험했고 희진이에게 직접적으로 언제 올지 물어보기도 그래서 지루하게도 하릴없이 기다리기만 했었다. 집주인의 허가를 구하지 않고 먹기엔, 그만한 행동력이 부족했으니까.
[마침 언니도 우릴 위해 그날엔 집을 비워준데]_오전 6:57
녀석이? 그 이야긴, 집에서 보자는 거겠지? 암만 그래도 녀석 때문에 집으로 가긴 꺼림칙한데….
[알았어]
오전 6:57_[차질이 없다면, 그렇게 하자]
설령 집을 비워준다고 해도 의심스러워서,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모를 일. 희진이에게서 녀석이 언급되자 탐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론할만한 내용물이 부족했다. 현실적으로 용돈 받고 생활하는 커플이라…노는 거야 그렇다 치고, 좋은 분위기로 무드를 이어가기엔 장소가 그리 마땅치 않단 게 현실. 게다가 알바를 하는 것도 아니라서, 가성비만 따지기엔 번거로움과 아쉬움이 항상 뒤따랐다. 이렇게 돈과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장소가 마련되는 건 부정할 수 없을 만한 큰 장점.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제한과 자유로움은 하기 나름이었으니, 일단은 왠지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에 들뜨기도 했었다.
희진♥
[구럼 나 등교해야 하니까]
[오빠두 잘 다녀왕!]_오전 6:57
시간적 여유가 허용된다면 이대로 다시 밤이 돼서 잠들 때까지 이어 갈 용의는 충분했지만, 어디까지나 마음만은. 대답의 끝머리로 항상 하트와 이모티콘을 주고받으며 끝내자, 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을 한숨이 나온 사실을 깨달았다.
"하하…."
그리곤 이런 자신의 웃지 못할 처지에 헛웃음이 저절로. 바라본 창문 바깥의 맑은 하늘과 다르게 우중충해지려다. 희진이 덕분에 화색이 돌았어도 사건은 시시각각 진행 중이었다. 이걸 어떻게든 해결하고파, 두뇌가 열심히 회전 중이지만 역부족. 더군다나 오리무중이라 갈피조차 잡지 못한 채로 진탕 헤맸다.
"후-…."
어수룩한 머릿속은 갈수록 정리가 되지 않아 민망한 형태로. 지나버린 과거에 아직 되돌릴 순 없을까 싶어도, 처량한 현실만이 뚜렷해져 여태껏 잡힌 약점만 나열해도 치명적인 것뿐. 처음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 사진 유포만은 피하고 싶었다. 어수룩하게 협박을 시도했을 때 제압해서 자료를 지우고 희진이에게 모든 걸 설명했다면 필시 상황은 역전될 수 있었겠지만, 지나쳐버린 기회를 아쉬워해봤자 돌아오지 않으니.
"…-."
내 딴의 생각이었지만, 친언니라고 느껴지지 않게 자기 여동생을 두고 한 협박은 어느 정도 나의 진심을 시험하는 건지…태도를 지켜보는 듯한 어조였었다. 이게 첫 연애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설어도 가볍게 생각한 적은 없어서 도리 없는 불행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결혼까지 염두에 둔 가치관. 그게 나의 얼마 없는 자랑이자 부모님께 보고 배운 책임감이란 거였다. 그러나 시작부터 불 보듯 뻔한…비참해질 파국으로 이끌 바람을 피웠으니, 자신의 신념과 희진이를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갈등과 불안이 더욱 가중될 수밖에. 아직 결혼을 안 했으니까 불륜은 아니지만, 애초에 연인이 있음에도 다른 이성과 몸을 섞었고…그 상대가 연인의 친언니라는 점은 도덕적으로나 인륜적으로나 지적한다면 반론할 수 없을 제기였다. 가령 그게 내 잘못이 아니었어도, 뒤처리가 깔끔하지 않아 만일 희진이가 추궁한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하-아……."
가당찮은 조건에 승낙할 이유야 없었지만, 협박에 굴했던 건 결코 나 하나 괜찮아지자고 그런 건 아니라…실은 두려워서였다. 초중딩 시절 괴롭힘당하던 때보다 훨씬 힘들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왕따를 견디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시간이 지나면 바뀔 거란 기대감에. 확실히 고등학생이 돼서 그런 부분은 사라졌으나, 반동으로 친구 사귀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지금도 반에선 겉도는 존재였다. 그런 내가 희진이와 사귀게 된 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젠장."
하다못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을까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희진이도 피해를 본다. 정확히는 서로 염려하고 보듬어야 마땅할 가족이 피해를 주겠다고 협박…. 그게 얼마나 끔찍할지는 알 길이 없었어도, 평범하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란 건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어이가 없네."
눈을 떴으니까 이제 씻으러 가야 하는데, 아직 등교까지 여유가 있어 침대로 냅다 던지는 몸.
"하-아…."
나는 나를 괴롭혔던 애들을,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더니, 장난이라던가 그따위 변명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꼴이 화가 나서 다시 떠올려도 제어하기 힘든 분노. 그러나 그건 나 혼자 힘으로 버티는 것조차 역부족이라서, 부모님께 괴롭힘당하는 것을 들키자 상황을 알게 된 어른들이 개입해주신 후에야 겨우 끝을 맞이했다. 특히 아버지의 도움으로 괴롭힘당하지 않을 환경을 마련해주셨으니, 무한히 감사드려 효도해야지.
"끙-…."
그래서 지금, 이 사실을 희진이가 아닌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느냐…방법으로썬 나쁘진 않으나 선뜻 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세간의 인식으로 표현하자면 곧 성인을 바라보는 청소년기의 남자애가 동갑의 여자애에게 다른 무리의 개입 없이 일대일로 협박받는 꼴. 세심하게 따지고 들면 체격마저 조금이지만, 내가 더 우월했다. 또래 애들과 키순으로 서면 거의 맨 앞으로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 정도. 그런 사실을 포함해서라도 상대 여자애는 주먹 하나만큼 작았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어릴 땐 남자애보다 여자애가 말썽이라고 하셔서 초등학생끼리 싸우면 남자애가 밀린다고. 하지만 우린 이미 그런 시기를 지났으니까, 이런 건 변명거리도 되지 않을 거다.
"쩝-."
우습게도, 심란했던 밤이 겨우 반나절 지났을까. 방심했는지, 허기진 배가 본색을 드러내는 건 어디까지나 본능이었다. 거기다가 이기적이게도 후회가 되는 건 어제 별로 먹지도 못한 피자랑 치킨이 떠올라서.
"하하, 하…."
처음엔 순전히 희진이를 축하해주기 위한 자리를 명분 삼아 고백하기 어려운 사실을 두고 어떻게든 무마해 미묘해졌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결론적으로 목적은 이루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더욱 커져서 혼자 감당할 수 없다고 울상을 지을 수밖에….
"…울고 싶다."
반쯤 감은 눈은 잠에서 깨기 위해 차가운 물세례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에 번쩍 뜨일 만도 한데, 익숙하다는 듯이 무표정함을 여실히 드러내고선 세수만.
"…-."
시간은 이미 점심을 지나고 있어서, 어제 세 조각밖에 손대지 않은 피자를 꺼내 먹기로 했다. 그렇다고 그냥 먹지는 않았고, 전자레인지에 2분 돌리니까 갓 구워진 시절의 자신을 자랑하듯 내뿜는 치즈 향에 다른 접시를 꺼내 한 조각 더 돌리려고 열은 냉장고.
"우물우물…."
원래라면 겨우 과자 하나 먹고 말았을 식단이었지만, 요즘 들어 식욕이 생기고 입맛을 돌게 하는 존재가 생겼기에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곤 본능이 이끄는 대로 분주하게 입을 움직였다. 말하는 것도 먹는 것도 평소의 이상. 막혔던 소설도 의욕적이어서, 쓰다가 녀석을 희롱해볼 생각에 성욕이 가미되면 참지 못하고 자기만족에 들어갔다.
"-…."
녀석에게 협박이 통했었는지, 부정은 아닌 듯한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다독였던 자신. 순차적이진 않아도 일이 잘 풀리자 다음엔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며 새로 쇼핑했다. 콘돔과 러브젤, 망사 스타킹은 다른 의도 없이 오로지 섹스만을 위한 용품이란 걸 적나라하게.
"쿠-훗."
섹스는 이미, '겨우'라고 세길 두 번으로 성공과 실패를 나란히 겪었으니까 새로운 취미를 추가해보는 것도 재밌겠다고 떠올렸다. 도착적인 발상. 별로 백합에 대해서 흥미는 없었지만, 쓰는 소설이 BL이다 보니 떨어지는 소재에 마침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한단 것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