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엉성한 흉계(3)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대하며 혼자 만족하려던 차에 갑자기 언급하는 그일. 돈까지 쥐여줘서 끝난 줄 알았건만, 갑작스레 불똥이 튀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평생 조카 못 볼 뻔했잖아 언니."
암만 위해줘도 그냥 넘기려는 잘못을 굳이 짚고 넘어가려는 태도.
"…미안."
잘한 거 하나 없는 걸 알아서 표면적으로 적당히 사과만 해주기로 했다.
"나는 됐으니까, 오빠한테 제대로 사과했어?"
큰돈 들여 직접 주었건만, 아무래도 희진이의 불만은 녀석에게 제대로 사과했냐 안 했냐인 느낌.
"……."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 싶었지만, 희진이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어, 응! 사과받았어. 그러니까 괜찮아 희진아…."
내 말은 못 믿어서, 다급히 도움을 주는 녀석.
"으-음…."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심쩍다는 눈초리를 왜 내게 보낸다.
"뭐, 좋아. 오빠가 사과받았다면 됐어."
됐다면서도 이번엔 그냥 넘어가 준다는 어조가 다분해서 불편한 심정. 그래도 다행인 건 녀석의 말은 믿어준다는 거였다.
"아무튼, 언니도 행동거지를 좀 조심해줘."
야발련….
"…어."
속으로 크게 한숨 쉬며 기어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탁-!'
그렇게 지난 일은 어찌어찌 넘어가나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앙심을 비치며 넘치지 않게 내려놓는 컵.
…이게?
받자마자 마시지 않은 채로 놓아서 어찌 보면 자기 앞에다가 놓지 괜한 짓을 했냐는 항의 같았다.
"오빠-. 먹여줄 게 아-해 봐."
하, 미친년.
"어? 으, 응. 아-."
나와는 용건을 마쳤으니 이제 자기 남친과의 즐거운 대화를 방해하지 말고 어서 꺼지란 느낌 역시.
"-…."
반대로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 채 희진이의 애교를 받으며 웃고 있었다.
"쿻-."
그런 녀석을 보고 웃을 수 있는 건, 녀석이 아직 내가 준 컵을 손에 들고 있었기에. 희진이가 오기 전에 얼른 오라고 해서 달려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해서 그게 귀여웠다. 그런 수고로움이 의미 없게 희진이는 친구들과 노느라 늦게 왔지만.
"맛있어 옿-빠?"
하나 불편한 건, 가증스럽게 콧소리를 내도 제지 할 수 없단 사실이었다.
"응! 헤헤…."
그런 희진이에게 콩깍지가 꼈는지 바보처럼 받아먹는 녀석. 이런 남자라도 솔직히 질투 나게 귀여워서 몰래 자빠뜨리려 했었다. 전에도 느낀바, 남녀 간의 체격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오늘도 기회를 엿보려 거실에서 기다리게 하곤 나는 방에서 가만히….
"올-마만큼 맛있어 오빠?"
기다리느라 답답했는지 간간이 토-크로 희진이가 언제 오는지 묻길래 적당히 대답했지만, 명실상부 손님인 녀석에게 거실만 내어줬을 뿐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아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속이 많이 타들어 갔을 거다. 그런 주제에 내게 물도 요구하지 않고서 희진이가 연락했을 때쯤 주문한 치킨이나 피자를 두고 침만 삼키며 도와준 성실함이 되레 자신을 옥죄일 줄 몰랐겠지.
"으-헙, 텁. 읍, 꿀꺽꿀꺽. 하-아! 정신없이 먹을 정도로 맛있어!"
그런 까닭에 희진이의 음식 공세에 실컷 입을 우물거린 채로 주스를 들이켰다.
"아구아구,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
…지가 꾸역꾸역 처먹여 놓고선.
"응-, 헤헿."
내실을 모르기에 둘이서 아주 꽁냥꽁냥….
"…칫."
결코 쓸쓸해서 혀를 찬 건 아니었다.
"희진아. 나 음료수 좀 마실게."
그러다 컵에 한 잔 쭉 들이켰음에도 목이 말랐는지 언급하는 주스.
"그럼 우리 건배할래 오빠?"
그에 희진이가 녀석에게 주스를 따르곤 컵을 어깨높이로 올렸다. 그에 나도 조용히 분홍 잔에 넣는 술. 사실 와인이나 샴페인 같은 분위기 있는 거로 시키려다 본래 목표는 파티가 아니라서 부가적인 부분은 최소화했다.
"언니도 자…언니!? 그거 술이야?"
나는 없는 것마냥 굴더니만, 이금에 무슨.
"…마실래?"
구태여 대답하기보단 너도 한 잔 걸치겠냐고 장난삼아 물었다.
"아니. 안 마실래."
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지 정색하며 거절. 내 기억으론 희진이가 술을 싫어할 만한 사연은 없었다.
"오빠는 술 마실 거야?"
얘가? 전혀 그럴 거 같지 않은데 뭘 그런 걸 묻고 있어.
"아아니! 난 안 마셔."
혹여 녀석은 마시는지 물어보니까 호들갑을 떨길래 희진이랑 나는 역시나 그럴 거 같단 표정이 됐다.
"이히히. 그럼 언니만 술 마시네?"
기어이 술을 꺼낸 목적은 수면제에 잠들어도 다 술기운 탓으로 넘기기 위해서.
"…그렇지."
어차피 마시지 않더라도 수면 중에 두세 모금 입으로 넘겨주면 술 때문이었다고 알아서 오해할 거다.
"그럼 건배하자!"
재미없는 대답이어도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는 건 익숙해서. 생일의 주인공이 주도하며 팔을 올리니까 녀석이 옆에서 어영부영 따라간다.
"거, 건배!"
보여주는 모습처럼 어리숙한 목소리.
"히힛-!"
그걸 또 좋다고 기쁜 웃음소리로 컵을 부딪친다.
"…짠-."
그러다 내게 왜 안 하냐는 눈치를 주니까 잔만 갖다 대면 되는데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실실 웃는 계집애 좋다고 웃는 꼴 썩 싫지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풀어진 자신을 보고 언제부터 긴장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고마워 언뉘. 오빠도오-!!"
잔을 홀짝이며 희진이가 수면제가 든 컵의 내용물을 다 마시는 걸 확인하니까 바로 들리는 감사 인사에 무심한 척 머리를 살짝 끄덕였으나 내심 놀란 가슴. 남을 속이고 그럴 땐 별로 양심이라던가 그런 것에 죄책감이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순간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 사실 일이 틀어지든 말든 원초적으로 이루고픈 욕망은 이루었기에 둘 다 무시한다는 방법도 있었는데, 그런데….
"생일 축하해-."
"우히히힛- 웅!"
그나저나 연인이면서 아까부터 대화가 도돌이표다. 생일인데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고 속으로 조언해봤자 실상은 내가 둘 사이에 낀 셈이라 자리를 비워주면 알아서 물고 빨고 할 텐데, 둘에겐 유감스럽게 그 역할을 뺏으려고 침투했기에 계속 뻗대야지.
"참! 희진아. 사실 사과할 게 있어…."
"부-끅!"
맥주 거품으로 입술만 묻히다가 갑작스러운 녀석의 고백에 놀랐다. 설마, 이제 와서 그때 일을 고자질하려고…!?
"뭐가 오빠?"
녀석의 사과에 당연히 집중하는 희진이. 이렇게 되면 내가 그 일을 무마하려고 이 난리를 피운 의미가 없어진다.
"그게…."
저 자식…안 그런 척하고 있더니만 이렇게 뒤통수를…!
"네 생일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물을…준비 못 했어. 미안해…."
말리려는 틈도 없이 떠벌린 내용은 염려하던 것이 아니라 불쑥 일어나려다 황급히 몸을 가다듬었다.
"에이, 뭐-야 오빠. 난 또 뭐라고, 히히. 난 이걸로 충분히 행복해 오빠."
"…휴."
별거 아니라는 대답과 함께 진짜 별거 아니라서 내시는 안도의 한숨. 하마터면 시작도 하기 전에 망칠뻔했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
전에도 그랬지만, 아닌 거 같이 굴다가 대뜸 저지르는 우발성이라고 해야 하나? 과감함이 엿보이긴 했었다. 그게 나에겐 좋은 점이 전혀 아니라서 문제였지만.
"맛있네."
드디어라고 해야 할까, 녀석을 먹이고서 희진이도 닭 다리를 들어 한 입 베어 먹고 내려놓는 걸 보니 친구들이랑 먹기는 많이 먹었나 보다.
"그러게."
평소라면 얼른 먹고 빠르게 식사를 끝내는 스타일인데, 지금은 예의상 먹고 마는 분위기.
"오빠-이것도 먹어봐."
대신 이제껏 고대하느라 허기졌을 자기 남친만 챙긴다.
"어, 응…!"
적극적인 태도에 면역력이 약해서 해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는 녀석의 꼴이 남자답다곤 할 수 없었지만.
"맛있지?"
"응! 희진이가 주니까 더 맛있는 거 같은데?"
"이히히. 오빠도 참!"
망할 커플 행세에 나도 배고팠어도, 이상하게 입맛이 뚝 떨어졌다.
"…칫."
어서 수면제의 효과가 돌아야 둘 사이에 괜히 낀 이 눈칫밥 상관 않고 녀석을 덮칠 텐데…란 생각으로 희진이에게 저지른 잘못을 벌써 잊곤 심술만 부리려는 심정. 특히 앞으로 벌어질 일 따윈 모른 채 멍청하게 웃고 있는 녀석을 내 밑으로 또 눕힐 생각을 하니까 이런 촌극을 견딜 수 있었다.
입은 떠들면서도 흐릿해지는 정신에, 분명 시야는 멀쩡한데 초점이 어긋나 도수 높은 안경을 낀 기분.
"히힣-! 헤-읗…."
몸이 나른해져 이만 가보겠다고 하려다 희진이가 흐트러진 채로 품에 안겼다.
"희진아?"
"웅…?"
애교를 부리는 건지 그저 잠결인지, 어울리지 않게 잠이란 단어를 떠올린 까닭은 왠지 모르게 졸려서.
'착-착-!'
급격히 쏟아지는 졸음을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기에, 잠에서 깨려고 뺨을 때리니까 조금 나아졌다.
"…많이 졸린가 봐?"
그런 뒤에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니까 약간 회복돼서 잠깐이나마 괜찮아진 거동. 하지만, 방심하면 이대로 잠들 거 같아 거듭 정신 차리며 어느새 품에 안긴 희진이의 어깨를 잡았다.
"방에 데다 주고 오께."
"…."
그런다고 말을 해도 대답이 없어서 무안했지만, 어차피 저런 성격이기에 그러려니. 그렇게 잠든 희진이를 부축하려고 일어서자 오히려 내가 휘청거려 미끄러지듯 흔들렸다.
"쿻-! 그 상태로?"
그럴 리 없겠지만, 일부러 안 들린 척하더니 내가 실수할 뻔하니까 붙잡아주기는커녕 경시하는 태도.
"그러게, 이사하네…."
도와주지도 않고 깔보는 시선이 무척 기분 나빴지만, 원체 그런 걸 즐기는 녀석이니 기대도 안 했다. 설마한들 녀석의 수작일까 싶지만, 혹시 내가 잘못해서 술을 마신 건 아닐까 컵에 가져다 대는 코.
"킁킁, 큼."
딱히 알코올 냄새는 나지 않았다.
"쿠-히힛."
…잠깐 또,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
"왜 우서…?"
반쯤 잠길 듯한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며 속으론 의심해도 마지막 신뢰의 끈을 잡고서 무슨 의향인지를 물었다.
"…그야, 재밌잖아? 둘이 아주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 게."
"그게 므슨 소리야…?"
어째 삐뚤어지는 발음.
"모르겠어? 희진이를 재운 뒤, 저항조차 힘든 널 따먹으려고."
남이 들으면 어쩔까 싶은 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지껄인다. 따먹다니, 그게 여자애가 할 소린가. 애초에 따지자면 이런 짓 자체가 여자 남자를 떠나서 범죄였다.
"미취인…."
더군다나 이번엔 희진이까지 끌어들여 수면제 같은 걸 탔다는 걸까?
"쿠-훗. 귀여워."
녀석의 의도를 듣고 도망치려고 하니까 몸이 무너지면 내게 기댄 희진이를 바닥에 떨어뜨릴 거 같아 소파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왜…?"
그러면서 귀엽다는 칭찬을 조롱으로 떠넘기고, 끈질기게 이러는 사연을 알고 싶어 무심코.
"…왜라니? 지난번에 말해주지 않았던가? 네가 마음에 들었다고."
"너 미쳐써…."
스르르 감기려는 눈에 정신은 허물어져도 가당찮은 대답이라 도저히 욕지거리를 참을 수 없었다. 마음에 들었다느니 자기 취향이라느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거짓말 아니야, 진짜로."
내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좋게 말해서 유순한 거지 돌이켜 보면 종종 계집애 같단 이유로 괴롭힘당한 기억뿐이었다.
"너 말야, 너무 자신에게 자신감 없는 거 아니야?"
그야 괴롭히는 녀석들 관점에서 어떤 이유를 들먹여도 단순히 장난친다는 명목으로 못살게 구는 건데, 그 녀석들이 변명이랍시고 지껄이던 상황과 비슷해서 좀처럼 믿을 수 없는 녀석의 변명.
"…하기야,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겠지. 게다가 수다 떠는 건 내 성경이 아니니까, 이제 설
득하는 건 관둘래."
두말하면 입 아프단 어조로 느긋하게 다가오는데, 굳이 그러는 건 발버둥 쳐도 고작 몇 센티 못 움직이는 나와 달리 평범하게 걸어도 금방 내게 다다라는 여유로움에서일 거다. 아니면 그저 저항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려는 걸지도 모르고.
"쿠-훗."
아, 즐기는 거네….
이렇게 된 이상 폭력을 써본 적은 없지만, 비상시니까 정당방위다.
"…큣-!?"
체감상 근거리 같았는데, 거리 계산에 실패하여 힘껏 걷어찬 발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자 멈칫하는 녀석. 처음엔 실패했지만, 다음엔 다시는 다가오지 못하게 무릎을 접어 언제든지 찰 수 있게 준비했다.
"…만만하게 봤었는데, 역시 성별의 차이는 쉽게 극복할 수 없나 봐? 희진이는 벌써 잠들었는데?"
발차기 때문에 다가올 생각 없이 누운 나를 비웃으며 보란 듯이 옆에서 잠든 희진이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또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 얼굴은 사악 그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