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엉성한 흉계(2)
"케이크는 점심에 외출증 받아서 사 오기로 했어!!"
아직 조회도 안 했는데 언제 받았는지 담임 선생님께 받은 외출증을 보이며 밝은 표정. 마침 오늘 점심메뉴가 별로라서 그런지 생일인 나보다 기대하는 눈치였다.
"빠르네."
외출증에 대한 감상은 다른 애들도 똑같았는지 뒤에서 들린 말에 모두 수긍하자 히히 웃으며 드러낸 명랑한 표정은 싫어할 수 없는 채리의 특징.
"있잖아, 집엔 초대 안 해주는 거야 희진아?"
칭찬에 가슴 펴던 것도 잠시, 생파 이야길 꺼냈을 때부터 집에 오고 싶다며 항상 꺼내던 터라 오늘도 어김없이 물어본다.
"으-음 미안해. 부모님도 안 계시고, 언닌 집에서 일하느라 누군가 오면 신경이 곤두서서 허락할 거 같지 않아."
부모님이 안 계신단 뜻은 늦게까지 일하시느라 곤란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끔 말했다. 암만 그래도 집에 누군갈 데려올 땐 언니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애들을 초대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딱히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나이도 아니라서 기회가 되면 나중에 천천히 고백하기로. 그다음엔 언니에게 허락받는 것이 내 딴의 순서였다.
"그렇다는데 뭐, 불편하게 굳이 찾아가지 말고 간단하게 노래방이나 들려서 놀자."
정말 놀러 오고 싶었는지 잔뜩 기대를 머금는 눈빛이 아쉬움으로 물들었지만, 다행히 현비가 의견을 더해줘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걸로 한동안은 잠잠하겠지.
"비좁지 않을까?"
"…뭐가?"
모여서 놀 장소가 집에서 노래방으로 바뀐 건 좋았는데, 이번엔 다른 의문을 제시니까 의향이 무엇인지 유추해봤다.
"코노."
코노? 갑자기 웬?
"아니, 그렇잖아. 이 인원이면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고. 둘 들어가고 나머진 예약만 했다가 밖에서 자기 차례 기다려야 할걸?"
"응? 우리 코노 말고 노래방 갈 건데?"
아무래도 채리가 착각한 모양.
"아, 노래방?"
가성비 때문에 보통 코노를 가다 보니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나 보다.
"풋, 채리 넌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듣다못해 답답했는지 뒤에서 헛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듣고도 천연덕스러움을 유지하는 채리.
"헷-, 착각했따!"
귀여운 착각에 다들 가볍게 웃어 이래저래 떠들어도, 벌써 노래 부를 생각이 만연한 것 같아 답답했던 속앓이를 잠시나마 있고는 어울려 미소를 지었다.
언니와는 서로 간의 대립으로, 사흘째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지나치다 무시하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 방에만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 상황. 원체 성향이 그랬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태가 사태인 만큼 계속 농성만 한다면 오빠에 대한 분노보단 가족으로서 드는 걱정스러움이 슬슬 생겨났다. 그렇다고 싹싹 빌기 전까지 용서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내 언니지만, 창피하다. 거기다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는지 뻔뻔스럽게 자기도 아프다며 피해자 행세를 하는데, 지가 뭐가 아프다고. 아팠으면 걷어차인 오빠가 아프지 대체 앓는 목소리는 왜 내는 걸까? 내가 동정심이라도 생길까 봐?
"웃겨 진짜."
정말이지 어떤 사고를 하고 생활하는 것일까 심히 걱정스러웠다. 너무 집에만 있던 탓에 사회성이 결여 돼 언젠가 다른 누구를 만나도 적만 늘리는 건 아닐까? 그나마도 언니랍시고 학교에 다녀오면 무심하게 탁자 위로 용돈을 둔다. 뭐, 미안하긴 했는지 돈은 평소보다 배로 많았지만. 뭐든지 자기가 찔리면 돈으로 해결하려는 나쁜 버릇을 조만간 지적하기로 해야겠다.
"후-우…."
그래도, 생일이라고 일찍 들어오라는 걸까?
─2019년 6월 12일 수요일─
언니같잖은생물
[언제 와?]_오후 5:47
오후 6:12_[늦ㅗ]
언니같잖은생물
[올 때 연락해]_오후 6:17
오후 6:21_[ㅇㅗ]
오후 7:01_[ㅗ]
엘리베이터에 타 언니랑 나눈 토-크를 보며 맡아지는 잔향에 누가 저녁으로 피자랑 치킨을 시켰구나 싶었다.
"시발련, 지도 남친 데리고 오면 내가 좆을 까버려야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혼자라서 할 수 있는 독백. 별로 용서할 생각은 없었지만, 생일이라고 따로 부르는 걸 보니 다짜고짜 화내기도 뭣한 기분이었다.
"후-…."
생파는 단지 모여서 놀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으니까 뭐,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놀겠지. 더 놀다 가란 분위기를 흐리기 싫어 저녁은 가족하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며 어렵사리 빠져나왔다.
"흥-…."
분명 우리집인데,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서 열지 않고 잠깐 주춤. 얄미워도 가족인 언니 얼굴 보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에-효."
오빠에겐 간신히 묻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언니에게 화부터 내자니 흐른 시간에 분노가 두루뭉술해져서 다짜고짜 역정 내긴 애매한 상황.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처음 불같이 치솟았던 화가 어느새 불씨만 남아 스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팡-! 팡-!'
"…엣?"
문을 열자마자 팡 터지는 소리에 태연하려 해도 놀란 걸 증명하듯 어깨가 불쑥.
"생일 축하해 희진아!"
무슨 일인이 확인하니까 곧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빠?"
공부하는데 신경 쓰일까 봐 일부로 알려주지 않았는데, 설마하니 언니랑 같이 놀래킬 줄은….
"하…! 내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안 그래도 기말 때문에 바쁠 거 뻔히 알아서 가장 축하받고 싶었음에도 알려주지 않았었는데, 생일인데 그간 답답해서 죽을뻔한 거 애들한테 티도 안 내려고 고생하고, 언니랑도 막 싸워서 집에만 오면 내내 불편하고….
"오빠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둘이 짜고서 아주 날…."
친구들에게 받은 선물을 넣느라 무거워진 가방 무게도 잊은 채, 뭐라도 던지고픈 마음에 벗어 던질뻔했다.
"아, 그…."
축하해주려고 폭죽까지 터트린 건 좋았지만, 막상 내가 참고 겪었던 일을 생각하니 억울해서 부들거리자 당황함이 역력한 오빠의 표정.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난 진짜! 언니 때문에 오빠랑 어떻게 될 줄 알고, 조마조마했단 말이야…!!"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 아니어도 그동안 마음고생에 울분이 약간. 내키는 대로 오빠에게 무심코 뛰어 들어가 머리보다 주먹이 먼저 가슴을 쳤다.
"악, 아-긋! 그, 미안…."
애교 삼아 가슴을 두드렸을 뿐인데, 어째선지 비명 참듯 엄살은. 그러나 아무리 숙맥인 오빠라도 위로해주려고 등을 토닥여주니까 쌓였던 부정함이 사르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를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워서 구태여 연신 탓하는 웅얼거림. 그러면서 서럽다는 듯이 툭툭, 살짝쿵 밀리지 않게 가슴을 밀었어도 엄청난 안도감에 씰룩이는 입꼬리 들키지 않으려 더욱 밀착하니까 오빠의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내갓, 잘못했어…."
오빠도 미안하긴 미안했는지 감정을 삼키며 달래주는데, 이게 제법 안심이 되니까 언니 무안 하라고 가능하면 최소 오 분은 더 이러고픈 욕심이 생겼다.
"정-말?"
의문스러웠던 당시의 당위성을 찾기보단,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어져 다시 놀리고 싶어진 오빠의 유순함에 냉큼.
"정말 잘못했어 오빠?"
금방 짓궂은 생각이 떠올라 표정으로 드러나려 하자 고개를 푹 숙이고는 최대한 성의를 보이면 용서해줄까나? 싶은 태도로 기댔다.
"으, 응! 물론이지. 깜짝 놀래켜 줄 생각은 맞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게 심해져 힘들었을 텐데 계속 비밀로 한다고 희진이를, 곤란하게 했어…. 아무리 깜짝파티라지만, 미안해."
그거야 오빠랑 언니 때문에 마음고생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앞으로 영영 회복하지 못하겠다 싶던 관계가 실은 의도된 이벤트라니까 무엇보다 놓이는 마음.
"정말 미안해?"
"응, 백번 천번 내가 잘못했어."
간단히 추론해보면, 분명 언니가 나 골탕 먹이려고 강도 높은 장난을 꾸몄을 게 안 봐도 뻔했다. 언니의 주도로 한 농간이라 오빠 잘못은 단지 내게 말하지 않고 작당에 참여한 것밖에 없겠지만, 이런 사소한 기회조차 놓칠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미안하면, 내가 해달라는 거 해조."
어리광부리면서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거절하지 못하게끔 유도하려는 계략.
"알았어. 뭐든지 말해, 어떤 거 해줄까?"
씨-익.
"히히, 그러-엄. 우리, 영화 보자. 공포영화."
순진하게도 미안함을 미끼로 덫을 뿌리니까 먹잇감이 알아서 걸어들어왔다.
"……응?"
뜸 들이며 유혹하듯 끈적하게 속삭였는데, 여태 투닥 거리다가 돌변하니까 다정다감함이 뚝-.
"공.포.영.화."
제대로 들었겠지만,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또박또박 발음해줬다.
"이-극!?"
그러자 예상치 못했는지 딸꾹질처럼 놀란 반응에 참을 수 없이 번지는 승리의 미소.
"왜? 싫어? 덜 미안한가 봐 오빠?"
여기서 토라질 것처럼 한마디 더 하면 게임 끝이다.
"하하, 하, 아니야! 볼게, 봐야지! 응…."
껄끄러운 표정 숨길 수 없어도, 부담스러운 얼굴과 달리 애써 처량히 긍정하려는 태도.
"히히히! 진짜지? 약속이야 오빠!"
"그래도 오늘은 늦었으니까…."
약속은 했어도 당장은 피하고 싶었는지 걸고넘어지려는데, 그래봤자 아직 여덟 시도 안 됐다.
"거기 닭살커플? 애정행각은 적당히 하고, 저녁이나 먹어."
좀 더 놀리려고 구상하는 와중에 옆에서 초 치는 언니 때문에 식어버리는 흥. 날뛰던 기분이 돌아오자,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로 후각을 간지럽히던 게 느껴졌다.
"칫, 알았어."
아쉽지만, 한 발자국 뒤로 떨어지니까 노심초사한 흔적이 남은 얼굴. 안쓰럽게 웃는 건 좋은데, 오해가 해결됐다고 해서 숨기지 않고 마음을 놓으니까 괜히 더 괴롭히고 싶어졌다.
"시험 끝나면, 두고 봐 오빠."
마무리로 장난스럽게 오빠를 살짝 째려보니 그제야 상체가 살짝 뒤로 빠지면서 깜짝파티의 주인공인 나보다 흠칫.
"하하, 응-…."
끝에 애처로운 대답으로 정작 놀래키려던 본인이 제일 놀라 후환을 남겼지만, 어디까지나 자업자득이었다.
"와, 이게 다 뭐야…?"
거실 테이블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자 놀라는 감상에 처음 깜짝생일파티란 걸 알려줬을 때를 대비해서 무작정 많이 시켰는데, 이제 보니 이럴 것까진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대책없이 주문했기에 절반 이상 남길 게 뻔했으니.
"…내 성의."
케이크는 녀석에게 맡겼서 치킨이랑 피자를 차린 게 전부였다.
"와, 언니…이게 대체."
생일이라고 해봤자 치킨이면 치킨, 피자면 피자 딱 한 가지만 주문해줘서 그동안 쌓인 기대치가 낮은 덕분인지 필요 이상으로 놀라는 듯한 반응…. 그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받아."
이 기세를 몰아 선물봉투를 건네니까 표정은 멍해도 주저함 없이 받는 손.
"허-얼…."
생일날 용돈으론 항상 삼사십만 원씩 줬었는데, 올해는 미안함을 담아 숫자 백을 채웠으니까 이걸로 더는 뭐라 안 하겠지.
"이거…꿈 아니지 언니?"
솔직히 나도 꿈이었음 싶은 지출이지만, 틀어진 계획 수습하는 것치곤 싸게 먹힌 거라고 자위했다.
"자- 얼른 앉아서 먹자. 식겠다."
"응-!"
계속 서 있기도 그래서 조용히 앉으려니까 녀석의 말에 먼저 가운데로 앉는 희진이. 나는 준비한 대로 음료수가 있는 쪽에 붙었다.
"행복해-. 좋아 죽을 거 같아 오빠!"
"어-헠, 큭…! 응, 나도 헤헤…."
현관에서 하던 애정행각을 여기서 마저 할 생각인지 옆에 앉으려던 녀석을 덥석 끌어안아 버린 희진이. 준비한 건 난데, 좋은 일은 녀석이 차지하고 자빠졌다.
"…지랄."
그 장면이 기가 막혀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 그나마 다행인 건 나 따윈 안중에도 없는지, 좋다고 지들끼리 징그럽게 마주 보며 떠들길래 은근슬쩍 컵 바닥에 깔린 가루를 확인하며 조심스레 주스를 부었다.
"…자."
여기서 헷갈리지 않도록 건네는데, 석연찮은 눈치로 받는 손.
"으응, 고마워 언니…근데 사실 애들이랑 이미 먹고 놀다 와서…."
의아함에 생각해보니 배가 부를 만도 했다.
"아. 그렇겠네."
어차피 한 모금만 마셔도 효과 있을 테니 중요한 건 제대로 마시느냐 마느냐.
"…괜찮아."
손을 저어 상관없다는 시늉을 하고선 남은 한 잔을 녀석에게 주었다.
"음, 고마워."
"…쿻-!"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는 녀석이 너무 순진해서 웃음이. 마침 먹고 왔다고 하니까 잠들었다 깨어나도 음식이 별로 줄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심은 없앨 수 있어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언니도 심했어. 암만 그래도 그렇지 오빠의…낭심을 걷어찬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