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조악한 겁탈(1)
이어 거실에 에어컨을 틀고서 곧장 소파에 엎드리고 싶은 욕구. 그러나 당장은 이것저것 알아보려 움직여야 해서 알몸으로 이리저리 걸었다.
"…?"
녀석을 낚을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정작 동생이 집에 머물고 있으면 말짱 도루묵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조용함에 혹시 몰라 본인 방까지 들어갔지만, 없었다.
"쿠후후후훗."
일이 잘 풀리니까 참을 필요가 없어진 음흉한 태도.
─2019년 6월 9일 일요일─
1_오전 11:45_[지금 와]
자리가 마련되자, 망설이지 않고 먹이를 불렀다. 이어서 새로 옷을 입으려고 옷장을 여니까 초라한 가짓수. 그야 중학생 때 이후로 새로 구매한 것이 없어서 그에 대한 결과로 기껏 들뜬 분위기를 망친다. 그렇다고 못 입는 건 아니라 팬티만 보기 가장 무난하고 깨끗한 거로 입곤 겉보기에 괜찮은 옷을 입으니까 딱 맞는 사이즈.
"…칫."
중학생 때 입었던 옷이 여전히 들어맞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코-톡'
그 와중에 울린 알람.
함상명
[그래]_오전 11:48
"쿡-!"
마침내 차질 없이 끌어들이게 된 것을 확인하자 순차적으로 풀리는 성취감에 내심 쾌재를 부르며 대면하면 어떻게 구슬려야 할지 고민하던 차, 벨이 울렸다.
"…음-?"
벌써어…라고 하기엔 문 앞에서 기다리지 않고는 말도 안 되는 일. 동생이 돌아왔다면 벨을 울리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었을 거다. 그렇담 남아있는 가능성은 아마도 택배. 무엇이 왔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 주문한 거라고는 하나밖에 없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관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계획이나 다름없었어도, 주문한 상품에 딸려 온 콘돔까진 생각지 못한 사태. 이걸 깜박했으면 뒤처리가 무척 곤란할 뻔했다.
"…훙."
그래서 이제 곧 이걸 써보기 전에 미리 만져보는 물건들. 사진이나 그림으로 봤던 것을 직접 만지니까 확실히 감촉도 생생하고, 확실히 느낌도 있었다. 특히 허공에 채운 수갑과 함께 입에 넣으면 무력해질 볼개그를 저항하는 녀석에게 강제로 채울 생각에 하복부 부근이 욱신거려서…오기도 전에 자신의 유혹에 못 이겨 먼저 욕구를 해소할 뻔.
"-…후."
무심결에 가슴 아래로 얹은 손길이 내려가다가 들숨에 멈추니까 산통 깨지 않기 위해 옅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걸 방에다 숨기고 수갑만 주머니에 넣어 기다리기를 한편. 아직 첫 끼니도 먹지 않아 그런지 아니면 긴장을 해서 그런지 몰라 우선 과자를 먹으러 주방으로 갔다. 어차피, 시간적 여유는 많이 있었으니까.
뜬눈으로 날밤 새울 뻔하다 겨우 잠들어 다시 일어난 건 주말에도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린 까닭에. 그래도 여덟 시간 남짓 잠들었기에 눈을 떴을 땐 하지도 않던 잠투정을 부리며 더 자려다가 이렇게 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려던 잠도 달아나버렸다. 특히 녀석의 징그러운 하트 이모티콘은 아주 섬뜩해서 다시 생각해도 소름 끼치는 등줄기. 마치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불길함을 몸소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후-."
몹시 깊은 한숨. 주말이기에 아침은 평일보다 늦은 시간에 먹었지만, 깨우러 오지 않으셔서 그대로 누워 있어도 좋으련만…일부로 멍한 상태를 유지하며 가벼운 아침 인사로 튼 말문은 하루의 시작을 야기했다.
"친구 만나러 가니?"
친구…마땅히 그렇게 부를 상대는 없어서 스스로 인간관계를 의심해보지만, 괴롭힘을 당한 전례가 있었기에 현재는 차라리 주변 따위 무관심으로 보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뇨. 그냥, 아는 사람 만나러 가요."
녀석이 나와 동갑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친구라 부를만한 사이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친구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라니?"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아버지께서 의아함에 물으시니까 실수를 깨닫고 변명거리를 찾으려다 말았다.
"흐-음. 그래. 잘 다녀오려무나."
언짢은 느낌을 받으셨어도 구태여 물어보지 않으시니 괜스레 찔리는 양심.
"다녀오겠습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믿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서 알기 싫었던 내용을 들으니까 그 충격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나가 닫곤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어제 얼핏 본 사진 한 장으로 가득 차 혼란한 정신. 설령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희진이가 나랑 사진을 그런 식으로 찍었던가? 연인다운 행동은 과연 얼마나 했던 걸까. 해봤자 난 고작, 용기가 없어서 실망만….
얼굴은 분명 주변을 살피며 걸어도, 속은 당장 알 수 없는 현실에 까맣게 타들어 가서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이었다.
…들어가기 싫다.
알아도 어쩔 수 없는 불길함을 지닌 채, 목적지가 가까워 짐에 따라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 싫다고 버텨봤자 어차피 언젠간 맞닥뜨릴 일이라…억지로 이동하는 몸과 싫어하는 기색이 무척이나 역력한 얼굴. 여기까지 오면서 정작 상황의 당사자인 희진이에게 상담하지 않았던 점이 우스워도, 막상 본인 앞에 서면 덜컥 겁이 나 말할 수 있을 거 같지 않았기에 차선책으로 녀석의 말이 사실인지 증거물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어떡하지?
바로 문 앞까지 당도했음에도 우유부단하게 잡지 못하는 갈피. 한 발자국 떼기가 어렵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성큼성큼이란 단어가 이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걸음걸이로 몸을 움직였을 때, 실제론 짧고도 체감상으론 몹시 길었던 시간이 지나 벨 누르기를 망설이다가….
"엇…!?"
미세하니 불확실한 진동이 느껴져 이윽고, 마치 내 심장을 두들기는 착각에 순간적으로 공포영화를 본 것처럼 놀라서 미처 겁먹을 새도 없이 굳어버렸다.
"…-쿻."
소리가 삐리리 울리고 열리자 나올 사람이 누구인지 예상했음에도 덜컹거린 심장. 혹여 희진이가 얼굴을 내미는 건 아닐까 싶은 소망 대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미건조한 표정 앞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 …."
혹시, 일말의 희망으로 희진이랑 짜고 장난친 건 아닐까 하는 기대감 또한 완전히 사라져서 가장 기본적인 예의인 인사하는 것조차 잊은 듯 뻐끔거리는 입술.
"…."
자연스레 침묵으로 마주한 시선은 형식적인 인사조차 잊게 했다.
"…-."
어째 기 싸움을 하는 것 치곤 그간의 긴장감이 무색해지게 시큰둥한 눈동자. 내가 다 기운 빠진다.
"…들어와."
이래저래 온갖 두려운 망상으로 거부감이 들끓던 마음을 가다듬으며 찾아왔건만, 실제로 대면하니 어색함만이 만연해져 듣고도 흘린 녀석의 말.
"알았어…."
그렇다고 침묵을 고수하기엔 예의가 아니라서 별 의미 없겠지 하고 대답했다.
"쿠-훗."
주변이 조용하여 등을 보였음에도 확연히 들린 녀석의 기분 나쁜 비웃음.
"…점심은?"
이어서 말문을 여는데, 생각보다 평범해서 뜻밖이었다. 그래봤자 여태의 좋지 않았던 행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 되려 조심스럽게 증폭되는 경계심.
"먹고 왔어."
정확히는 아침이었지만, 점심 전에 연락이 와서 가족과의 식사도 마다하고 왔다.
"…그래?"
아마 자신의 방으로 데려온 녀석이 때마침 몸을 돌려 침대에 걸터앉는데, 의미심장한 미소로 야릇하게 움직이는 눈가. 이런 변화가 야하다기보단 꿍꿍이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어 굉장히 불쾌했다.
"…동정이지?"
새삼 묻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기다리면 주겠거니 하는 생각에 선뜻 사진을 달라고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가당치 않은 질문은 이미 들었던 터라 부정하는 건 쉬웠다.
"쿻, 아니…."
사람을 데리고 얕잡아보는 것이 그렇게나 재밌는 걸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이었다.
"희진이가 너무 걸레라, 동정 자지론 만족 못 해서 둘이 헤어지는 건 아닐까 해서."
여기까지 와서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더군다나 그게 자기 동생한테 할 소리일까?
"그러기 전에 나랑. 연-습 하자는 거지."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꼴에 너도 남자니까. 자기 여자친구에게 테크닉 부족하다고 차이면, 엄청 상하지 않아?"
시끄러….
"자-존, 심."
닥쳐.
원체 목소리가 크지 않음에도 또박또박 말하는 모양새가 사람 열 받게 하기 딱 좋았다. 그건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고.
"뭐, 그럴 자존심이 있다면 말이지."
언니면 언니답게 동생에게 잘해줘야지 꼴사납게 지금 무슨 행패를 진짜…!
"……-사진이나 보여줘."
감정적으로 돌변하는 머리로 인해 목젖까지 올라온 속내를 꾹꾹 누르고서야 겨우 하고 싶은 말을 점잖게 내뱉었다.
"글쎄? 어쩔까나-…."
성급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은연히 화를 낸 건데, 가소롭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뻔히 보이는 턱 밑.
"주지 않으면, 가버리겠어…!"
녀석의 의도적인 비아냥과 약 올리는 말투를 자꾸 듣다 보니까 비명을 지를 때 말곤 높이지 않으려던 언성이 저도 모르게 커져 버렸다.
"쿠-훗. 그래."
이런 뻔한 도발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데….
나를 괴롭혔던 녀석들처럼 이 녀석도 내 반응을 조롱하며 즐거워한다. 시간이 지났어도 생각처럼 반격이 잘 안 되는 현실.
"자-."
떨치고 싶은 기억에 얽매이려다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니까 어제 잠깐 보고 삭제된 사진인가 싶어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걸 나 보라고 내밀지만, 경계심 가득한 상태라 조금 떨어져 있었기에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가니까 쑥하고 뒤로 빼는 손.
"보여주세요-라고 해봐."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 약 올리는 것에 특화된 듯 울컥 짜증만 돋운다.
"하-…!"
진짜 나를 개처럼 생각해서 그런 건지 이런 취급을 받아 화가 났지만, 별수 없는 게 내 쪽에서 부탁하는 처지니까….
"……후…."
겨우 저자세로 말 한마디 하는 거라며 생각했는데, 의외로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보여주세요."
뜸 들이면서도 끝내 운을 떼니까 느껴지는 굴욕감. 괴롭힘을 당했을 때와 달리 견딘다기보단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더러운 기분이었다.
"손."
이게 진짜….
적당히 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괴롭힘당한 경험이 바라지 않게 인내심을 길러줘 간신히 참고 순순히 내밀었다.
어차피 동갑이라 그냥 한 손으로 잡으면 될 텐데, 굳이 두 손으로 받는 건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일 거다.
어수룩하긴.
그걸 호기로 주머니에 넣었던 물건을 잡아 녀석이 사진에 쏠린 시선 몰래 살며시 사각으로 나왔다.
'철-컥'
스마트폰에 정신 팔린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채워진 수갑.
"어…?"
뜬금없이 울린 쇳소리에 녀석이 어리둥절하며 손을 들려는 찰나 서둘러 남은 손에도 채워버렸다. 별로 실패를 예상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성공하니까 손쉬움에 허탈함보단 해냈다는 사소한 쾌감이 언뜻.
"뭐 하는, 윽-!?"
손의 자유를 빼앗았다고 해서 아예 묶인 것은 아니기에 이대로 도망칠 가능성을 두어 얼른 뒤에서 밀어버리니까 침대를 향해 무력하게 엎어졌다. 그 까닭에 녀석이 폰을 놓쳐 벽과 부딪혔지만,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쿠힣-…!"
또래의 남자애가 자신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 없는 흥분감…! 거기다 요구하는 건 어떻게든 거절해서 점점 정복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적당히 해!"
녀석은 모르는지, 이런 불응한 태도야말로 역설적으로 반발심을 일으켜 더 그러고 싶단 기분을 무척이나 샘솟게.
"히히힣…!"
그러나 손이 묶여도 남자애라 그런지 제법 힘의 차이가 나서 반항이 거세 제압하기 어려웠다.
"끟-! 이거 놔!"
샌님처럼 생겨서는…찐따미 뿜뿜하는 것이 진짜 내 취향….
"싫-어."
수갑을 찬 부위가 앞이어서 그런지 아쉽게도 손목을 잡아 허리를 누르는 자센 할 수 없었다. 대신 말을 타듯 올라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는 녀석의 목덜미를 누르는 것도 제법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히힣-! 좋아, 더 울어줘. 응?"
거칠게 저항하는 공을 제압하는 수가 얼마나 멋지던지, 자신도 그런 사육사가 된 것마냥 허리 밑에서 발버둥 치는 녀석의 몸짓에 썩 기분이 고조됐다.
"쿻-…, 날뛰지 마…!"
망상으로는 거친 반항에 흔들림 없는 자신을 이입했으나 현실은 조잡한 저항을 겨우 붙잡는 처지. 그런데도 모양새가 대충 엇비슷해서 적잖이 만족스러웠다.
"쿠-훗!"
그렇기 해도 슬슬 녀석의 꼴사나운 얼굴이 보고 싶어져서 지칠 때까지 몸부림을 유도하다 서서히 잠잠해지자 살짝 뒤로 빼는 움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