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조잡한 덫(4)
"오빠! 정신 차려-. 웅?"
보는 내내 옆에서 장난치는 것도 초반만이었고, 무서워하는 주제에 몰입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암만 놀라게 하고 찌르거나 바짝 엉큼한 짓을 해도 겁에 질려만 하길래 토닥토닥.
"헿…고생했어 오빠."
반응하는 게 너무 귀여운 나머지 서서히 안쓰러운 모습이 드러났다. 전등은 밝아 불을 전혀 끄지 않았고, 에어컨도 그리 춥지 않게 틀었음에도 창백해진 얼굴과 등쌀에 닿은 팔은 젖은 것이 느껴져 아마 식은땀을 흘린 기색.
당분간은 공포영화 보자고 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무서운 영환 아니었는데….
"엩? 댜? 흐-진아?"
슬슬 현실로 돌아오는지 앉아 있음에도 균형을 잃어가던 몸을 추스르려 더듬거리는 손짓에 얼마나 무서웠으면 발음이 다 뭉개졌다.
"…목마르지? 마실 거 가져다줄까?"
반쯤 나간 정신이 돌아오려면 더 기다려야 될 거 같아서 기대하기 어려운 대답. 아예 대답을 듣지 않고 다녀올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사시나무 흔들리듯 떨어서 혼자 두기가 약간 불안했다. 둘만 있는 집이었단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어…? 어어 어…, 훙-. 후타하께."
초점이 풀렸음에도 간신히 끄덕여준 덕에 오빠를 제대로 앉히려 겨드랑이에 손을 넣곤 아이 앉히듯 소파와 한 몸처럼 살며시 놓으니까 다행히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알았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오빠."
그러니까, 자기 집 거실에서 오빠 잃을 걱정도 참.
"후. 웅…."
초보자에게 추천할만한 영화라고 했는데, 오빠에겐 영 아닌 모양이었다. 도대체가 이렇게까지 무서워해서 계속 내 욕심만 부려 또 보자고는 도저히 말하기 곤란한 기분. 다음부턴 진짜 보진 말고 마치 그럴 것처럼 놀리는 수준에서 끝내기로 하고 얼른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왔다.
"오빠. 여기. 아 컵!"
대뜸 음료를 내밀다 컵 안 가져온 걸 알아차리자 힘없이 받으려 뻗은 오빠의 팔이 무안해지게끔 냉큼 테이블에 놓고 주방으로 다시 분주하게.
"자, 여기 오빠!"
핼쑥해진 피부 상태 때문에 더욱 다급해져 무릎까지 꿇고서 주스를 잡아 컵에 첫 부음부터 넘길락 말락 따랐다. 겨우 흘리지 않고 건네자 계속 거두지 않고 버티던 팔이 떨어뜨릴 것 같은 불안함을 이겨내고선 입 앞으로 이동하는 손.
"하-…, 맛있어…. 고마워 희진아."
목을 축이자마자 신기하게 표정이 풀어지는 걸 확인하는데, 이 와중에 고맙다고 하는 오빠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자니 저번 주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서 아무래도 리뷰에서 강조하던 초보자용이란 추천은 거짓말인 거 같다. 한 마디로 속은 셈. 근데 그 피해자가 내가 아니라 오빠였기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응 아니야 오빠, 응…."
겨우 영화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할 수 있단 걸 처음 깨달은 탓인지 또 이런 말 하기가 무안해져서 어정쩡하니 옆으로 앉아 오빠를 봐도 난감해지는 분위기 탓에 돌려버린 시선. 달리 화제가 없을까 싶은 생각과 알맞게 티비에서 예능으로 방탈출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빠. 저거 알아?"
반쯤 남은 컵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안정을 취하길래 많이 나아진 것 같아 질문.
"방탈출…? 들어는 본 거 같은데."
대답을 들으려 곧장 얼굴을 쳐다보니까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아주 멀쩡해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정말? 저거 재밌어 보이지 않아? 히히, 우리도 한 번 하러 가볼까?"
알고 있단 사실보다 회복됐다는 점에서 속으로 작게 안도. 그러면서 지난번 봤던 광고를 보고 해볼까? 하고 마음 먹었다가 까먹었던 게 떠올라 얼른 권유했다. 어차피 오빠가 내 말을 거부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워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지만.
"…좋아. 바로 알아볼게. 하려고 한다면 언제쯤?"
아니나 다를까, 단지 의사를 물은 거뿐인데 반사적으로 폰을 꺼내 검색하는 동시에 괜찮은 시간을 물어 온다.
"움-, 지금?"
점심은 이미 각자 먹었었고, 본래 계획했던 영화는 끝이 났기에 이제 남은 할 것이라곤 귀여운 오빠를 놀리면서 장난치는 거뿐. 그러기엔 겨우 두 시간 사이의 우여곡절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럼 가까운 곳으로 알아볼게."
오빠는 벌써 그런 것 따위 떨쳐 낸 모양이지만.
"웅-!"
이상형에 한없이 가까운 오빠를 곁에서 조용히 보다 보면 성격이 느슨해져 남들에게, 친구나 언니에게조차 보여주지 않던 배시시- 미소를 편히 흘리게 된다. 여친보다 키가 작은 걸 가끔 의식하는 점이 앙증맞아서 귀염상에 딱 내 취향인 주제에 남자라고 이것저것 먼저 챙겨주려는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 이런 본심을 모르는지 사뭇 진지하여 정보 검색에 집중하는 자태가 야속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건 무슨 심보일지 자신도 궁금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이런 속마음을 들키면 혼자 빨개져 아닌 척 삐질 거면서. 나만이 몹시 괴롭혀 사랑해주고 싶은 만큼 도도하니 굴던 탓에 이랬던 실상을 알게 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창피함의 반동으로 더욱 껴안아 딸기처럼 새빨개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할 거 같았다.
"얼마야?"
열심히 찾던 손가락이 조금 길게 멈추길래 혹시 가격을 보고 굳었나 싶어서.
"그게…이만사천 원."
주저 없이 들은 가격에 눈썹을 찡그릴 정도로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훔-…비싸네."
지난번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자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전부 낼 생각을 한 터라 혼자 내기엔 조금 부담. 오빠가 내게 쓴 비용을 생각하면 못 낼 것도 없었지만, 막상 현실을 직시하니 조금 더 확실한 재미를 추구하여 좋아 보이는 것에 쓰고 싶었다.
"다른 데 찾아볼까?"
오빠도 이미 내 대답을 예상했는지, 말하면서도 다시 분주해지는 손가락.
"아니야 오빠. 방탈출 하는 곳은 나중에 가자."
돈도 돈이지만, 아까까지 정신을 못 차렸던 오빠를 데리고 몸과 머릴 쓰러 가기엔 약간 무리인 거 같아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을까?"
어쩌다 보니 항상 그랬던 것처럼 또 놀 거리를 오빠에게 맡기는 양상. 하나 내가 굳이 찾지 않아도 발상은 한정되어 멀티방 플스방 노래방 피시방 등등 커플끼리 갈만한 공간은 많았다. 대신 몇몇 곳은 미자 혼성이 불가능하여 가기 전에 미리 확인해야 할 사항. 솔직히 커플인 입장에서 그런 거 따져가며 놀러 다니기 번거로웠고, 이왕에 집도 언니 빼곤 사람도 없으니 차라리 집이 낫단 생각은 여전했었다.
"다른 거?"
그런데도 다른 곳을 찾는 까닭은 좋고 편하더라도 당장 티브이 보는 거 말곤 그다지 할 게 없어서.
"응."
오빠가 생각한 장소는 놀 거리지만, 내가 가자는 곳은 대략 영화나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는 거였다. 물론 영화는 이미 봤기에 넘어가고, 그나마 쇼핑도 사러 가는 것이 아닌 옷을 보고 구경을 하는 거라 따라오는 입장의 오빤 분명 겉으로 웃어 보여도 내심 지겨워하겠지.
"VR은 어때?"
또 내가 바라는 형태만 생각하다 처음 듣는 이름에 호기심이 생겼다.
"브이알? 그게 뭐야?"
알파벳…어떤 단어의 약자일까?
"가상현실 알아?"
가상현실? 가상? 뭔가 게임 같은 느낌이 드는데, 혹시 새로 나온 게임일까? 컴퓨터 관련?
"아니,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이 나오고, 비유하려던 단어마저 몰라 갸우뚱.
"그게, 고글처럼 된 걸 쓰면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시각적 체험을 시켜주는 건데. 나도 다큐로 잠깐 봐서 이건 영상 봐야 할 거 같아."
다큐란 단어를 듣고 따분할 것 같은 감상도 잠시, 오빠가 보여주는 영상에서 화면이 전환하자 화려하고 마치 실제로 체험하는 인상을 받자 흥미가 동했다.
"와-이거 신기하네 진짜. 재밌겠다."
빛나는 검을 들고 리듬에 맞춰 박스를 자른다거나, 광활하게 펼쳐진 장소에서 괴물이 튀어나오면 총을 써서 쓰러뜨린 다거나. 오락실에서 나오던 작은 화면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괜찮아 보여서 만약 진짜로 해본다면 몸도 움직이고 스트레스도 날릴 수 있을 거 같았다. 특히 총게임은 어린 시절 친구와 좀비 잡는 게임에 많은 돈을 투자했었던 추억이 떠올라 느껴지는 친밀감.
"그래서 이건 얼마야 오빠?"
이거라면 방탈출과 비슷하게 나와도 과거가 생각나는 친숙함에 기꺼이 낼 용의가 생겼다.
"잠시만."
그렇게 앱을 바꿔 검색하던 창으로 바꾸는 탭.
"음, 한 시간에 만이천 원."
"혼자서?"
방탈출보다야 싸지만, 고글은 일 인용이라 두 사람은 어떤지 알아야 했다.
"커플 요금도 따로 있네. 만오천 원."
방탈출과 마찬가지로 인당 요금을 받았으나 다행인 점은 추가해도 할인이 붙는다는 거. 방탈출도 마찬가지였지만, 비싼 건 엄청 비쌌다.
"어떡할래?"
사실 괴물들을 총으로 잡는 모습을 보고 혹해서 방탈출은 뒷전이라 마음은 정해졌으나 마냥 적지만은 않은 가격에 살짝 고민.
"음-…."
이럴 거면 차라리 오락실에서 어린 시절을 재연하듯 총게임 해도 괜찮긴 했지만, 이 시간대부터가 사람들로 복잡해 여기저기 치이다가 올 가능성을 또한 경험하여 그러기 꺼려졌다.
"지금 나가면 적당히 한두 시간 동안 놀다 저녁 먹고 하면 오늘 하루 유감없이 즐겼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자기보다 어린 여친에게 놀림 받을 땐 소심해지면서 이럴 때만 소신 있게 어물쩍. 이렇게까지 설득하는 오빠의 표정이 궁금해져 쳐다보니 역시나 우물쭈물한 기색으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히히히…그러게 오빠. 그럼 나갈 준비 할까?"
아무쪼록 긍정적으로 정해진 행선지에 만족하며 나갈 채비를 하기 전에 테이블을 정리하는 오빠. 이런 건 내가 초대한 내가 해야 하는데, 오빠의 배려에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연상임에도 기특하단 마음이 들어 거듭 미안함에 히죽였다.
"네 남친. 언제 와?"
이제 일어났는지 눈곱도 떼지 않은 채로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더워 보이는 체육복 차림의 언니가 이제 막 집에 도착하여 묻는 말치곤 내용이 무척이나 뜬금없게 느껴졌다.
"오빠…? 아까 왔다 갔는데?"
생각 없이 순순히 말하자마자 숨기지 않고 구겨지는 얼굴은 눈동자가 아직 빛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지 몰라 본인만 알법한 변화.
"다음은?"
오빠에게 중요하게 용건이라도 있었는지, 연이은 질문에 왜 그런 걸 묻나 물으려던 것도 미루게 했다.
"글쎄. 이제 기말이니까 시험 끝나면 오지 않을까?"
일단 뭐가 궁금한지 모르니까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 그럴듯한 이유.
"기말이 언젠데?"
내가 유월 말이라고 했을 때, 오빠가 나 끝나고 나서라고 했었지?
"아마 칠 월 초?"
내년이면 수능을 쳐야 해서 앞으로 공부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 같단 이야기에 무척 아쉬웠지만, 자주 보고 싶어도 참고 응원하기로 했다.
"…사 주인가."
공부하겠다는 말에 내가 생각했던 아쉬움과 똑같은 계산.
"근데 그건 왜?"
이렇게까지 물으니까 그 이유가 궁금해져서 참을 수 없었다. 아니, 무슨 꿍꿍이인지 모를 본뜻이.
"…오는 날 말해. 비워줄게."
오는 날? 비워?
"무슨 일로? 갑자기?"
맨날 집에만 틀어박혀 사는 집순이면서 뜬금없이….
"…아직 그런 관계는 아니야?"
그런 관계…? 아!
"아, 아니 거든!"
오빠 쪽에선 떠먹여 줘도 움직이지 않고, 나도 리드하기엔 아직 준비가.
"물론 시도야 여러 번 했지만…."
오늘도 나름 필사적으로 진행했지만, 괜히 안색만 나빠지게 했다.
"했지만…?"
잊고 숨기고 없었던 일로 넘기고 싶은 일에 말꼬리를 잡는 행패. 맨날 방구석에 있더니 갑작스레 동생 연애에 관심이 생긴 건지 흥미롭게 쳐다본다. 느닷없는 관심에 언니 행세를 해볼 심산인지 생색을 내려는지 모를 의도.
"묻지 마…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방금 오빠와의 데이트는 좋았지만, 초반의 지우고 싶던 창피함도 남아 있었다.
"쿻…보아하니 키스도 안 했겠네."
…지금 연애 한 번 못 해본 주제에 비웃었어?
"언니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자기도 처녀인 주제에! 게다가 언닌 모솔이잖아!"
사실 언니가 처녀인지 모솔인지 불확실했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런 소식은 전혀 없었다. 그보다 동생의 연애사에 함부로 참견하려 드니까 가족이어도 거슬리는 무례함에 그대로 끓어올라 발끈.
"난 그래도 오빠랑 알콩달콩 잘 사귀고 있거든!"
안 그래도 분위기 좋다 말다 하다 오빠가 먼저 손잡은 것이 최대라 아무리 다가가도 내가 먼저 키스할 용기가 없어 신경 쓰던 거 겨우 잊으려 했었는데! 갑자기 웬 시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