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조잡한 덫(1)
"아-응…."
자기 언니가 여동생의 흉을 보고 차마 털어놓지 못할 대화가 오갔다고 할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변명을 하자니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고.
"혹시, 돈…때문이야?"
"…엉?"
화제를 넘긴단 선택진 정말로 생각지도 못해서 거짓말을 할지 솔직하게 말할지 고민하는 차에 희진이가 꺼낸 이유는 지금의 고민 탓에 잠시 잊었던 이전의 걱정이었다.
"우리가 만나면 항상 오빠가 돈 다 냈잖아. 그게 마음에 걸려서 이렇게 간식이나마 내가 내는 건데…그래도 위험하지 않아?"
예의상 해본 말이라 해도 감동인데, 설마 찔러 본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을 줄이야.
"아, 아니야. 괜찮아.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뭐."
딱히 알바를 제대로 해본 것도 아니지만, 부모님과 성적을 가지고 협상해서 계산적으로 받고 있었다.
"그리고 나 지금까지 저금 잘해서 용돈 많이 모아놨어."
자진하여 알아봐서 적금도 들었고, 특히나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말씀드리니까 기뻐해 주시며 지원도 아낌없이. 금전적으로 빼앗길 당시 그 서러움을 알아버리니까 돈에 관해선 당하기만 하다 받거나 모으는 일엔 조금 영악해졌다고 봐도 될 거다. 지난 왕따 경험을 살려 부족함을 인정했을 때 처음엔 다 무너질 줄 알았으나 사실은 그것이 얻어가기 위한 준비라는 것을 깨달은 뒤로 머리가 굳은 느낌이었으니까.
"괜찮아.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그렇다고 거짓말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 싶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협상과 주제 파악을 통한 이익을 이끌어 갔으니 내 딴엔 사회 경험을 일찍 하는 거로 생각했다. 물론 진짜 그런 걸 체험하려면 알바를 하는 것이 빠르다는 걸 알면서도.
"그보다 참! 화장품 비싸지 않아? 그것도 선물해줘야 하는데 말로만 하고 정작 해주질 못했네…."
제 입으로 영악하다고 말한 것 치고는 아주 어설퍼서 벌써 이렇게 횡설수설해버린다.
"나도 내가 좋아서 화장하고 오빠 만나는 거야. 서로 똑같네? 히히."
해주지 못한 아쉬움을 괜히 꺼내놓곤 그것이 실수인 걸 깨닫자 지지 않고 대답하는 재치에 커지던 미안함이 멈칫.
"그러니까 너무 오빠만 부담하려고 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오빠가 인형을 선물해 준다거나, 맛있는 거 사주고 놀러 갈 때 내가 관심이 생기면 다 해주려는 거 좋아. 기뻐. 어엄-청!!"
이렇게 진지하게 희진이와 대화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런 자리라던가 상황이 아니었는데, 갑작스러워도 마음만큼은 진심이 느껴져 평소 장난치듯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받기만 해서 끝이 좋았던 적은 없었거든. 원래 영화도 이번엔 내가 예매했어야 했는데, 오빠가 자리가 급해서 이미 예매했다니까 이건 넘어가고."
실제로 돈 준다고 하던 거 한사코 거절하니까 마지못해 수긍했었지.
"연인이잖아. 은밀한 비밀까지야 공유할 수 없겠지만, 같이 하려는 거나 그럴 수 있는 건 공유해줬음 좋겠어."
희진이의 말을 차분히 들으니까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설득한 것도 바깥에서 놀면 돈이 많이 든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이제 더우니까 집이 좋다고 했지만, 분명 학생 신분에 여유롭지 않은 지갑 사정을 헤아려준 걸 테지.
"…응."
정말 느닷없는 진솔함이었지만, 다른 거 없이 희진이가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주고 있었다는 것에 감동했다. 그동안 정말 날 사랑하고 있는지 대해서도 많은 해소가 됐고.
"…고마워 희진아."
이러니까 자꾸 괴롭혔던 의심이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아졌다. 희진이에 대한 생각. 나 말고도 만났던 남자에 대한 질투나 그런 건 이제 그럴 수 있을 거 같았다.
"히히-…알았으면 됐어 오빠."
그러나 지금은 그 상대가 나이기에 내가 잘해줘야지.
"그리고…."
만약…지금 나 말고 딴 남자를 만나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면 배신감이 크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확실해졌을 때였다.
"나두 고마워…오빠."
그 녀석의 증거도 없는 말 따위보다 지금 앞에 있는 희진이를 믿어야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희진이의 남친인 나의 의무이자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으니까.
정신을 뜨고, 눈을 차린다.
"…."
부스스하게 침대에서 벗어나 바닥에 바지 밑단을 용케 넘어지지 않고 질질. 걸으며 지이익 하고 상의의 지퍼를 내렸을 땐 이미 욕실 앞이라 익숙한 듯이 옷을 마저 내팽개치곤 알몸으로 들어갔다. 동생과 달리 화장이나 미용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들어오면 우선 거울을 쳐다보게 되는 건 아마 유전자 단위로 각인 된 버릇일지도.
"-…."
언니인 내가 봐도 미인상의 희진이랑 자매가 맞기는 한지 나름 반반한 얼굴인 주제에 그 이왼 유감스레 달라 빈약한 체형…내심 콤플렉스인 걸 부정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내색하긴 뭣해서 반사적으로 가슴을 흘겨보곤 한숨을 삼켰다.
"…-."
샤워기 호수 옆 선반에 함초롬히 놓인 샤워용품은 전부 희진이가 고른 것들…. 나는 해봤자 샴푸가 끝이라 린스니 컨디셔너니 트리트먼트니 하등 많기만 한 용품에 어쩔 수 없이 찌푸려지는 미간이었다. 자기가 쓰는 화장품이나 세면용품을 용돈으로 충족하기엔 비싸 벅차다며 생활비 카드를 준 게, 정작 나는 쓰질 않으니까 생활비 명목으로 소비되는 것이 썩 좋지만은 않을 수밖에. 세면도구나 미용에 관련된 물건도 그렇고, 밥을 해주지 않으니까 포함한 식비마저 생활비 항목으로 포함해 카드를 주는 대신 가계부를 작성하란 조건을 붙인 것이 조금이나마 돈 씀씀이를 헤프지 않도록 유도하는 거 같아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씁-."
사실 샤워도 몸을 씻기보다 일어나기 위해 하는 행위 중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비누로 몸을 씻기엔 거품이 잘 나지 않아서 제대로 씻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다. 복잡한 건 싫은 주제에 이런 건 또 까다로워서 머리는 샴푸, 몸은 바디워시로. 적당히 끝났다 싶으면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대충 닦곤 머리 말리는 것도 귀찮아 선풍기 앞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점점 정신 차리기를 기다렸다.
"………킇-."
어쩌면 샤워보다 선풍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배는 차이 날지도. 이러다가 대략 말랐다 싶으면 거실을 어슬렁거리다 뭘 먹을지 고민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
여전히 반쯤 감긴 눈으로 시계를 보니 아침이라기엔 지나친 시간. 어차피 일상이라 아랑곳하지 않고서 머리에 수건을 올린 채 상자에서 아무렇게나 집은 과자 하나를 들고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잡았다. 신작 애니나 챙겨 볼까 하며 덕질에 특화된 사이트에 접속하려고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폰.
'코-톡'
공교롭게도 울린 알람의 정체가 누군지 뻔해서 희진이인 걸 예상하며 확인했다. 그러다 오전이 아닌 저녁이 지난 시각이란 걸 깨닫고 슬며시 드는 걱정. 동정 녀석의 행동거지를 보면 이렇게 늦게까지 데리고 있을 강단은 없어 보였다.
"…-."
친구랑 놀겠다고 외박을 하게 되면 언질이라도 했으면서 조용한 걸 보면 여전히 데이트 중인 걸까. 사이는 평탄치 않아도 일이 생기면 꼬박꼬박했었기에 늦게까지 뭐하냔 토-크를 해야 하나 싶었다. 물론 지금 보낸 연락의 내용을 본다면 어떻게 처신할지 확신이 서겠지.
─2019년 6월 6일 목요일─
희진이
[지금 들감]
[머 사가?]_오후 9:47
저녁은 알아서 먹었겠지. 항상 그랬으니까. 그나저나…늦게까지 놀았네.
잠들기 전에 차근차근 동정에게 작업 들어간 거까지 기억이 났다. 그러던 중 희진이랑 먼저 섹스라도 한다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섹파를 만드는 계획이 틀어져서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으려나. 그래도 오늘은 영화만 보러 간다고 했으니 일을 치르진 않았을 거다. 사귄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보아하니 희진인 곧 생리일 테고, 염려하던 것과 달리 섹스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1_오후 9:50_[과자 아무거나]
머리론 이미 함락하여 아무 때나 부르면 오는 육노예로 전락한 동정을 생각하며 잇자국 낸 과자 하날 들면서 답장.
희진이
[ㅇㅋ]_오후 9:50
순식간에 1이 사라지며 돌아온 대답에 별생각 없이 원래 하려던 사이트로 접속하여 새로운 정보나 추가 커플링 혹은 동인지 및 성우 활동 등 소위 덕질이라 일컫는 것에 집중했다.
쓸쓸한 복도에서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의 주인공은 하나밖에 없어 신경 끄니까 곧 다가오는 익숙한 발걸음.
"나 왔어 언니."
들어오면 인사할 것이 분명했고, 또 그랬기에 대충 모습을 쳐다보는 거로 답해주며 눈을 마주치자 끄덕여줬다.
"히히…밥 먹었어?"
묘하게 살가운 태도에서 느껴지는 기시감. 남친 만난다고 작정하며 화장품을 샀던 주제에 또 무언갈 요구하려고 빌드업하려는 거 같았다.
"그걸로 돼? 내가 언니 좋아하는 아몬드 빼빼로 사 왔다."
식사했냔 말에 먹고 있던 과자를 보여주니까 하는 말은 쓸데없는 걱정이었고. 때맞춰 부족했던 아몬드 빼빼로를 가져와 밖에 나가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지금 안 먹을 거지."
당연한 질문에 살며시 끄덕. 의문형이 아니라 말투에서부터 내가 안 먹을 거란 걸 알면서 그런다.
"헷-그럼 과자 박스에 넣을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방으로 가 이미 넣었으면서.
"우후훙, 언니-이."
외모가 예뻤어도 소름 끼치게 징그럽게 부른다. 저녁은 먹고 왔을 테니 시켜 먹자는 건 아닐 거고, 콧소리로 되지도 않는 애굘 부리는 건 아마….
"…용돈?"
얼마 있지도 않은 소거법을 통해 확률이 가장 높은 원인을 말했다.
"웅…에헤헤헤…."
확실히 달도 지났으니…가 아니고 매월 초 자동이체 될 텐데, 벌써 부족한가? 아니면 따로 모아두려고?
"…안될까?"
남들이 보면 귀엽게 보일 수 있겠지만, 언니 눈엔 매달 통장에 쌓이면서 추가로 요구하는 각설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구태여 흠집 잡아 훈계하기엔 내가 글러 먹지 못한 인간이라 귓등으로 듣지도 않을 텐데.
음…….
"…너 주변에 남자애들 있지?"
동정에게 블러핑으로 상대하려던 차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있지? 왜?"
왜…거기에 대한 답변은 상정하지 않아서 뒤늦게 굴리는 머리.
"너랑 같이 있는 사진 찍어서 보내줘."
가능하면 잘생긴 애들로.
"사진? 왜?"
보낼 수 없어서 가지는 의문이 아닌 순수하게 궁금해서 되묻는 목소리였다.
"…소설 쓸 때 필요해."
이런 변명이 먹히기엔 명분이 모호해서 그런지 갸우뚱.
"…그래? 알았어."
그래도 더는 캐묻지 않고 알았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가능하면 내일 바로 보내줘."
기왕 하는 거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급해?"
아…, 너무 서둘렀나?
오히려 빨리해달란 말에 추궁을 자초했다.
1_오후 10:02_[50,000원을 받으세요.]코코넛페이
'코-톡'
"돈 보냈어."
이럴 땐 역시 못 들은 척 돈을 보내면 의혹도 언제 그랬냐는 듯 지우고서 군말 없이 행동해준다.
"아! 고마웡 언-니."
돈 보낸 사실을 알자마자 다가와 스스럼없이 껴안는 기지배.
'코-톡'
희진이
[50,000원 받기 완료!
받은 코코넛페이머니는 송금 및 오프라인
결제에 사용 가능하며, 리워드도 받을 수 있어요
{내역 보기} {리워드 확인}]코코넛페이_오후 10:03
하나 목을 휘감겨 안긴 채로 느껴지는 풍만함은 같은 여자 끼리라 해도 좋으면서 동시에 나는 이러지 않은 사실에 울컥 짜증이 났다.
1_[남자애들이랑 많이, 친하게 지내는 사진일수록 좋아.]
1_[껴안는 다거나]
1_오후 10:05_[스킨십의 강도가 높을수록 용돈 더 줄게]
그래서 조건을 붙이며 자잘한 요구사항과 함께 붙은 보상.
이거 보고 얼른 떨어져.
희진이
[웅ㅎ아라썽♥♥♥♥♥♥♥♥♥♥]_오후 10:06
"…."
이걸로 그럴듯한 증거는 준비됐다. 솔직히 이런 어수룩한 거로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지만, 혼자 방에 끌어들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쳇."
희진이가 떨어지고 이제 자기 방으로 가자 참았던 불만을 작게 표출했다.
"후-…."
남자하고 인연도 없고 욕심도 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취향이 같은 모양. 수단이 더럽단 건 자각하고 있긴 해도, 지가 어쩔 건데. 그동안 언니가 많이 봐줬으니까, 이번엔 언니에게 양보…빌려줘야지.
"…쿠-훟."
내가 원한 건 써보기도 전에 희진이가 사용한 뒤라 이번에야말로 꼭, 희진이가 사용하기 전에 먼저 선점이란 걸 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