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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타념(2) (8/107)



〈 8화 〉타념(2)

비싼 돈을 준 것 치곤 썩 좋지도 안 좋지도 않은 애매한 자리여서 걱정하던 것치곤 감상엔 큰 지장이 없었기에 안심하는 한편, 만족스러운 희진이의 표정을 보니까 이런 얕은 불만이 사그라지도록 충족해졌다.

"아, 재밌었다."

노래도 좋았고 연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희진이가 즐거워했기에  놓고 할 수 있는 진심 어린 말.

"히히히 나도 재밌었어 오빠."

함께 먹은 팝콘과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희진이가 동조해줬다.

"응-…."

마치 밀린 일을 끝낸 듯, 개운한 기분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치는 눈빛.

"웅-…."

비록 사소한 여운이 남았어도 마냥 싫지 않아서 마치 동화를 보던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굳이 짧은 소감 나누지 않은 채 걷기만 해도 좋은 고양감.

"…?!"

가볍게 동감하며 나가려다 손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 확인하니까 끌어안고 싶은 설렘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수줍은 미소의 희진이였다.

"이히히히."

고작에서 겨우, 손잡는 것이 기어이던 나라서 흠칫 커진 눈동잘 보이니까 희진이가 배시시 웃길래 쑥스러움에 빨개져 돌리는 고개. 비슷한 시도가 있었던 아깐 로맨스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빌려 상영 중 용기 내 잡으려던 손을 끝내 잡지 못해서 아쉬워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꼬-옥하고 잡히니까…너무 좋았다.

"헤헤-…."

아직 표현이 서툴고 이런 접촉이 어색해서인지 모자란 웃음소리는 기뻤음에도 어째 부끄러워 보이지 않으려 하는 모습과 그걸 눈여겨보는 시선.

"…귀여워."

나보다 어린 여자애에게 귀엽다는 말이 단도직입적으로 좋아졌다고…머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헤벌쭉한 표정 들키고 싶지 않아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돌리고 있었어도.

"오빠-."

"…흐, 읗?"

손의 감촉이며 옆의 사랑스러운 시선이며 행복감을 추스르지 못하던 탓에 희진이가 부르자 무심코 가다듬지 못한 상태에서 우스꽝스러운 발음으로 대답해버렸다.

"히힣, 그렇게 좋았어?"

불렀으니까, 응답하려고 어쩔 수 없이 칠칠치 못하게 풀어진 얼굴 근육을 보여주자 내심 뭐가 기뻤는지 싱긋 웃고는 매만지는 손길. 그래봤자 잡은 손을 주무르는 것뿐인데도, 묘한 흥분감에 하마터면 얼빠진 소리를 또 낼뻔했다. 저항이란 단어가 어울릴지 몰라도, 영화관에서 나올 때까지 희진이의 어설픈 손 마사지 공격에 꼼짝없이 해롱해롱하는 건 사실이니까.

"…흫-. 응…!"

이럴 때 야릇한 기분이 들어서 진정하려고 침을 꿀꺽 삼킨 뒤 심호흡에 힘차게 대답했다. 정작 나온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어도.

"힣-…나두."

영화가 끝나고 오붓하게 걷다가 방심해서 어떤 자극을 줄지 대비하는데, 오히려 희진이가 슬쩍 옆면을 보이며 걸었다. 적극적으로 놀림 받을 대비를 하다가 오히려 흡족하여 빠르게 걷다 보니 처량하게 따라가는 처지.

"…헿."

생각해보면, 희진이가 대담하게 굴었어도 항상 기세등등했던 건 아니었다. 되려 여자아이답다면 무척이나 그러했던 모습들. 자그마한 선물에도 기뻐하고, 내 반응을 즐기려고 일부러 적나라한 발언을 하다가 간혹 스스로 말해놓고 창피해선지 홍조를 띠던 적이 아예 없진 않았다. 다만, 반대로 내가 희진이에게 그걸 짚고 가기엔 그럴 용기도 없거니와 장난의 조절을 할  몰라서 차라리 다물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머 먹을까 오빠?"

연애 초기 넘어갔던 미묘한 변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니까 그럴듯한 생각에 잠기다 멈춰버린 곳은 식당투성이의 층이었다.

"어, 저녁?"
"웅. 저녁!"

혀가 즐거워질 상상에 들떴는지, 손을 놓고 나아가는 희진이. 이별하는 것도 아닌데 아쉬움에 잡지 못한 손길이 향한 곳엔 희진이가 어느 식당으로 들어갈지 기대감에 여기저기 살피고 있었다.

"영화는 오빠가 예매했으니까 저녁은 내가 사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분주히 돌아가는 고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신나 하는 희진이에게 방해되지 않게끔 곁에서 느긋하게 섰다. 별로 가리는  없기에 희진이가 먹고 싶은 거라면 뭐든 좋았으니까.

"치-. 내가 물어봤잖아 오빠."

아차, 이럴 땐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기보다 어떻게든 대답해야 했는데….

"어, 어…그랬지."

좋은 예시도 있었잖아. 네가 먹고 싶은 거 다 좋아…라고.

"난 희진이가 먹고 싶은   좋아."

여자의 물음은 항상 떠보는 거란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감상에 젖어 더뎌진 사고라 적당히 얼버무렸는데, 무난해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 대답에 안심….

"안 돼!"

하나 단호한 거부에 철렁했다.

"오빠가 사줄 때 내가 골랐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오빠가 골랐으면 좋겠어."

부정하는 표현에 내가 어떤 걸 잘못했나 한창 복잡해지려던 찰나, 이유를 알고 나니 괜스레 히죽. 표정마저 장난스럽게 투정하는 터라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했나 싶었다.

"헷…그럴까?"

여자친구에게…그것도 연하에게 잡혀 사는 모습이 남자로서 자존심이 있다면 좋지 않게 받아들일  있겠지만, 과거 괴롭힘을 당했던 것에 비하면야. 하물며 이건 서로 애정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니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달이고, 정도도 심하지 않아 당하는 상황에서 싫기는커녕 즐겁기만  상태. 처음엔 약간 트라우마가 왔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근데 통금 시간은? 너무 늦지 않았어?"

그래도 이리 늦은 저녁까진 생각하지 않았기에 걱정스레 살며시. 예매도 여유 없는 평일 늦은 시각이라 하교 후 겨우 맞춰서 도착하느라 다소 고생했을 거다.

"으-! 고지식해!  가끔 오빠의 그런 애늙은이 같은 발언을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이런 걱정이 괜한 염려였는지 딱 잘라 말하니까  무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적극적으로 내게 맞춰주는 행동에 의문이 들었으나 그냥 오늘이 유난스러울 뿐이라고 수긍했다. 지난날에야 내가 해주고 싶어 해준 거였고 희진이도 상식선에서 요구하며 서로 주고받았으니까 공포영화를 보자는 것만 빼면 딱히 이상한 건….

"오빠가 연상이라고 어른처럼 굴고 싶은  알겠지만, 방금 건 진짜 꼰대 같아서 싫어! 난 오빠의 귀여운 얼굴처럼 앙증맞게 행동했으면 좋겠단 말야."

……전혀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 응…미안."

직설적인 화법도 사랑스러운 외모로 하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다만, 짜증을 불러일으켰단 사실이 미안할 따름.

"흥…그렇다고 너무 기죽지 마 오빠. 오빠가  배려해준  고맙게 생각하니까."

겨우 이런 거로 시무룩해지자 내심 미안했는지 말투가 상냥하게 변했다.

"그러니까…이번 기회에 오빠가 뭘 좋아하는지도 알아야겠는데? 맨날 나만 맞춰주려고 하잖아."

불만이 생기면 바로바로 말하면서도 화제마저 자연스럽게 넘기는 능숙함.

"으응…."

하나하나 연애를 공부하고 배워가는 나와 달리 능란하게 다루는 모습이 썩 싫진 않았지만, 문득 잊으려 했던 그 녀석과의 코-톡이 떠올라 무심코 연상해버린 열등감은  몇 번째일까였다.

나 이전에도 여러 명을 만났으니까 이렇게 익숙한 거겠지? 녀석의 말처럼….

"…빠."

그런 추잡한 생각을 하자 좋았던 것도 누그러져 이런 생각이야말로 스스로 좀먹고 가슴 문드러지게 하는 걸 몰랐다.

"오-빠?"
"어, 엉?"

나쁜 생각을 지우려 살짝 찡그려 눈을 감다가 부르는 목소리에 하는 대답.

"내가 말이 좀 심했지? 미안해 오빠. 친구들한테도 너무 쉽게 말하는  아니냐고 지적받긴 하는데, 히히…성격이라고 변명하면 기분 나쁘려나?"
"아니 아니야! 기분 나쁘긴 무슨…! 괜찮아! 그리고, 희진이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니니까."

한참 나쁜 생각에 짓눌려 희진이와 대화하고 있음에도 딴생각에 분위기를 망쳤다.

"나도 자주 우물쭈물하고 소극적이라고 스스로 다그치는 걸…."

그렇기에 환기하려 다짜고짜 고백하는 수치심.

"희진이는 하고 싶은 말은 꺼낼 수 있잖아.  그걸 대단하다고 생각해."

거기서 나아가 후회스러운 기억마저 떠올리게 되었다.

"그에 비해  용기도 없고 말도 잘 못 하고…."

자조적인 웃음조차 식어서 씁쓸해진 과거. 전혀 웃을 수 없음에도 자신을 비웃는 행위가 오히려 껄끄러운 회상을 진화하는 소화기 역할을 하는 자체야말로 모순이자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날 도와준 친구를 정작 난 도와주질….

"떽-! 스돕!"

점점 어두워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되려 잠식하려던 찰나 희진이의 검지가 코앞에서 날 가리켰다.

"나 배고파 오빠. 얼른  먹으러 가자. 설마 여태까지 고르지 못한 건 아니겠지?"

자학의 늪에 빠지면 여러모로 집중하기 어려워져 고맙게도 사전에 차단해주는 지당한 지적.

"그, 그럼, 당연하지…."

그런 희진이를 위해서라도 얼른 잡념을 지우고 지금에 몰두해야 했다.

응, 모처럼의 데이튼데 마무리까지 잘해야지.

"음-…일단, 가면서 살펴보자."

대답은 그렇다고 했어도 그다지 식욕을 자극하는 곳은 금방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여긴 영화관 중에서 규모가 상당한 곳이니까. 아예 두 층이 식당이라 층별로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웅-! 이히히-."

어느새 방긋 웃으며 사이좋게 걷기 위해 팔짱을 끼는 희진이.  풍만한 감촉에 재차 기분이 상기되지만, 좋으면서도 부끄러워 배를 채우기보단 무언가 가볍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음-…저긴 어때?"

오른손잡이라 당연하게 들어 올리려다 가슴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대신 드는 왼팔.

"카페?"

검지가 아닌 손바닥을 펴서 가리키니까 똑같이 향한 시선에 그곳이 뭔지 알면서도 질문하는 건 정말 몰라서였을까? 아마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 식사보단 간식에 가까운 걸 파는 곳을 고르니까 목소리가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을 거다.

"응. 팝콘 먹어서 그런지 그렇게 배가 고프지는 않아서."

희진이의 씀씀이로 내가 좋아하는  먹자고 했지만, 그런데도 눈치를 보는  천상 그러했던 성격 탓에. 영화를 보며 팝콘도 먹었거니와 그로 인해 배가 차 듬직한 음식보단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걸 먹고 싶단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며 나는 음료, 희진이는 케이크를 먹으며 여유롭게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것도 좋아 보였다.

"희진이는 배고파?"

물론 희진이가 허기지다 하면 식당으로 가겠지만.

"으, 응. 조금."

인터넷에서 봤던 여자의 식사 배와 디저트 배가 실존한다는 것을 희진이와 데이트하면서 이미 체감했었다. 솔직히 나보다도  먹었기에 보기는 좋았으나 본인도 그걸 의식하는지 가끔은 억지로 내게 음식을 먹이는 일도 번번이. 그러면서 변명으로 혼자만 먹는 모습이 분하다고 말하니까 또 그런 모습이 제법 귀엽기도 했다.

"보니까 저기 케이크도 맛있어 보이는데, 아니면 밥 먹을까? 저녁이니까 조금 기름기 있는 음식도 괜찮을 거 같은데?"

신경 써주는 희진이에게 말은 내가 먹고 싶은 대로 가겠다곤 했지만, 끝내 희진이 위주로 행동했다는 것을 표현하고 말았다. 이런 행실이 평소 나보다 남을 생각해버리는 과한 이타심도 있었지만, 실제로 진짜 팝콘 때문에 다른 요리는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 하는 말. 물론 희진이에게 이런 내 상태를 설명해도 뇌절이라 쉽게 수긍하지 못할 것을 겨우 한 달 짧은 기간 사이 많이 배웠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어수룩함은 쉽게 떨칠  없어서 자주 같은 실수를 반복하긴 해도.

"오빠가 좋다면 나도 좋지만…."

몸에서 요구하는 것을 무시한 채 애써 희진이를 생각한 발언이 횡설수설한 생각을 고이 정리한  알아주면 좋겠다고 바란 적도 있었다. 전부  이기심이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건 지금 내가 고른 곳에 가겠다고 했어도 막상 장소를 선택하니까 말끝을 흐르며 다음에 나올 말이 몹시 신경 쓰였다.

"…살찌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할까 심각해지려다 정말 곤란한 단어가 나와서 열심히 굴리는 머리. 인터넷에서 봤던 문제인 만큼 정답도 많았으나 그게 희진이에게 해답으로 통할지가 문제였다. 검증되지 않은 답만큼 섣불리 저지를 강단도 없었으니.

…될 대로 되라지.

"어, 어차피 먹어도 가슴만 찌잖아?"

사람은 사건에 직면했을 때 재빨리 해결하려 아닌 거 같아도 내지르는 머릿속의 답변이 있다고 했다.

"읏-…!"

그래서 인터넷에서 봤던 글을 보고 써먹을까 말까 열 번 고민했던 문장이 머리부터 거친 것이 아니라 불쑥 튀어나와 말하면서도 소스라치게 당황하는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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