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저급한 유혹(1)
"공포영화느은?"
지긋이 쳐다보는 투정 어린 눈빛 속에 듬뿍 담긴 장난스러움을 엿볼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대답을 어영부영 넘겨도 되는 것은 아니기에 무서운 건 변함 없었다.
"그, 저…덜 무서운 거로, 부탁할게…."
최대한 고민해서 대답했다는 어조와 함께 강아지가 꼬리를 내려 깨갱한 것처럼 추욱 늘어지는 어깨는 마치 항복한다는 몸짓을 최대한 강조하여.
"이히히. 알았어 오빠. 기대해도 좋아."
그제서야 만족했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하기 껄끄러웠던 질문을 그만두었다.
"그럼 오빠, 잠깐 나…다녀올게."
공포에 벌벌 떨던 내 반응을 즐기며 실컷 웃은 나머지 통보하고 일어나 서둘러 떠나가는 모습.
"응…다녀와."
일방적이기만 한 태도에도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당하면서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아…후-!"
한숨이 한 번으로 족하지 않아 더불어 쉬는 숨. 사귀는 사이니까 만나서 이러는 건 나쁘지 않아 좋았다. 이래뵈도 본심이기에 어느 정도 받아줄 수 있었으나, 매번 이러면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건지 시험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특히 모솔이었던 나와 달리 남자 다루는 것에 능숙한 행동을 보면 내가 처음이 아닐 거란 복잡한 심경을 겨우 감출 수밖에 없는 못난 열등감. 정말로 이런 날 좋아하는 게 맞나 싶은 의문 자체가 편협하단 걸 머리론 알아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사실 감추려 애써서 모르고 있을 테지만.
"…짜증 안 나?"
"으-히익!?"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놀라 미끄러져 겨우 테이블을 짚고 돌아보니까 희진이의 언니가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쿱-."
그러다 보게 된 건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얼굴에 씨익-하고 올라간 왼쪽 입꼬리.
"벼, 별로 짜증 같은 건 전혀…."
어찌 됐든 물어봤으니 대답하면서도 상대하기 어려웠기에 나를 비웃은 상대로 금방 의기소침해졌다.
"…진짜 짜증 안 나?"
아니라고 했어도 되묻는 걸 보면 짜증 나지 않다는 말에 확신이 없어 작아지는 목소리가 의심스럽기 때문일지도.
"항상 이래서, 대수롭지 않으니까…."
희진이처럼 만족할 때까지 말꼬리를 잡는 건 아닐까 지레짐작하여 대답에 사족을 붙였다. 그러다 보니 변명이 되어버렸지만.
"쿠-훕!"
그런 실책을 대놓고 비웃으니까 마음이 씁쓰름해진다.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나름 고민하니 동생을 아껴서라기엔 행동이 너무 가벼워서 지금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태도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따름. 애초에 자매여도 희진이랑 각별한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초면에 고작 이걸로 판단하긴 성급했어도.
"광대."
그러다 이어지는 단어에 설마 나를 지칭하는 걸까 싶어 그 의미를 해석한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응?"
당연하지만, 몰라서 대답한 게 아니라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궁금했기에 짧아진 목소리.
"너-광대 같다고."
보다 더 짧은 입 모양으로 헷갈리지 말라고 아예 검지를 펴서 나를 가리킨다.
아까도 그랬지만, 오늘 첫 대면이면서 함부로 내뱉는 건 정말이지….
"오늘, 처음 보는 사이면서 그런 마른…너, 너무하지 않아?"
따돌림당할 때 더한 욕을 들었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손가락질하며 언급하니까 반박하고자 하는 문장이 매끄럽지 못했다. 최근 희진이 덕분에 장난이란 낱말과 친해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재를 뿌리듯 악몽이 떠오르는 손짓. 거울을 보지 않았어도 안면에 주름 생기는 느낌이 확 들어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
그러나 침묵으로 일관해서 무시당하는 거 같아 점점 욱해지는 성질. 더는 과거의 괴롭힘만 당하던 내가 아니었다. 이젠 여자친구도 생기고 스스로 남자 노릇을 해야 할 때. 일부러 져줄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분명 얼마 가지 않아 나약한 남자 취급받아 질려서 차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며, 몇 살이야…?"
그렇게 마음먹고서 기껏 꺼낸다는 소리가 나이…스스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일수록 나이를 들먹인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저지르는 자신이 한심하고 어쩔 수 없어 이따금 스며드는 약간의 자괴감. 그나마 한 가지 희망적인 관측은 한 살 차이로 내가 오빠일 수 있었다.
"쿳-!"
민망한 추태를 여지없이 드러낸 결과, 나름 진지한 얼굴로 한다는 소리가 웃겼는지 비웃는 걸 전혀 숨길 생각 없어 보이는 녀석. 실제로 우스워도 웃음을 참는 예의란 게 존재했다. 예를 들면 의도치 않게 실수하는 사람을 보고 나무라지 않는다거나, 저도 모르게 빵 터지려고 할 때 애써 참는 건 그 사람이 무안하지 않기 위한 선의. 막역한 사이일수록 장난이 짓궂어질 수 있어도, 녀석과 난 친구도 아닌데다 무려 초면이기까지 했다.
"…동갑."
용기 낸 만큼 상황이 무난하게 흘러가지 않아 뻘쭘해진 등줄긴 식은땀만 흘리더니 기다리던 녀석의 대답에 흠칫.
"정말…?"
애초에 희진이보다 동생으로 보이는 체격이라 믿을 수 없어서 재차 확인하는 물음에 귀찮다는 듯이 끄덕이곤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엇-, 뭘…!?"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부족해도 나름 여자아이라고 급격히 가까워지니까 코끝이 아려와 피하기 어려운 속도에 그대로 커지는 눈동자. 천연 희진이처럼 돌발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헛바람을 삼킬뻔한 건 숫기 부족한 성격도 한몫했다.
"아이디."
아무리 여자친구의 언니라지만, 갑작스러운 스킨십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피하려고 반쯤 다리를 펴 물러나니까 대뜸.
"…응?"
딱히 해코지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자 반대로 무슨 의도인지 궁금해져 도망가려던 몸을 추슬러 소파로 다시 앉으니까 내미는 폰에 옮기는 눈길.
혹시 친추 하고 싶었…?
"어…?"
'코 토-크!'
데면데면한 채로 어서 적으란 압박감에 폰을 집어 비번을 풀자 바로 빼앗겨서 덧없이. 이윽고 멍청한 주인 손을 떠난 폰은 마치 당하고 난 뒤의 사건을 야기하는 것처럼 새로운 알람을 울렸다.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이니 메시지에 주의하세요.]
─2019년 6월 1일 토요일─
by특별공수
[안녕]_오후 5:11
"…."
그러고선 용건을 다 봤는지 가져갈 때와 동일하게 가벼이 돌려주는데, 이젠 허탈한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만치 어이가 없어 녀석과 폰을 번갈아 보다 뭘 했을지 궁금해 화면을 보니까 기가 막혀서 단절된 음성…. 도대체가, 말도 안 나오는 방식에 제 딴엔 항의의 의미로 바라보니까 여전히 어쩌라는 식의 태연함으로 일관했다.
"함상명…."
거기다 내 이름까지 말하며 확인하는 모습.
"다음에 올 때 연락해…."
그리 내뱉고는 이걸로 용건은 끝났는지 대답도 듣지 않고서 가버렸다.
"뭐야 대체…."
그렇게 불만을 잔뜩 만들게 한 대상이 떠나니까 느릿느릿 사태에 대해 의문을, 함축하여 구시렁거리는 건 면전에선 못했으니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 황당한 과정을 머리가 받아들일 수 없어 보였다.
희진♥
[저기..있잖아 오빠]
[괜찮으면 내일도 놀러 오지 않을래..?]_오후 11:17
오늘 방문하긴 했어도 그건 다 희진이가 나를 설득을 한 결과였다. 그래선지 오늘 갔음에도 또 초대하는 말투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주저함이 얼핏.
오후 11:17_[나는 좋은데, 부모님은 뭐라고 안 하셔?]
암만 그래도 첫 방문에 이틀 연속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집에 놀러 가는 건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서 저번 주부터 꼬시던 희진이는 지금의 요청이 어렵다고 생각하겠지만, 반대로 나는 처음이 어렵지 이후부턴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짐짓 가지 않을 거 같은 의견을 비치는 건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녀석…특별공수란 이상한 아이디를 쓰는 언니의 존재가 조금 부담스러울 따름.
희진♥
[.....]
[응]_오후 11:17
[괜찮아]_오후 11:18
잠깐 뜸을 들인 건 이 시간에 물어보기라도 하러 간 걸까 생각했어도, 너무 금방 답이 와서 그건 아닌 거 같았다. 부모님이 맞벌이신지 같이 저녁 먹자는 말에 겨우 거절하며 집으로 돌아왔지만, 역시 먹고 올까 싶은 작은 후회.
오후 11:18_[내일 점심 집에 가서 먹어도 돼?]
떠오른 김에 시간에 맞춰 가려고 선뜻 물어봤다. 애당초 항상 만나면 바깥에서 먹었으니까.
[꼭 요리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오후 11:18_[내가 사 갈게]
집에서 먹는다고 굳이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고, 배달 음식을 시켜서 먹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그건 내일 상황 봐서 상의해보는 게 좋아 보였다.
희진♥
[ㅎㅎ 좋아 오빠]_오후 11:18
[그래도 시켜먹자]
[그게 편할거 같아]_오후 11:19
자주 나를 놀려먹어도, 내심 배려하는 모습에 조금 누그러지는 기분. 은근히 쌓인 나쁜 감정도 이런 대화를 통해 잘 희석한다.
오후 11:19_[알았어]
일단 답장을 보내놓고는 은연중에 드는 불길함.
오후 11:19_[근데, 내일은 뭐 할 거야?]
희진♥
[궁금해?]_오후 11:19
오늘처럼 또 공포영화 본다고 하면 갈 자신이 없어진다.
오후 11:20_[모처럼 점심이니까 영화 보면서 피자나 치킨 같은 거 먹을까 싶었지]
먹으면서 본다면 적어도 공포영화는 볼 수 없을 테니 최대한 그러기만은 피하려고 선수 치며 하는 말. 제발 이게 먹히기를 바라며 쓸 수 있는 용돈을 계산해봤다.
희진♥
[떡볶이 사오면 공포영화 안 볼게]_오후 11:20
"…."
이미 얄팍한 내 속셈을 아는지 달리 대처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희망은 보여서 해달라는 대로 해주자는 선택. 배달 시켜 먹자는 것은 힘들게 사 오지 말란 씀씀이였지만, 아무래도 희진이가 좋아하는 떡볶인 배달하지 않아 직접 사와야 하니 앞서 사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그 집 떡볶이가 맛있다는 거겠지. 나도 집 앞에 그런 떡볶이집이 있다면 먹고 싶을 때 사러 나갈 용의가 있었다.
[알았어]
오후 11:20_[늘 먹는 집에서 사가면 되지?]
희진♥
[ㅎㅎㅎㅎㅎㅎ]
[웅ㅇ!]_오후 11:20
다행히 귀찮더라도 결정이 틀리지 않아서 무척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
오후 11:21_[떡볶이 2인분에 각각 튀김이랑 오뎅 순대 김밥 다 사갈까?]
애초에 나는 외식이나 배달음식은 잘 먹지 않았어도, 희진이랑 사귀면서 이것저것 체험하느라 겨우 사람 대하는 것에 여러 가지 경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만족감과 자신감에 아직 서툴러도 의견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장족의 발전.
희진♥
[ㅎㅎㅎㅎㅎㅎㅎㅎㅎ개죠아]_오후 11:21
더군다나 희진이는 이미 떡볶이에 정신이 팔렸는지 공포영화는 물 건너간 분위기. 이쯤 되니 안심해도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까 우유랑 주스는 있어?]
오후 11:21_[같이 사갈까?]
치킨이나 피자를 생각하면 같이 가져다주니까 음료수는 무리였어도, 단순히 떡볶이만 원한다니까 사 가지고 갈 선택의 폭이 늘어 물었다.
희진♥
[그건 내가 준비할게]
[오빠는 떡보끼만 사왛ㅎㅎㅎㅎㅎ]_오후 11:22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란 걸 겨우 이런 대화에서도 드러나 덩달아 흐믓.
오후 11:22_[알았어]
나도 뒤에 히읕을 붙일까 하다 아직 이모티콘도 겨우 보내는 탓에 고민을 관두고선 얼른 대답을 전송했다.
희진♥
[벌써 보고싶다 오빠]_오후 11:23
사랑스러운 말에 올라가는 입꼬리.
오후 11:23_[나도 보고싶어]
"헤헤헤헤."
누가 보는 것도 아니라서 잔뜩 미소를 흘려 얼굴이 풀어졌다.
희진♥
[얼른 자야지]_오후 11:23
이제 할 만큼 나눈 대화에 잠시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가 싶어 기다리다가 보내는 건 슬슬 그만하자고 마침표를 대신하는 제의.
[응, 피곤하겠다]
오후 11:23_[자자]
사실 새벽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어차피 내일 만날 텐데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희진♥
[사랑해 오빠]_오후 11:24
그렇기에 충만한 애정이 어린 표현을 오늘은 희진이가 먼저 보냈다.
"에헤헤헤헤…."
오후 11:24_[나도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로 오늘의 대화는 종료. 초기엔 어수선하고 익숙하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니까 오히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대화에 집중하느라 자주 새벽을 함께하곤 했다. 그래서 대화를 끝낼 땐 암묵적인 동의로 사랑한단 말을 하면 거기서 마치는 이야기. 사실 이렇게 하자는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헤헤헤헤헤…."
그러나 잠들기 전의 버릇이 새로 생긴 나는 오늘도 희진이가 정말 나의 여자친구인지 믿기지 않아서 사랑한단 말에 꿈일까 뺨을 꼬집는 것으로 생생함을 실감하고는 침대에 누워 주변을 맴돌던 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