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무례한 첫인상(2)
그 외라면 공부하다 쉴 겸 동물의 왕국이나 곤충 밀리미터의 세계 정도.
"음-그렇구나-…그치만, 지금 그런 걸 보려는 건 아니겠지 오빠?"
설마하니 그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니지? 싶은 눈초리로 묻는다.
"응? 어어 당연하지…!"
암만 그래도 데이트에 그럴까?
오히려 난 연애에 대해 이것저것 배워서 이럴 땐 리모컨을 희진이에게 넘겨주는 편이 좋아 보였다.
"히히…그럼 영화 보자 오빠. 마침 새로 나온 게 있는데, 오빠랑 오늘 같이 보려고 안 보고 있었다."
리모컨을 주려고 손을 뻗는 사이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달라붙으면서 마치 칭찬해달라는 표정.
"그, 그래…?"
실은 나야말로 칭찬을 요구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여자에게 내성이 적으면서 도망치지 않은…부드러운 감촉과 좋은 향에 현혹되어 정신을 쏙하고 빼앗기지 않은 것만 해도 내겐 대단한 일….
"그러니까…끝까지 봐야 해."
올바른 생각하기 어렵게 귀에 직접 속삭이며 검지로 어깨를 쿡 찌르는 모습에 흠칫, 묘한 불길함은 단순한 착각일까? 저돌적인 요태를 부리더니 리모컨을 잡아 버튼을 누르는 앙증맞은 엄지.
"히히히-."
무슨 꿍꿍인지, 되려 그런 태도를 내비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대하듯 실실…웃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인상을 아는지 당연하다는 듯 어깨에 기댄 머리맡의 진한 샴푸 향이 포근한 꽃향기라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당장 기절하거나 도망쳐 숨고 싶어졌다.
"흐-읏!?"
눈꼬리가 샐쭉거리며 서슴없는 손짓. 팔이 가슴에 닿아 손목은 다른 손에 꼬옥 잡혀 이대로 꼼짝없이 영화를 다 관람해야만 했다.
"저…혹시, 지금 보려고 하는 게 공포영화야?"
티브이 화면 VOD 목록이 영화에서 장르가 공포로 이동하자 보기만 해도 질겁하고 싶은 포스터라 현실을 부정하며 질문.
"헤헿…."
그렇다면 차라리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지…그냥 미소로 넘기니까 생기는 두려움이 배가 되었다. 특히나 적극적으로 내 팔을 억압하여 자유를 붙잡는 터라 에어컨의 영향인지 모를 한기가 느껴져서 싫은 예감은 점점 현실로 다가와 오싹한 감정.
"재밌겠지 오빠?"
기어이 리모컨 누르는 걸 멈춘 희진이가 매우 사랑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아도, 무서움이란 감정이 지배해서 두근거리는 가슴은 싫어도 점차 호흡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집에 놀러 가는 건 아직 이르단 내 의견을 겨우 설득해가며 초대한 이유가 설마….
"만약 도중에 기절하면 깨우지 말아줘…."
전례가 있었기에 미리 하는 부탁이자 경고…아닌 부탁이었다. 거기다 거부권 따윈 없단 걸 알았기에 당연히 싫단 말은 할 수 없었고.
"이히히힛- 오빠도 참 걱정도-오. 내가 잠들지 말라고 옆에서 꼬-옥! 껴안아 줄게."
마치 아이를 타이르는 태도로 나의 우러나온 진심을 농담처럼 받아들이곤 기댔던 얼굴을 떼 어깨를 손뼉으로 약하게 툭툭 치길래 하는 수 없이 단념하며 가만히 맞아 주었다.
"그리고, 진짜 기절하면 귀에다 바람 불어줄게."
그러면서 슬며시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고 싶은 부끄러움을 꾹 눌러 참는 건 아무리 애인 사이라지만, 여전히 쑥스러움이 머리를 지배해서….
"후-!"
"흐-힣…!?"
방심한 틈을 타 말초신경 곤두서도록 진짜 불어서 반사적으로 어깨를 들썩여 달아나니 상체가 반대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히히히힣 정마-알! 귀엽다니까 오빤."
이미 떨어진 위신 챙기려 당황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면서도 늦었다고 생각하는 건 단지 희진이가 웃고 있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해 줘서. 이런 반응이 질리지도 않는지 계속해도 화가 나지 않는 건 단순히 여자친구여서가 아니라, 희진이여서…일 거다.
"어? 왜 안 되지?"
그렇게 나를 놀리며 한참 까르르거리더니, 뭐가 잘못됐는지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니까 자꾸 틀리는 비번에 갸우뚱.
"언니! 비번 바꿨어?"
집에 있는 건 확실해서 그런지 자리에 없어도 일단 소리치고 보는 거 같았다. 혹시 이대로 안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싶은 희망을 품는 것도 잠시. 대답이 없자 구태여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바깥으로 가버려 그저 있었다는 잔향만 나를 외롭지 않도록 코끝에 맴돌았다. 이처럼 실낱같은 소망과 달리 어떻게든 같이 보려는지, 집 안 어딘가 있을 언니에게 빠르게 걸어가는 뒷모습만 망연히 떠나보내곤 조금 있다가 문득-.
"……."
묘한 인기척에 뒤를 도니까 희진이의 언니가 떡하니 소파 뒤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레 서 있어 당혹스럽게 마주치고 말았다.
"저, 희진이가 찾으러 갔는데…."
뻔히 쳐다보니까 괜히 멋쩍어져 희진이가 걸어간 곳을 검지로 가리켜도 묵묵부답. 귀에 이상이 없다면 방금 자신을 불렀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할 수 없을 테지만, 성격이 원래 이런 모양인지 순순히 대답하지 않을 거 같았다. 아닌 말로 희진이가 부르는 것을 무시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나 또한 포함해서 말이다.
"…-."
그러다 알아들었단 표시로 아까처럼 미세하게 끄덕이는데, 가라고 알려 준 방향이 아닌 내게 가까워져서 거리에 따라 차츰 선명해지는 용모. 아까 헝클어졌던 머리카락은 그사이 세수라도 했는지 달랑 물기만 젖어서 잘 씻었다고 말하긴 어려운 몰골이었고, 만약 제대로 씻었다 해도 꼼꼼히 씻었다기엔 촉박한 시간이었다. 별로 더럽단 의미는 아니었지만, 머리를 감고 확실히 말리지 않아 젖은 채에다 씻었음에도 그늘이 진 얼굴은 말 그대로 고양이 세수란 표현이 떠올랐다. 거기다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짙게 자리 잡아 더욱더 어두운 느낌을 주니까 그런 걸지도. 더군다나 집에서마저 체육복 같은 걸 입고 돌아다니니까 좋지 않은 선입견으로 백수가 연상 돼 그런 기분이 들었다. 특히 희진이와 달리 부진한 발육에다 기장도 맞지 않아 손등이 가려지기도 했으니….
"동정이지?"
"커-흑! 컥! 뭐?"
잘못 들었나 싶어도 이미 머리로는 동정이란 말을 받아들여 기침했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다.
"둘이, 아직…?"
"끄음! 큼! 큼 큼큼!!"
아까 희진이가 실수를 저지른단 말이 이걸 두고 하는 소리였구나. 초면이라고 믿을 수 없게 거침없는 발언은 짧지만, 강렬했다.
"저, 그게…그러니까. 아직 서로 어리기도 하고…사귄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대체 왜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 걸까?
물론 언니로서 가족이니까 여동생이 남친과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주저 없이 물어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곤란한 건 내 쪽이다.
하다못해 은연히 돌려서 물어보던가.
"못 때면…말해."
…때면도 아니고 못 때면 말하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지? 뭔가 이상야릇한 어감.
"크-흠. 음!"
애써 침착해지려고 목을 가다듬을수록 되레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의연히 대처하지 못했다.
"쿻-!"
지금 비웃은 건가? 희진이가 그러면 익숙하기도 해서 괜찮지만, 이쪽하고는….
"차-암! 대체 어딨었어 언니?"
때마침 희진이가 돌아와 대답하기 곤란한 나를 구원해줬다.
"……."
대답 대신 침묵이 익숙한 듯 서로 얼굴을 가볍게 훑어보곤 앉는데, 혹시 희진이가 방금 대화를 듣진 않았나 싶어 눈치를 살피니까 별다른 이상은 없어 다행히 못 들은 기색.
"비번 뭐로 바꿨어?"
희진이가 리모컨을 집고서 묻자 언제 일어섰는지 벌써 소파 밖으로 빠져나가 있었다.
"…안 바꿨어."
무시하고 가려나 마음 졸였는데, 이번엔 뜸 들이는 일 없이 빠른 대답.
"어? 그래?"
진짜인지 확인하고자 아까처럼 번호를 누르니까 영화가 구매되었다는 창이 떴다.
"헤헤…그렇네?"
그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에 머쓱한 희진이를 두고 가버리길래 원래도 이랬는지 그러려니 하는 희진이를 대신하여 눈길로만 배웅. 희진이의 이런 모습은 자주 볼 수 없었는데, 역시 가족 앞이니까 태도가 느슨해져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내면을 엿본 느낌이라 살짝 새로웠다. 반대로 희진이의 친언니라고 거리낌 없이 구는 걸 장난이라 하기엔 좀 많이 무례하게 느껴져 거북한 기분 또한.
오감의 한계치를 넘어 덜덜 떨리는 느낌을 짧게 표현하자면 마치 심장과 하나 된 기분.
"으하-으…."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당최 진정할 수 없었고,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는 지금도 가빴던 호흡을 진정시키느라 눈 하나 제대로 못 뜰 지경이었다.
이제 진짜 끝이야 이제 진짜 끝이야 이제 진짜 끝이야….
"읗-…."
영화 시작 전 에어컨을 만질 때 덥냐고 묻길래 덥지 않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추워야 스릴을 제대로 만끽한다며 온도를 낮춘 게 지금에 이르러서야 진짜 감기라도 걸릴 것처럼 몸이 싸늘해져 재채기가 나올 것처럼 몸을 떨어도 진짜 감기가 아니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몸살로 몸져누웠을지도….
하기야, 이금에 알아차리는 거지만 연신 붙어 있었으니까 진심으로 추웠다면 코를 훌쩍이고 있었을 거다.
"무서웠어?"
자기가 연하면서 흡사 연하를 보며 다루는 듯한 말투의 속삭임.
"아아아잘알면서…."
상냥하게 걱정해주는 듯이 말해도, 무서운 장면이 고조될 때마다 화면에 놀랄 거 옆에서도 놀라게 해서 공포를 배로 대비하게 만든 범인의 대사였다. 방금까지 나를 놀리며 실컷 웃었으면서 말과 표정이 따로 놀아 눈은 쭉 웃으니까 얄밉기만 한 감정….
"진정해 오빠. 웅?"
치…치사하게.
"으햐하하핫! 핫…! 헤-헤헤…."
긴장할 때마다 장난치며 일부로 쿡쿡 찔러 화들짝 놀라게 했어도, 풍만한 가슴과 함께 다가와 귓가로 속삭이는 애교에 서운히 억눌렸던 게 사르르 풀렸다. 정말, 이런 행위에 화를 낼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해도 본능이니까 매번 속절없이 당하는 거겠지.
"기분 풀렸어?"
사람을, 남자를 다루는 방법이 능숙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으, 응…."
부드러운 감촉이 팔에 닿으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괘씸했던 심정이 변모하고, 얄궂던 손끝이 상냥하게 톡톡 문지르니까 똑같이 오싹하단 단어가 공포와는 또 다른 느낌.
"히히-"
아무리 골려도 화가 나지 않는 목소리에 진정이 되자 바라보는 눈을 의식해 부끄러워져서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사랑해- 오빠."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라붙은 애정표현이 상당하여 적극적으로 붙어 오는 스킨십이 당황스러워도 싫지 않아서 저항하지 않는 태도. 토라진 연상에게 두 살의 연하가 하는 대처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 나도…사랑해."
"이히히히힣-."
더웠다 말다 하는 날씨였지만, 식은땀 하나 안 흘렸는지 개의치 않고 껴안아 재밌다며 흘리는 미소. 이런 모습에 자주 자아비판 하며 실은 어장이 아닐까 싶은 엇나갔던 생각도 말끔히 사라지지만, 그런 안 좋은 상상 자체가 꼭 이럴 때만 드는 불쾌한 감정이긴 했다.
"아- 재밌었다. 그치?"
내가 무서워서 벌벌 떨어도 그리 겁을 줘놓고선 자긴 나쁘지 않았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모양새.
"어, 으-그게…괜찮았어."
솔직히 너무 무섭다 보니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어도, 연출이나 스토리적인 부분에서 수긍하지 못할 부분은 찾지 못했다. 못했다는 것이 개연성이 좋아서 못했던 건지, 아니면 무서워서 제정신으로 보질 못해 그랬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 다음에 또 볼까?"
"으, 으어 아니…! 어, 아니 그러니까 응 그게 어…."
또 보잔 말을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절대 달갑지 않아서 꼴사납게 몸부림쳐버렸다.
"오빠. 나랑 영화 보는 게 싫어?"
그러자 약간 싸늘해진 말투. 내게 의도적으로 원하는 대답을 요구하는 걸 알았어도 정답을 말해주긴 곤란스러웠다.
"아, 아냐! 좋아…! 같이 영화 보는 거…."
해도, 괜히 말대답에 꼬투리 잡히기 싫어서 그냥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영화 보는 것이 좋다고 하는 내 딴엔 최선의 대답. 말실수해서 말꼬리 잡힐 여지를 주면 더 시달리게 될지 몰랐다.
"그럼 공포영화는?"
그러나 여지없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끌어내려는 기민함.
"어…공포영화는…."
연애경험이 없었던 나에게도 희진이가 토라지지 않게끔 기분을 풀어줘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아서 한 발 뒤로 물러나 달래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말대답이 난감하기만 한 이유가 오로지 내 반응이 재밌어서 그렇다는 걸 알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