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84화 사고
“오빠의 아기라니... 설아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다 들었어요?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자신의 물음에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설아의 모습에 지수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지수 뿐만이 아니다. 옆에 있던 성민 역시 상당히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언니, 제가 꼭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다만 이 만큼 오빠를 사랑하고 있으니 그걸 알아달라는 거예요.”
“서, 설아 너...”
“그러니 더 이상 오빠를 흔들지 말아요. 지수 언니는 현준이 오빠와 잘 사귀면 되는 거예요. 전 언니의 사랑을 방해하거나 훼방을 놓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언니도 나와 오빠 사이를 방해하려하지 말아요.”
너무 기가차고 충격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대체 지금 설아의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그럼 이제 얘기는 끝난거죠? 저 이만 가볼게요.”
성민에게 다가간 설아가 손을 잡았다.
“오빠, 집으로 가. 오빠가 좋아하는 불고기 만들어줄게.”
“설아야..”
“왜? 지수 언니하고 더 할 말 있어?”
의아해 하며 되묻는 설아의 말에.
“......”
성민은 아물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성민과 설아가 돌아가고 혼자 남은 지수는 벤치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설아의 태도와 말이 너무 충격이라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분명 살아도 알고 있다. 오빠와 자신의 이런 관계가 정상정인 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걸 서로가 좋아하면 충분히 극복 할 수 있다고 믿는게 문제였다.
“오빠의 아기라니...”
그리고 설아가 중얼거린 그레도 오빠의 아기니까라는 말은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친오빠인 성민의 아기를 가져도 감당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친남매 사이에서 아이를 가진다니.
어떻게 그런 위험한 발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성민이가 문제가 아니었어.’
설아의 눈빛, 태도, 그리고 말.
지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지금 설아는 누가 말린다고 해서 쉽게 말릴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성민을 향한 설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성민은 심각한 얼굴로 설아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런말을 한 거야.”
“뭐가?”
“지수 앞에서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냐고.”
“어쩔 수 없잖아. 지수 언니가 오빠와 나 사이를 갈라놓으려 저렇게까지 행동하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을...”
“오빠야 말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뭐?”
“슈퍼에 간다고 해놓고 어떻게 지수 언니를 만나러 나갈 수가 있냐고.”
성민을 바라보는 설아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오빠도 알고 있잖아. 현준이 오빠를 나에게서 빼앗아 간 게 지수 언니라는 걸.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지수 언니를 만나러 나가면서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는 거야?”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왜 어쩔 수 없는 건데?”
“사실대로 말했다간 설아 네가 만나게 해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사실대로 말했어야지. 누굴 만나러 간다고 나에게 말해주기로 했었잖아.”
화가 난 듯 바라보는 설아의 시선에 성민이 한 숨을 내쉬었다.
“설아야. 너 지금 너무 예민해져 있어.”
“그렇지 않아.”
“아니, 예민해.”
“다 오빠 때문에 그런 거잖아!”
“나 때문이라고?”
“오빠가 계속 나와 거리를 두려 하니까 그런 거잖아. 그러지 않았다면 난 이러지 않아.”
설아가 성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희정이 언니와 지수 언니가 그런 말을 해도 오빠하고 내가 괜찮다면 다 좋은 거잖아. 대체 왜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는 거냐고.”
“이런 사이는...”
안색이 어두워진 성민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이런 사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희정이와 지수뿐만이 아니야. 다른 사람들까지 알게 되면. 여동생과 오빠가 서로 사귀고 있다는 그런 말이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리고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그건 진짜 생각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나도 알아...”
손을 뻗은 설아가 성민의 옷깃을 잡았다.
“우리 사이가 환영받을 수 없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이 오빠와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잖아. 난 괜찮아. 다른 사람들과 멀어져도. 오빠만... 오빠만 이렇게 내 옆에 있어주면... 나 주변 사람들과 멀어져도 괜찮아. 그러니 오빠... 오빠도 나만 바라보면 안 돼?”
슬픈 눈으로,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설아의 시선을 성민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민은 방으로 들어갔다.
설아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성민이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지수야, 지수야?”
“응?”
“대체 무슨 생각하기에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데 표정이 그렇다고?”
“......”
“집에 무슨 일 있어?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거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되묻는 현준의 모습에 지수가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거 없어.”
데이트를 하는 내내 현준은 지수의 안색을 살폈다. 얘기를 하고 그럴 때는 평소의 지수 같은데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그럴 때 딴생각에 잠기는데 한 번 불러서는 대답을 안 했다. 지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랬지만 현준이는 뭔가 말 못한 사정이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을 때 지수를 버스 정류장역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집에 도착하면 문자보네.”
“알았어. 현준이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지수야.”
“응?”
“나에게 말하기 곤란한 일인 거 같은데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물론 꼭 알려달라는 건 아니야. 단지... 지수 네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아 걱정이 돼서 그래.”
“알았어.”
“버스 온다.”
천천히 정류장 앞에 멈춰서며 출입문이 열리자 지수가 올라탔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지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자 웃으며 작게 흔드는 지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출입문이 닫히고 차가 다시 출발하자 현준이도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문자 한 통이 현준이 폰에 왔다.
혹시 지수가 보낸 건가 싶어 확인을 해본 현준이는 성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 아르바이트 못 할 것 같다. 미안하다.>
문자엔 딱 그렇게 적혀 있었다.
<못 하겠다니?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야. 다만 개인사정 때문에 그래. 혼자서 해야겠다.>
<아쉽네...>
답장을 보낸 현준이가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지수도 그렇고 성민이도 대체 무슨 일이야...?”
아르바이트 때문에 현준이를 보러 찾아갔을 때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성민이는 지수가 무슨 얘기 안 하더냐고 물었었다. 지수도 그런 성민이 얘기를 꺼냈을 때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나?’
안 그래도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성민이와 지수가 싸운 적이 있었다. 이제 겨우 다시 화해를 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일까.
돌아가는 현준이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쉽네...>
현준이가 보낸 답장을 끝으로 성민이가 폰 화면을 끄고 다시 한 쪽에 내려놓았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얘기를 들어보면 상당히 괜찮은 아르바이트였다. 오전만 해도 되고 일당도 10만원에 현준이하고 같이 하는 일이니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 했다.
‘지금 같은 기분에 제대로 알바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지수 얼굴을 어떻게 볼지 너무나 막막했다.
설아가 너무 큰 사고를 쳐버렸다.
‘이미 끝까지 가버린 마당에 다시 되돌릴 수가 있는 걸까.’
설아와 관계까지 맺어버린 상황에 어떻게 돌릴 수가 있단 말인가. 거기다 설아는 자신을 정말 많이 좋아한다.
지수에게 했던 말은 성민에게도 너무나 충격이었다.
‘아기라니...’
자신의 아기라면 가지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그 말은 솜털이 곤두설 정도였다. 설아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똑똑.
그때 노크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팔베개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던 성민이 긴장하며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오빠, 들어가도 돼?]
문 너머에서 설아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어, 들어와.”
성민이 그런 문을 향해 들릴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곧 닫힌 문이 열리더니 설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달칵.
살며시 손을 밀어 문을 닫은 설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오빠.”
“응?”
“내일 아르바이트 갈 거야? 오빠 한다고 하면 내일부터 나가는 거잖아.”
월, 수, 금이니 시작하면 금요일인 내일부터 나갈 수 있었다.
“안해.”
“안한다고?”
“그래. 현준이에게 안한다고 문자 보냈어.”
“그랬구나...”
설아가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도 지수 언니에게 한 말 때문에 신경 쓰여?”
“......”
“오빠, 나도 놀랐어. 지수 언니가 오빠 하고 나 사이를 알고 있다는 걸. 희정이 언니가 알아차렸다는 것도 놀랐는데 지수 언니까지 우리사이를 알게 되었다는 건 나도 당혹스러운 일이야.”
설아가 손을 뻗어 성민의 손을 감싸 잡았다.
“하지만 오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거리를 두면 나 정말 가슴이 아파.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수는 없는 거였잖아. 누군가는 분명 알아차리는 사람도 나올 거라 생각했어. 그게 희정이 언니나 지수 언니였을 뿐이야.”
“그 둘이 전부가 아닐 수 있어.”
“뭐?”
“그 두 사람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그리고... 난 오빠 답지 못한 행동을 한 거야.”
“......”
설아가 말 없이 성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갈게.”
자리에서 일어난 설아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성민은 찹찹한 심정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성민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그리곤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성민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곤 설아의 방문을 열어 살펴보곤 그대로 방으로 돌아와 지갑과 폰을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는 1층으로 나와 있었다.
서둘러 계단을 이용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바보같이...’
도어락이 해지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것 같은 소리를 작게 들었다. 그래서 문 쪽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무심코 지나간 행동이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성민은 설아가 입술을 깨물며 방을 나섰던 것을 떠올렸다.
1층으로 내려온 성민이 아파트 정문을 나섰다. 그리고 설아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달려서 아파트단지 정문 입구로 달렸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니 저 앞 신호등을 건너고 있는 설아의 모습이 보였다.
“설아야!”
달려가면서 크게 소리치자 이쪽을 돌아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곤 신호등을 건너버린다.
“젠장!”
서둘러 달려가 보지만 빨간불이 되어버렸다.
저 만치 걸어가는 설아를 보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질 않았다.
초조해진 성민이 잠시 차도를 살펴보았다.
‘어쩔 수 없어.’
오빠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서도 횡단보도를 건넜다.
오빠의 마음을 돌리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오빠의 마음을 흔든 당사자를 만나 매듭을 지어야 했다.
‘희정이 언니가 말한 게 분명해.’
지수 언니가 알게 되고 아파트로 찾아온 건 희정이 언니가 말했기 때문으로 생각했다. 중학교 동창에다 친구이니 연락이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아파트로 찾아와 그런 얘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행복했다.
“꺄아앗!”
“뭐야!”
그때 주변 사람들이 웅성웅성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던 설아의 걸음이 멈췄다.
“오...”
설아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오빠아!!!”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쳐 부르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성민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