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82화 좋아해(2)
‘진짜 어떻게 해야 하냐...’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설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고른 게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설아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성민이도 알고 있다. 희정이에게 이렇게 질투를 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하지만 지수에 이어 희정이에게 들켜버리니 지금 자신과 설아가 얼마나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것인지 다시 한 번 자각을 하게 되었다.
들킨 게 지수와 희정이라서 다행이지 자신을 아는 다른 애들이나 사람들이었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지 몰랐다.
만에 하나 아버지라도 알게 된다면 이건 생각하기도 싫은 아찔한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 관계를 다시 되돌릴 수가 있는 것일까.
설아가 저렇게나 자신을 원하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설아를 받아드린 건 바로 자신이었다.
좀 더 냉정하게 거절을 했어야 하는 걸까.
만일 그때로 돌아가면 설아를 다시 거절 할 수 있을까.
성민은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위이잉~
그때 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확인을 해보니 다른 누구도 아닌 현준이었다. 잠시 설아가 자는 것을 확인한 성민이 조용히 깨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문을 닫은 후 전화를 받았다.
“어, 현준아.”
[너 지금 집이야?]
“집이지.”
[나 너희 집 앞이거든 잠깐만 나올래?]
“집앞이면 올라오지?”
[알잖아. 내가 왜 올라가지 않으려고 하는지.]
성민이 고개를 돌려 자고 있는 설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일을 겪은 뒤에 현준이는 설아를 만나는 것에 여전히 미안함과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럼 내려갈게.”
전화통화를 끝낸 성민이 소리나지 않게 조심히 문을 열어 방으로 들어가 옷가지들을 챙겼다.
“으음...”
그때 설아가 몸을 뒤척이며 소리를 내자 움찔 놀라며 바라보았다. 다행히 자면서 뒤척인 것인지 다시 고르게 숨을 쉬며 잘 자고 있었다. 속으로 안 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고는 옷을 입고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정문을 열어 나가니 현준이가 앞에 있었다.
“갑자기 무슨 볼일이냐?”
“네 얼굴도 볼 겸 한 가지 물어보려고.”
아파트 상가에 들려 캔 음료 두 개를 사가지고 놀이터 벤치로 이동해 몸을 앉혔다.
“자, 마셔.”
“고마워.”
“물어 볼거라니 그게 뭔데?”
“별거 아니야. 다만 네 생각이 괜찮으면 같이 해보면 어떨까 해서.”
“같이?”
“응.”
“혹시 아르바이트냐?”
“맞아, 아버지 친구 분이 장사를 하시거든? 그래서 매일 쌀부터 시작해서 물건을 떼 오는데 일손이 부족하다는 거야. 일당 10만원 줄 테니까 일주일에 세 번 아르바이트 해볼 생각이 없냐고 그랬어. 이왕이면 친구도 같이 오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성민이 네 생각이 괜찮으면 같이 하면 어떨까 해서.”
“일당 10만원 일주일 세 번이면 나쁘진 않는데.. 얼마나 일하는데?”
“오전만 하면 된다던데?”
“오전에만?”
“어, 9시에 대형 화물트럭이 들어오니까 그거 다 옮기면 끝나는 일이라고 하더라고. 보통 12시안에 다 옮기니까 오전에만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월, 수, 금, 삼일이야.”
“나쁘진 않는데...”
“그렇지? 빠르면 이번 주 금요일부터 시작하면 된 데.”
“알았어. 그럼 생각해보고 답해줄게.”
“이왕이면 혼자 하는 것 보다 성민이 너 하고 둘이서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얼굴도 볼겸 물어보러 온 거야.”
“혼 자하면 네가 옮길 게 많아서 그런 게 아니고?”
“그것도 있고...”
“그럴 줄 알았어, 인마.”
피식 웃은 성민이 캔음료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지수하고는 자주 만나냐?”
“만나지.. 사귀고 있으니까...”
지수 얘기가 나오자 현준이 성민이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이 지수를 받아줌으로써 설아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걸로 성민에게 한 데 맞기도 했었다.
“지수가 별다른 말은 안 해?”
“어?”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설아 얘기야? 그거라면 너도 알고 있지만 지수도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별 말 안했으면 됐어. 그냥 물어본 거야.”
현준이 의아한 듯 성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음료수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나중에 연락 준다고 하고 헤어졌다. 정문으로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성민은 안심했다.
“그래도 현준이에게 별다른 말은 안했나보네.”
희정이가 알게 된 후로 이런 쪽으로 더 신경이 쓰이는 성민이었다.
잠시 후 5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성민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설아야?”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성민은 거실에 서있는 설아를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 일어 난거야...?”
“내가 언제 일어난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오빠가 어딜 다녀왔느냐는 거야.”
“잠깐 현준이 만나고 왔어.”
“현준 오빠를 만나고 왔다고?”
“그래. 전화가 와서 이 앞에 왔다기에 설아 네가 자고 있어서 깨지 않게 조용히 나갔다 왔던 거야.”
“정말 현준 오빠가 맞아?”
“무슨 뜻이야 그게?”
“희정이 언니가 또 찾아온 거 아니야?”
설아의 말에 성민이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희정이가 왜 또 찾아왔겠어? 현준이 맞다니까.”
설아가 손을 내밀었다.
“폰 줘봐.”
“폰은 왜...?”
“정말 현준이 오빠가 맞는지 확인해 봐야하니까.”
“......”
“왜 안 줘? 현준이 오빠가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니야?”
“설아야, 너 이렇게 일일이 내 폰을 확인 하려는...”
“빨리 폰 줘!”
“설아야...?”
“안 줘? 왜 못 주는 거야? 정말 희정이 언니가 다시 찾아 왔던 거야? 아니면 줄 수 있는 거잖아. 왜 나에게 못 보여주는 거야? 정말 희정이 언니가 맞는 거야? 오빠 지금 나에게 거짓말 한 거야?”
“현준이에게 전화 온 게 맞아.”
“그럼 줘봐. 확인 해볼게. 아니면 내가 직접 현준이 오빠에게 전화 걸어서 확인해볼까? 오빤 그걸 원해?”
성민이 자신의 폰을 설아에게 내밀었다. 빠르게 낚아 챈 설아가 폰 화면을 켜서 통신기록으로 들어가 확인을 했다.
그리곤 다시 성민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확인시켜주면 되는 걸 왜 안 주는 거야? 금방 오해가 풀리잖아.”
“......”
“그리고 현준이 오빠를 잠깐 만나러 나간다고 해도 나에게 말해. 그래야 이런 오해가 안 생길 거 아니야.”
“난 설아 네가 자고 있어서...”
“그럼 깨워. 깨워서 나에게 말하고 가.”
성민은 말없이 설아를 바라보았다.
“현준아.”
저 쪽에서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지수에게 다가갔다.
“오늘 예쁘게 입고 나왔네?”
“당연하지. 데이트인데 어떻게 그냥 나올 수 있겠어?”
팔짱을 껴오는 지수와 함께 발걸음을 옮긴 현준이가 번화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맛 집으로 알려진 음식점에 들려 저녁도 먹고 인형 뽑기, 오락실에도 들려 공 던지기 등 게임도 즐겼다.
“왜 그래?”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냐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대화를 나누던 지수는 현준이 계속 딴생각을 하고 있자 툴툴대며 말했다.
“아니.. 그냥... 잠시 성민이 생각했어.”
“성민이? 성민이가 왜?”
“오늘 성민이 만나고 왔다고 했었잖아.”
“응, 아르바이트 같이 하자고 했다며.”
“그래서 만나고 왔는데... 성민이 얼굴이 안 좋더라고.”
“안 좋다니 뭐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뭔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 그리고... 지수 네 얘기도 물어보더라고.”
“무슨 얘기?”
“지수 네가 별다른 얘기 안 하더냐고.. 난 혹시 설아의 고백 때문에 그런 건가 싶어서 말하니까 그건 아니라고 하던데...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
순간 지수가 말이 없었다.
그러자 현준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성민이가 뭐래?”
“어?”
“그것 말고 다른 말은 안 했어?”
“다른 말은 없었는데...?”
“그렇구나..”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지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별거 아니니까 현준이 넌 신경 안 써도 돼.”
커피를 마신 후 카페를 나와 좀 더 시간을 함께 보낸 후 그렇게 지수를 먼저 태워 보낸 현준이가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향했다.
‘성민이도 그렇고 지수도 대체 뭐지...’
성민의 말에 의문을 느꼈었는데 지수에게 그 얘기를 꺼내니 대답을 하지 않고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넘겼다.
그게 의아했고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성민이는 설아를 잘 타일렀을까.’
현준이와 헤어지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지수는 두 사람이 신경 쓰였다.
오빠와 여동생.
오빠를 사랑하는 여동생.
남매.
양호실에서 들었던 대화는 정말 충격이었다.
그리고 자신들 앞에서 그렇게 연기를 하는 설아의 모습도 너무 놀라웠다.
자신은 현준 오빠를 이제 좋아하지 않는다던 설아의 말. 그게 오빠인 성민이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게 너무 충격이었다.
일단 성민이에게 좋게 말을 하긴 했는데 설아가 오빠인 성민이를 남자로 보고 있다는 게 지금도 믿겨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친오빠를 좋아 할 수 있을까.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 자체가 너무 소름이다.
그래서 성민이의 태도가 중요했다.
설아가 좋아 한다고 해도 성민이가 중심을 잘 잡는다면 절대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성민이 얼굴이 안 좋더라고.
성민이를 만나고 온 현준이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잠시 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던 지수가 무슨 생각인 것인지 정차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버스가 멈추며 문이 열리자 지수가 버스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