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80화 진심이예요
“만났어.”
희정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설아가 자신에게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다 알게 되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성민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대한 트러블이 생겼고 그 원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면 분명 자신을 만나려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설아에게 연락이 왔을 때 만나러 나오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로 인정하네요?”
“이미 다 알고 왔을 테니까.”
살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보다 희정의 반응이 너무나 침착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여기까지 예상하고 온 거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전 언니하고 오빠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지는 못 해요. 다만...”
“다만?”
“언니가 한 말들로 인해 오빠가 지금 괴로워하고 있다는 거예요.”
“......”
“그날 말했지 않아요? 언니 때문에 오빠가 많이 힘들어 하고 있으니까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요.”
분명 그랬다.
성민을 대신해서 나온 설아는 그렇게 자신 앞에서 차갑게 말했었다. 성민이가 그렇게 힘들어 할 줄은 몰라서 설아의 말대로 나타나지 않으려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성민이만 힘들어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 장면을 보고 말았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성민은 내가 아닌 설아 너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다는 걸.”
“나 때문에요?”
“그래.”
“그건 대체 무슨 발상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죠? 오빠가 나 때문에 힘들어 한다니. 전 이해가가지 않는데요?”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거니?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거니.”
“이해가 가지 않아요. 오빠가 왜 나 때문에 괴로워 한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말하며 바라보는 설아의 시선에 희정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않고 쳐다보았다. 희정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설아는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설아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희정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물어봐요.”
“너 혹시 성민이를... 오빠가 아닌 남자로 보고 있는 거니?”
설아가 자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듯이 희정 역시도 자신이 알고 싶은 진실에 대해서 바로 물어보았다.
자신의 물음에 설아가 충분히 당황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었다.
“그게 어때서요?”
“어때서라니.”
오히려 설아가 태연하게 되물어오자 당황한 것은 희정이었다.
“너 지금 그걸 몰라서 그러는 거야?”
친오빠를 남자로 보고 있는거냐는 물음에 태연하게 그게 어때서라고 대답을 한다는 것이 희정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누가 상식적으로 받아드릴 수 있을까.
친오빠를 남자로 보고 있냐는 물음을 그게 어때서냐고 되묻는 말을 말이다.
“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요. 사회적으로 남매가 서로 사랑하면 안 된다는 그런 인식이 깔려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요?”
사회적인 인식뿐만이 아니었다.
법으로도 남매끼리는 결혼조차도 할 수 없었다.
“전 모르겠어요.”
목소리가 낮아진 설아의 눈빛이 상당히 진중해졌다.
“왜 사회인식이 그렇다고 해서 여동생은 오빠를 사랑해서 안 된다는 거죠? 내가 사랑하고 상대가 나를 사랑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게 사랑이고 마음이 맞는 거 아닌 가요? 왜 그걸 억지로 갈라놓으려고 하는 거죠? 그거야 말로 잘 못 된 게 아닌가요?”
“너 그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네, 진심이예요. 내가 이 자리에서 언니에게 농담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설아 넌 성민이의 여동생이야. 같은 부모밑에서 태어난 피가 이어진 남매라고. 설사 두 사람이 이어졌다고 해도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할 거야? 근친혼은 유전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아 너도 배워서 알잖아.”
옛날에는 혈통을 유지한다고 왕족, 또는 귀족 간에 근친혼이 성행했다고 하지만 그 때문에 유전적으로 문제가 된 후세들이 태어나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법적으로 근친혼을 막기까지 했는데 설아가 이런 얘기를 하니 희정으로써도 기가 막혔던 것이다.
“무조건 그렇지는 않아요. 그럴 확률이 적지 않다 뿐이지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례도 있어요.”
“그래서 설아 넌 지금 네가 가지는 마음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왜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언니가 우리 오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 몰라요.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언니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 않다는 거예요.”
설아는 진심으로 오빠를 사랑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은 현준을 짝사랑 했을 때 보다 더 컸다.
오히려 이제야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알게 된 것 같았다.
자신이 진정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다.
자신을 지금까지 위해주고 아껴주었던 남자가 누구인지.
“언니는 잘 몰라요. 오빠가 나를 얼마나 위하고 아껴주었는지. 난 어렸을 때 몸이 많이 약했어요. 그래서 잔병치례도 많았고 열병에 시달려 응급실에 실려간적도 여러 번 있었어요. 그런 나의 곁을 항상 지켜주고 있어주었던 게 바로 오빠에요.”
현준에게 고백하고 일이 벌어지면서 알게 되었다.
오빠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고 위했는지.
얼마나 나를 아껴주고 소중히 생각해주었는지.
어머니하고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도 알지 못 했었다.
늘 자신에게 장난치고 덤벙대는 오빠였지만 사실은 그건 겉모습일 뿐 속마음은 누구보다 자신을 위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미안했다.
이제야 자신이 알게 된 것이.
잔소리만 하고 핀잔을 주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오빠는 그런 사람이에요. 내가 잔소리하고 소리쳐도 항상 나를 제일 먼저 생각해주었던 사람이에요. 난 지금까지 몰랐어요. 오빠가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래서 오빠만 생각하면 여기 가슴 한켠이 아려 와요.”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잘해주려고 했다.
오빠를 위해서 자신도 달라지기로 약속했었다.
그런 마음이 지금까지 오게 됐다.
시작은 오빠에게 미안해서 그런 것일지라도 지금 자신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윤성민, 바로 자신의 오빠였다.
“넌 지금 오해하고 있어.”
“내가 뭘 오해하고 있다는 소리죠?”
“성민이가 설아 널 아끼고 위해주는 건 맞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동생으로써 설아 널 위하는 것이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야.”
“저도 알아요.”
“알고 있다고?”
이어진 설아의 대답에 희정이 다시금 당황했다.
“오빠가 나를 여자가 아닌 동생으로써 아껴주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죠? 나를 동생으로써 아껴주었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날 위하고 아껴주는 건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젠 오빠도 날 여동생이 아닌 여자로써 인식하고 있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도 날 여동생이 아닌 이성으로써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예요.”
“뭐어...?”
희정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그러니 언니가 나에게서 오빠를 빼앗을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요. 오빠는 언니가 아닌 나를 사랑해요.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난 오빠를 빼앗길 생각이 없어요. 그게 언니가 아니라 다른 여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오빠는 내 남자예요. 누구도 나에게서 오빠를 빼앗아 갈 수 없어요. 절대, 그 누구도...”
“......”
집념이 실린 설아의 말과 눈동자에 희정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시는 우리 오빠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이건 충고가 아니라 경고예요.”
그리곤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선 설아가 그대로 몸을 돌려 카페를 나섰다.
“......”
설아의 모습과 말이 너무 충격이 컷던 것일까.
희정은 한 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앉아 있었다.
‘대체 설아는 어디에 간 걸까.’
친구와 약속이 있어 간 것일까.
그저 약속이 있다고 나간 설아 여서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외출을 한 것인지 성민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다시 원래의 설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제 자신의 말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을 보았었다. 자신의 말에 설아가 얼마나 가슴아파하는 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밤잠을 설쳐 늦은 새벽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자신을 깨우는 설아의 평소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전날 밤에 보았던 설아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때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혹시 설아 인가 싶어 확인을 해보니 희정이었다.
순간 희정와 있었던 일 때문에 성민은 긴장이 되었지만 거부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성민아..]
폰 너머에서 희정이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어...”
대답하는 성민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응했다.
[나, 조금전에 설아와 만났어.]
“뭐?”
설아와 만났다는 희정이의 말에 성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금 나 너무 충격이 커서 혼란스러워. 그래도... 그래도 꼭 확인 하고 싶어 이렇게 전화했어.]
“화..확인이라니?”
침착하려 했지만 성민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너 정말... 설아를 여동생이 아닌 여자로 보고 있는 거니...?]
“......”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나 설아 에게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어서 그래. 진짜...그런 거니?]
“희정아..난...”
뒷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설아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런 대답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왜 말을 못 하는 거야? 성민이 너 정말.. 설아를...]
“......”
[전화...끊을 게.]
그것으로 통화는 끝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도어락이 누르는 소리와 함께 장금이 해지되고 현관문이 열리며 설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봉지를 한 쪽에 내려놓는 소리와 자신의 방에 들렸다가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노크소리와 함께 설아가 들어왔다.
“오빠,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서 삼계탕 만들어주려고 생닭하고 재료들 사왔어.”
안으로 들어온 설아가 가만히 앉아 있는 성민의 옆으로 이동해 몸을 앉혔다.
“무슨 생각하기에 그렇게 앉아 있어?”
의아해 하며 묻는 설아의 말에도 성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야? 오빠 아직도 기분이 안 풀린거야? 어제 일을 잊어. 난 괜찮으니까. 그러니 그런 걸로..”
“희정이는 왜 만나러 간 거야?”
“......”
“희정이를 만나서 내가 널 여자로 보고 있다고 말을 한 거야? 그말 하려고 만나러 갔어?”
입을 다물고 성민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설아가 싱긋 웃었다.
“왜, 그러면 안 돼?”
“뭐라고...?”
“사실이잖아. 나도 오빠를 남자로써 좋아하고 오빠도 날 여자로써 좋아하잖아. 솔직하게 말을 전한 건데 그게 왜?”
“설아야... 어제도 말했지만..”
“오빠가 착각을 하고 있어.”
“착각이라니?”
“희정이 언니는 오빠와 내가 걱정이 돼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야. 언니는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나와 오빠 사이를 질투를 해서 그런 말을 한 거야.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어젠 내가 오빠의 말을 듣고 잠시 그 수법에 넘어 갈 뻔 했지만 어림도 없어. 난 그런 하찮은 수에 넘어 가지 않아. 그래서 오늘 만나자고 했어. 확실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오빠와 나 사이를 방해하지 말라고 똑똑하게 일러두었어. 그러니 오빤 걱정하지 마.”
“설아 너 진짜...”
“그래도 대단하네. 만나자마자 이렇게 다시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이간질을 하다니. 그 언니 생각보다 참 독한 것 같아. 하지만 그런다고 난 포기하지 않아. 그러니까 오빠도 괜히 걱정하거나 마음 아파 할 것 없어. 지금까지처럼 오빠와 난 서로 아끼면서 잘 살아가면 되는 거야.”
설아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 재료손질하고 삼계탕 끓일 준비해야 하니까 이만 나가볼게. 희정이 언니 전화 받고 머리가 좀 아플 텐데 이젠 안심하고 쉬고 있어. 난 괜찮으니까.”
그리곤 방을 나가버리는 설아의 뒷모습에 성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