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73화 걸려온 전화(2)
1층으로 내려와 정문 밖으로 나간 성민이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정문에서 우측에 자리한 나무그늘 밑에 가만히 서있는 모습을. 발걸음을 옮겨 다가가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희정의 고개가 성민에게로 향했다.
“나와주었구나.”
“어.”
“조용한 대서 대화하고 싶은데...”
“저쪽 뒤로 돌아가면 벤치 있거든? 거기에 앉아서 얘기하자.”
“응.”
그렇게 성민이 앞장서 안내해주는 곳을 따라 희정은 가만히 따라갔다. 조명이 켜져 있는 벤치엔 다행히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겨 다가가 몸을 앉히는 성민의 옆에 희정이 자리에 말없이 앉았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성민아.”
먼저 입을 연 것은 희정이었다.
“말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하지만 오늘 너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어떤 거?”
“묻기 전에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아?”
“어...”
희정이 고개를 돌려 성민을 바라보았다.
“성민이 네가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게 정말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날 성민을 찾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때 성민은 받아주지 않았다. 물론 희정은 그럴 거라고 이미 예상을 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당장에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아도 된다고. 그 후로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고백은 받아주지 않았지만 여지를 아예 닫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희정은 성민이에게서 그걸 느꼈다.
하지만 그날 학교를 나가지 않은 성민이가 걱정이 돼서 찾아갔던 자신을 맞은 것은 설아였다. 그리고 자신이 알던 설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면모를 보았고 그 후로 더 이상 성민에게 연락도 찾아가지도 않았었다.
그만큼 설아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희정에게도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오늘 그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오늘도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학교 앞에서 설아의 반 애들이 나누던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그런 모습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뒤를 미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 들었던 얘기.
그리고 설아가 자신에게 했던 말과 눈빛.
오늘 보았던 둘의 모습.
그 모든 것이 희정에게 충격적인 그림을 그려지게 만들었다.
“희정이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다만...”
“다만?”
“당황스럽기도 했고, 나에게도 사정이 있어서 그래.”
“그 사정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어?”
“......”
“혹시... 그 사정이라는 게 설아와 연관이 되어 있는 거니?”
“어?”
순간 희정은 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당황하는 성민의 눈빛을.
“성민이 네가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멀리하지만 말아 주었으면 했어. 그리고 내 느낌이었을지 모르지만 거기까지는 성민이 너도 허락해 줄 것 같은 느낌도 받았어. 하지만 그날 너희 집에 찾아갔던 날 설아가 대신 나왔어.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설아의 말을 듣고 네가 힘들어 한다는 걸 알고 그걸 받아드리기로 했어. 나 때문에 널 그렇게 힘들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이상 연락도, 그리고 찾아가지도 않았다.
충분히 갑자기 나타난 자신으로 인해 성민이 가질 당혹스러움과 그런 불편한 마음들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희정의 입장에선 너무나 충격이었다.
“그래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 했었던 거야. 그런데... 오늘 나 봤어.”
“뭘...말이야?”
“너하고 설아가 함께 영화관을 나오는 걸. 그리고 함께 쇼핑하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는 것도.”
희정의 말에 성민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물론 나도 믿지 않으려 했어. 성민이 네가 얼마나 설아를 생각하는지 잘 아니까. 하지만 너희 학교 앞에서 기다리면서 들었던 얘기, 그날 설아가 보였던 눈빛과 말들 때문에 확인 하고 싶었어. 그래서 해선 안 되지만 미행을 해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어.”
상당히 가까운 남매라고 봐도 되지만 두 사람이 남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딱 연인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모습이었다.
“성민아, 너 혹시 설아 좋아하니?”
“뭐어?”
“아니면 설아가 널 남자로 보는 거야?”
“......”
당황한 성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희정은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성민아, 네가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어. 네가 설사 다른 여자와 사귀더라도 이해해. 내가 그걸 이해하지 못 할 처지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아는 안 돼.”
“......”
“다른 여자들은 괜찮아도 설아는 네 여동생이잖아. 성민이 네가 설아를 얼마나 위하는지 나도 알아. 중학교 때 있었던 그 사건을 알고 있으니까. 설아가 널 오빠가 아닌 남자로 보고 있는 거라면 성민이 네가 잘 못 된 길로 가지 않도록 잘 타일러야 해. 그게 쉬지 않다는 걸 나도 잘 알아. 그리고 성민이 너 역시 그런 설아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쉽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잘 못 된 선택을 해선 안 돼.”
설아는 성민의 여동생이었다.
남매사이에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관계는 두 사람을 결국엔 힘들게만 할 뿐이었다.
이루어져선 안 되는 관계.
성민과 설아는 그러한 사이였다.
“......”
자신의 말을 듣기만 하고 대답이 없는 성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희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성민아, 만약 설아가 그런 게 아닌 네가 여동생인 설아를 그런 쪽으로 바라보고 있고 끌어들인 거라면... 넌 정말 해선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거야.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네가 더 잘 알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정말 설아를 위한다면 오빠로써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 했으면 좋겠어.”
희정이 벤치에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설아 때문에 나를 멀리하는 것인지 그게 알고 싶어서 왔어. 지금 내 행동이 널 힘들게 하고 있다면 미안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되는 게 있고 해선 안 되는 일이 있어. 아무리 성민이 네가 설아를 너무 아껴서 그걸 넘어서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설아는 네 여동생이야. 설아를 진정으로 위하는 게 무엇인지 잘 생각했으면 좋겠어.”
“......”
말없이 앉아 있는 성민을 바라보던 희정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만 가볼게..”
희정은 그렇게 성민을 남겨두고 쓸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성민에게 설아가 다가갔다.
“다 씻었냐?”
“아까 전에 씻었지. 그보다 어딜 다녀오는 거야?”
“잠시 산책 좀 하고 왔어.”
“산책? 이 시간에?”
“오늘 설아 너 상대해준다고 심신이 힘들어서 힐링도 할 겸 잠시 혼자 산책하고 온 거야.”
“그럼 나하고 데이트 한 게 별로였다는 거네?”
“그렇게 되나?”
“뭐얏!”
달려들어 투닥거리는 설아를 피해 성민이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치... 진짜 한 상 저렇게 놀린다니까.”
작게 투덜거리는 설아 였지만 말과 다르게 입가엔 작은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여동생...’
방문을 닫은 성민이 문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서있었다.
희정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
그건 이미 한 차례 들었던 얘기였다.
바로 양호실에서 자신과 설아의 얘기를 엿들은 지수에게서.
그 후로 일어났던 큰일들로 인해 이미 설아와 깊은 관계가 되어 버렸다.
희정이가 말했던 그 선이라는 것을 이미 지나버린 후다.
각오를 했었다.
자신과 설아의 사이를 알게 된 지인들이 좋게 받아드릴 수 없을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수에 이어 희정이에게 이런 얘기를 듣게 되니 마치 송곳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빠로써 설아에게 해선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것.
만일 희정에게 지금 자신과 설아가 어떤 관계인지 그대로 말했다면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분명 씁쓸해 하는 것을 넘어 경멸했을 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설아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마지막으로 희정이 했던 그 말이 성민으로 하여금 죄악감을 느끼게 했다.
그날 다짐 했을 때 분명 각오 했었다. 하지만 막상 희정이에게까지 들켰다는 것과 함께 이런 말을 들으니 꿈에서 현실로 깨어난 느낌이었다.
‘난 진짜 해선 안 되는 잘 못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
설아를 받아주는 게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설아를 위하는 것이 맞을까.
설아와 자신의 미래를 장담 할 수 있을까.
정말 이대로 괜찮을 걸까.
많은 상념들이 성민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허나 무엇보다 성민을 힘들게 하는 건.
설아가 정말 자신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 할 것 같다는 얘기까지 들은 마당에 어떻게 설아를 거부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 순간의 방심이 이러한 결과를 불러왔다.
중요한 건 앞으로도 지수, 희정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