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0화 마음을 담아
“혜진아, 여기야.”
교문을 나선 혜진이와 설아는 맞은 편 건널목 편의점에 서있는 현준이가 자신을 부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성민은 물론이고, 지수, 그리고 유람이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초록불이 되자 길을 건너 네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다 모인 건 정말로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웃음을 지으며 말한 현준이 고개를 돌려 설아를 바라보았다.
“아, 안녕 설아야.”
동아리를 나가고 오랜만에 대화를 하는 거라 그런지 현준이가 조금 긴장을 한 듯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현준이 오빠.”
자신에게 인사를 해오는 현준이를 향해 설아 역시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 설아를 보며 현준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만나 인사를 건네도 설아의 태도가 차가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 그러지 않았다.
지수는 동아리실에서 설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애써 그 일은 잊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다 보였으니까, 출발하도록 해 우리.”
걸음을 옮겨 번화가로 나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엔 설아와 오랜만에 다시 만나 다들 동아리를 나가기 전 처럼 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이도 설아는 그 전에 일이 생기기 전 처럼 친근하게 대했고 표정 또한 밝았다. 동아리실에서 언제 그런 대화를 나누었냐는 듯 지수에게도 설아는 예전처럼 정말로 친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런 설아의 행동에 지수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그 때 처럼 금세 분위기가 밝아졌다.
“그래서 나도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오빤 너무 게으른 면이 있는 것 같다니까요? 아침에 거의 매일 내가 깨워주고 있으니까.”
“내 스스로 일어 날 때도 많아.”
“그건 오빠 생각이지. 오늘까지만 해도 삼일 연속 내가 깨워줬잖아? 여기에 대해서 할 말 있어?”
“뭐, 그건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까 피곤해서 그랬지. 저번주말 찜통더위였잖아?”
“월요일은 그렇다 쳐도 화요일, 수요일은 아니지 않아?”
“그때까지 피로가 간 거야.”
“오빠가 게으른거지.”
“그래, 성민이 넌 잠 좀 줄여야 해. 설아 없었으면 너 정말로 거의 매일 교무실로 불려 다녔을 거야.”
“거기에 암묵적인 침묵도 한 몫 한 거도 잊지마.”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 까지 들어오면 지각으로 쳐주지 않는 룰이 성민의 반에 생겨나 있었다. 물론 그걸 창조(?)해낸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성민이었다. 처음엔 지수가 그걸 묵과해주고 넘어가기 시작한 후로 하나 둘 지각을 했던 애들도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에 세입을 한다면 역시나 넘어가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느냐, 오지 않느냐로 지각을 했느냐, 안 했느냐로 나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좋지 않냐? 나 때문에 30분까지 쫓기듯 들어오지 않아도 되잖아.”
“그건 나쁜거야.”
“하지만 나도 그 때문에 지각을 면한 적이 몇 번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해.”
“사실 나도 그래 지수야.”
“너희들 정말이지...”
설마하니 현준이와 유람이까지 저렇게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지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와 언니들을 정말로 좋겠네요. 난 오빠가 늦어서 지각하면 그대로 지각처리 되거든요. 우리 반에는 그딴 룰 같은 건 적용되지 않아요.”
“뭣 하면 설아 네가 만들어 보든가.”
“장난해?”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바라보는 설아의 시선에 혜진이와 유람이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전에는 이런 모습이 일상적이었는데...’
옆에서 그걸 바라보는 유람이는 마임이 따스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설아가 동아리실을 나가기 전엔 이런 대화와 모습들이 늘 봐오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상적이었던 풍경이 최근까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고 오늘에서야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너무나 뭉클했다.
그건 유람이 뿐만이 아니라 혜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수 역시 그런 설아를 보고 정말로 현준이를 포기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설아가 저렇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 했을 테니까. 동아리실에서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은 정말로 진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아는 현준이를 떠나보낸 게 맞는 듯 해 보였다.
현준이 역시 이런 설아를 보고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민이가 괜찮아 졌다고 하긴 했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그 말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성민이가 했던 말이 사실인 듯 했다.
혜진이 또한 만나기 전까지 걱정했던 마음을 이젠 다 지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졌다고 했던 설아의 말은 정말로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준이와 지수, 그리고 유람이와 혜진이보다 무엇보다 안심을 하고 있는 것은 성민이었다. 일단 애들 앞에서는 팔짱도 끼지 말고 손도 잡는 것은 자제하자고 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설아가 그걸 잘 실천해 줄줄은 몰랐다.
지금 설아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정말로 자신을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는 게 사실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말 그대로 지금 자신을 대하는 설아의 행동은 달라지기 시작하기 전 바보탱이 오빠라 부르며 투닥 거리던 그때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을 버스가 아닌 지하철을 타고 번화가로 나온 모두는 오랜만에 보드게임장에 가서 함께 게임도 하고 맛있는 외식에 쇼핑 또한 했다. 남자는 성민이와 현준이 뿐이고 여자는 설아와 지수, 유람이, 혜진이까지 4명이어서 자연스럽게 쇼핑으로 정해진 것이다.
“뭔 쇼핑을 이렇게 오래 하냐? 볼 것도 이제 없는 거 같구만.”
정확히 1시간이 지났을 때 성민이 참지 못 하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가 보기엔 볼 것도 없는 것 같아도 나와 혜진이 그리고 언니들은 그렇지가 않아. 그리고 뭘 그렇게 오빠는 계속 투덜거리는 거야. 현준이 오빠를 봐. 조용하잖아.”
“야, 그건 현준이가 착해서 참고 있는 거지. 안 그러냐?”
“아, 아니... 나는 괜찮아.”
“장난하냐?! 이럴 때는 사실대로 말해야 이 고난이 끝이 난다고!”
“성민이 너 여자친구 사귀면 자주 쇼핑하러 다닐 텐데 미리 익숙해지는 게 좋지 않아?”
“그건 그때 가서 볼일이지 지금은 아니거덩?”
심드렁하게 말하는 성민의 말에 지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시간이면 나도 충분히 오래 한 것 같으니까. 그럼 우리 그만 나갈래?”
“오! 역시 유람낭자! 상처 받은 무사의 마음을 따스하게 치유해주는 건 우리 유람낭자 밖에 없구려...! 이리 오시오, 이 대해와도 같은 넓은 마음으로 내가 따스하게 안아 줄 터이니... 어서 이리 내 품으로 오시오, 소저!”
“헛소리 그만해 이 바부탱아!”
유람이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부담스럽게 입술을 내밀고 있는 성민을 향해 설아가 강하게 오빠의 엉덩이를 까버렸다.
“씁! 이게 뭐하는 짓이야?!”
“오빠가 헛소리 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오빠 엉덩이를 까는 여동생이 어디 있어?!”
“여기 있네?”
투닥거리는 성민과 설아를 보면서 유람이가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고 지수는 한 심하다는 듯 성민을 바라보았다. 현준이와 혜진이는 그 모습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
그렇게 한 바탕 작은 소동이 지나가고 다시 번화가 밖으로 나온 모두의 다음 행선지는 노래방이었다. 다 함께 노래방에 간지가 꽤나 오래 되어서 그렇게 모두가 함께 노래방으로 직행 한 것이다.
계산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제일 먼저 선곡을 한 것은 당연코 성민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번호를 누르네?”
“난 원래 첫 곡으로 부르는 걸 좋아하잖아.”
능청스럽게 대답한 성민이 그렇게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성민이 신청한 곡은 바이브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노래였다. 성민이 자주 부르는 18번 곡들중에 한 곡이었고 노래방에 오면 꼭 한 번씩 부르는 곡들 중에 하나였다.
이미 이 노래 신청 할 줄 알았다는 듯 애들은 그러려니 했다.
반주가 흐르는 동안 그렇게 차례대로 노래를 신청을 하나 둘씩 하기 시작했다.
“좋아 한다 쉬운 한 마디~ 끝내 말로 할 수 없어서~”
그렇게 성민이 노래가 시작 되자 각자 알아서 듣기 시작했다.
사실 성민은 노래를 못 부르는 편이 아니었다. 중학교 수학여행에 가서 장기자랑에 나가 남녀 각각 2명씩 뽑는 인기상을 당당히 받았을 정도로 노래 실력이 상당히 괜찮았다. 그렇게 1절이 지나고 2절을 가면서 절정을 달해갔고 성민이 노래를 끝냈을 때 유람이가 박수를 쳐주었다.
“역시 성민이 너 노래실력은 어딜 안가네?”
“당연하지~! 옛날에 상까지 받은 몸인데 실력이 어디 가겠냐?”
“넌 노래방에 갈 때마다 그 얘기하더라.”
“이런 건 얼마든지 자랑을 해야 하는 거라고.”
“네네~ 그럼 다음은 헤진이 네가 신청한 노래네?”
그렇게 성민이 끝나고 나머지 애들도 차례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현준이와 유람이에이어 지수까지 부르고 나자 다음으로 설아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설아가 신청 한 곡을 보고 성민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설아가 신청한 곡이 바로 아이유의 좋은날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저걸 신청 한 건가?’
성민은 그렇게 밖에 생각 할 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주가 흐르고 드디어 노래가 시작되었다.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건지~ ”
발랄하게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진중하게 변해갔고 그럴수록 성민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 도 못 했던 말~ 울면서 할 줄은 몰랐던 말~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우연이었을까. 그때 설아와 성민은 눈이 잠깐 마주쳤다.
“어떡해...”
우연히 마주 친 거 같았지만 성민은 왠지 설아와 눈이 마주친 게 우연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설아가 노래를 다 부르는 내내 성민은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 후로 설아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성민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설아가 부르는 노래들은 전부다 사랑고백 노래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여자랍니다~ 그대 곁에 있을 때면~
부드럽고 약해지는 마음~”
역시나 이번에도 부르는 노래는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사랑노래였다.
“난 꼭 갖고 싶어~ 그대의 마음~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봐요~
멀리서 찾지 말아요~
그대 사랑은 바로나~~!”
아무리 봐도 이건 대놓고 자신을 향한 노래를 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한 번씩 눈을 맞추는데 아무리 봐도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엔 부르는 노래들이 너무 한결 같았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걸 모르는 건가?’
계속해서 저런 노래들을 부르는 설아를 보면서 성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이상하게 성민은 긴장이 되면서도 묘한 느낌 또한 받았다. 아마도 애들 앞에서 저렇게 노래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 하는 모습 때문인지는 몰라도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도 같았다.
성민 말고 그런 설아를 보면서 조금 의아하게 보는 사람이 한 사람 또 있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지수.
‘원래 설아가 저렇게 사랑 고백 노래만 불렀었나?’
처음엔 그렇게 시작 된 의아함이었으나 설아가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그 의아함은 의문으로 바뀌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사실 현준이를 아직 잊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했었던 지수였으나 점심시간에 설아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현준이를 다시 만나 대하는 모습도 확실히 이성으로 바라보는 그런 낌새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지수는 성민이가 계속해서 설아를 주시하고 있는 듯 보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성민을 보고 다시 설아를 바라보았는데 잠깐 잠깐씩 우연인지 성민이와 눈을 맞추는 설아의 시선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다 지수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설아가 지금 부르는 저 노래가 혹시 성민이를 향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문뜩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학교애서 하도 성민이와 설아를 두고 이상한 얘기들을 하는 말을 듣다보니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거라며 지수는 금세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부정했다.
그렇게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고 마지막 한 곡을 설아가 신청 하게 됐는데 이번에 부른 노래 역시 송지은의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랑고백 노래였다.
“온통 내 세상은 그대인 걸요~
눈 감아도 그대가 떠오르죠~
내 머릿속에서 언제부터인지
떠날 생각을 않네요~”
이제 마지막 곡이라서 분위기는 많이 가라 앉아 있다고 하지만 지수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정말로 내가... 바보 같은 생각을 떠올린 걸까.’
애절하게 노래를 부르는 설아의 모습은 정말로 진지해 보였다. 처음 부를 때부터 지금 마지막까지 노래마다 분위기는 달랐지만 설아의 모습은 그러고 보면 전부 진지했던 것 같았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대와 그때도 함께였으면~
수천 번 생각해도~ 떨려오는 사람~
그대라는 한 사람 뿐이에요...”
그렇게 노래는 끝이 났고 유람이가 박수를 쳐주고 있었지만 지수는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불쾌하게 치부 했었던 애들의 말이 떠나지 않고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성민이가 여동생과 너무 붙어 지내는 거 아니냐는 그 얘기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