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34화 두 번은 빼앗기지않아(2)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성민은 설아와 희정이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신경이 쓰였다. 분명 희정이를 만나서 설아는 안 좋은 말을 할 게 분명했다. 자신에게서 희정이를 떼어놓을 작정으로 만나러 내려갔으니까. 그걸 알고 있으니 더 신경이 쓰이는 거고 설아가 어떤 말을 희정이에게 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시간을 계속 바라보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도어 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성민 역시 몸을 일으켜 집안으로 들어서는 설아에게 향했다.
“희정이 만나고 왔어?”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설아를 향해 성민은 다짜고짜 그렇게 물음을 던졌다.
“응, 지금쯤 내 말 똑똑히 알아듣고 돌아가고 있을 거야.”
“......”
설아가 대답하는 걸 들어보니 역시 상처가 되는 말을 했을 게 분명해 보였다. 굳어 있는 성민의 표정을 본 설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 지금 희정이 언니 걱정하고 있는 거야?”
“......”
성민이는 그렇다고, 또는 아니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아에게는 그게 희정을 걱정하고 있다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설아는 애써 불편한 마음을 가슴속에 억눌러 놓았다.
“걱정하지 마. 오빠 생각해서 그렇게 심한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심한얘기는 하지 않았다고?”
“그래. 다만 오빠를 포기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얘기를 했어.”
그 포기 할 수 있을 정도가 도대체 어느 정도 선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설아 딴에는 좋게 말을 했다는 얘기 같았다.
“오빠, 나 하나만 물어볼게.”
“뭘 말이야.”
“희정이 언니가 오빠를 좋아하는 건 알겠어. 그럼 오빠는 어때?”
“지금 나에게 희정이를 좋아하고 있느냐고 묻는 거야?”
“응.”
설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젠 확실히 알고 있는 성민이었다. 그런 설아에게 희정이에게 자신도 마음이 있다는 얘기를 차마 할 수는 없었다.
“좋아하는 정도 까지는 아니야.”
“그럼 관심은 있었다는 소리네?”
“......”
“하긴 그렇겠네. 관심도 없었다면 오빠가 사귀는 것에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설아가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기다려 오빠. 금방 밥 차려 줄 테니까.”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저녁을 차리는 설아를 보면서 성민은 과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을 이렇게 내버려둬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젠 분명 설아가 한 고백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었지만 설아가 잘 못 된 길로 들어서려는 걸 차단하려 현실을 직시하는 말을 해주었다. 그게 설아에게 상처를 주었을 지언 정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울면서 방을 뛰쳐 나갔어도 성민은 설아를 달래주러 가질 않았다.
하지만 오늘 자신처럼 밤을 지새운 것을 넘어 밤새 울었는지 충혈 된 눈과 눈물 자국을 보고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보고 무섭다며 차갑게 말하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던 설아를 보고 어제처럼 차마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끌어안고 있는 설아가 떨고 있다는 것이 다 느껴질 정도였기에 성민은 울면서 애원하는 설아를 살며시 감싸 안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
희정의 일을 보면서 성민은 과연 지금 자신의 이런 행동이 맞는 것인가 의문을 느꼈다. 설아는 알아서 적당히 포기 할 정도로만 말했다고 했지만, 그저 적당히 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희정이 돌아갔을 리가 없다는 걸 성민역시 알고 있었다. 분명 희정이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설아가 했을 게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설아가 바라는 대로 따라주었다. 결국 희정이는 상처를 받고 돌아갔을 게 분명했다.
뭔가 하나씩 어긋나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희정이와 헤어진 것이 어긋 낫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오늘 아침 부터 지금까지 하룻 동안의 일을 보면 분명히 어제까지의 삶과는 다른 하루였다. 그게 좋은 쪽이라면 고민을 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이건 좋은 쪽이라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빠, 그렇게 서있지 말고 앉아서 티비라도 보고 있어. 다 차려지면 부를 테니까.”
성민이 고개를 돌려 다시 설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오빠?”
자신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만 보는 성민을 설아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이게 맞는 일일까.”
“무슨 소리야?”
“어제 내 고백을 듣고 많이 생각을 해봤어. 그리고 오늘 아침에 설아 네가 잠들었을 때도 고민을 해봤어.”
성민의 말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설아가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아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충분히 알겠어... 그 마음이 오빠로써가 아니라 이성으로써 좋아한다는 걸. 그렇지만 설아 네가 어떻게 해서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됐는지는 알지 못해. 그 마음을 떨치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설아야. 그렇다고 해도 넌 내 여동생이야. 그건 주변 사람들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런데 과연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흐른다면 나도 그렇고 설아 너도 과연 행복 할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오빠 말은 지금 내 마음이 잘 못 되었다는 소리야? 그걸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런 뜻이 아니야. 다만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우리 미래를 장담 할 수 없기에 하는 얘기야.”
“다른 사람들 시선 때문에 그래? 학교에서 들었던 말들처럼 그런 것들이 걱정 되서 그러는 거야?”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럼 됐어.”
“됐다니?”
“분명 친오빠를 좋아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도 그건 잘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꼭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잖아.”
“......”
“오늘아침까지도 난 오빠를 사랑하게 됐다는 게 너무 무서웠어. 어제 오빠가 그랬으니까. 우린 남매라고. 그 말이 떠나지 않고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아 이런 나 자신이 너무 무서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젠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아. 희정이 언니를 만나러 내려 간 것도 그런 내 스스로에게 확신을 넘어 다짐을 하기 위한 것이었어.”
“다짐?”
“응, 다짐. 오빠를, 나에게 하나 밖에 없는 우리 오빠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다짐.”
“......”
“현준이 오빠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난 충격을 받았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는지 알 수도 없었지만 그것 보다는 첫 데이트 때 그런 말을 들은 게 너무 충격이었어.”
성민이 역시 그때 설아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갔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기 때문에.
“헤어지자고 한 이유가 지수 언니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땐 배신감을 느꼈어. 그렇게나 내가 좋아했었는데 그걸 몰라주고 지수 언니에게 가버린 현준 오빠가 너무나 미웠어.”
그래서 설아는 그 다음날부터 현준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었다. 지수가 성민에게 따지는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설아는 더욱더 동아리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오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내가 괜찮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아?”
“......”
성민은 물음을 던지는 설아에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오빠 때문이야.”
말없이 바라보는 성민을 향해 설아는 그렇게 말했다.
“난 그때서야 알게 되었어. 내가 힘들어 했었던 그 순간에도, 그리고 생각하지 않았었던 어린 시절에도 오빠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는 걸. 진정으로 내가 힘들어 할 때 한 상 내 곁에 있어주었던 사람이 오빠였다는 걸. 그걸 이제야 깨달았어.”
그 후로 설아는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오빠에게 핀잔이나 투덜거리지도 않았고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오빠가 자신을 얼마나 위해주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언제나 자신만을 위해주었던 오빠였으니까.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몰라. 내가 오빠를 이성으로 보게 된 게.”
설아역시 왜 오빠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확실히는 몰랐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는 오빠의 마음을 알게 된 뒤로 현준에게 얻은 배신감과 상처에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게 아닐까 생각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어찌 됐든 설아는 상관없었다.
“그런 오빠를 희정 언니가 빼앗아 가려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언제나 나를 위해 줬는데, 한 상 내 곁에 있어줬는데 그런 오빠를 나에게서 빼앗아 가는 걸 난 도저히 지켜 볼 수가 없었어. 현준 오빠와는 좋지 않게 끝났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해. 그 덕분에 오빠가 날 얼마나 위해주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내 곁에 오빠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
설아가 걸음을 옮겨 성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현준 오빠는 그렇게 지수 언니에게 빼앗겼지만, 오빠만큼은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 언제나 오빠는 내 곁에 있어 주었으니까...”
설아가 성민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우린 어릴 때부터 언제나 함께였잖아. 내 곁엔 언제나 있어주었잖아. 오빠가 날 얼마나 위하고 아껴왔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젠 내가 그걸 보답할 차례야. 오빠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제 내가 오빠에게 보답을 해줄 차례야.”
언제나 자신을 위해서 있어주었던 오빠.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하고 지병에 시달려 고통스러워 할 때도,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도 언제나 오빠가 곁에 있어주었다. 소년원에 갈 뻔한 일도 자신 때문이라는 걸 이젠 설아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오빠였다.
언제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곁에 있어 주었던 오빠였다.
그런 오빠를 다른 여자가 빼앗아 가려고 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빠만은 자신에게서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젠 다른 건 필요 없어. 내 곁에 오빠만 있으면 돼.”
자신의 얼굴에 닿아 있는 민준의 손에 설아가 힘주어 감쌌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내 곁에 언제나 있어 주었던 건 오빠 한 사람 뿐이었어. 그런 오빠가 없는 내 삶이라면 행복하지 못 할게 분명해.”
설아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주 만나고 지금까지 함께 했던 남자를 꼽으라면 분명히 오빠인 성민이 확실 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화사일로 바쁘셨으니까.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오빠를, 나만을 위해주는 그런 오빠를 빼앗아 간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