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7화 간만에 만나다
그렇게 식사를 끝낸 설아가 직접 설거지를 하겠다며 나섰다.
“이거 내가 설거지 할게.”
“아니 그래도 저녁은 내가 차렸으니 뒷마무리는 내가 해야지.”
“괜찮아. 설거지는 내가 한다고 했었잖아.”
“그래도.”
“약속했지?”
“알았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성민이 그렇게 물러나려다 말고 다시 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설아야.”
“응?”
“너... 화난 거 아니었어?”
“그런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너 어제 날 쫓아내고 그랬었잖아?”
“그냥 생각할게 있어서 그랬어.”
“진짜냐?”
“응.”
잠시 그런 설아를 바라보던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얼굴을 보고 얘기해라. 그런 행동 안 좋아.”
“미안해 오빠.”
“아니 그렇다고 사과까지 할 건 없고.”
그렇게 성민이 물러나고 고무장갑을 낀 설아가 싱크대에 있는 그릇과 접시, 수저에 묻은 음식 찌꺼기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매일 늘 해오던 설거지고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진짜 모르겠네.’
소파로 이동해 몸을 앉힌 성민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 주방 쪽을 힐끔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어제 설아의 행동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태도를 그대로 보였다. 심지어 방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오늘 아침에도 물론 식탁을 차려놓긴 했지만 깨우지도 않고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버렸었다. 그런데 또 다시 저렇게 평소처럼 행동하니 성민으로써는 도저히 설아의 기분이 어떤지 종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여자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른다더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성민이었는데 설아 덕분에 여자란 존재에 대해서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기까지 했다.
‘저 모습을 보고 화가 풀렸다고 생각 할 수도 없고...’
어제도 정류장에서 잠깐 그랬었다.
하지만 곧 저기압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성민이 과연 설아가 이번엔 정말로 괜찮아 진건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설아는 말없이 설거지를 했다.
‘오빠가 손을 잡았기 때문에 심장이 떨린 게 아니야.’
오늘 하루 종일 자기 마음대로 두근거리는 심장에 대해서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 그리고 결국 설아가 내린 결론은 갑자기 손을 잡아 놀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설아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 뒤의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린 게 아니라면, 그리고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설렘 역시 그저 오빠가 자신을 위해서 요리를 해줘서 감동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면.
설거지를 하고 있는 설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오빠가 날 위해 주었기 때문에 그래.’
순간 적으로 밀려오는 떨림을 설아는 다시금 애써 무시하며 지나처 버렸다.
그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차마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거기에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하지만 설아는 무조건 말이 안 된다는 쪽으로 계속 찾아오려는 그 생각에 대해서 멀리 밀어냈다.
그렇게 설아는 다시 설거지에 집중하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빠 차 한 잔 마실래?”
“차? 그야 좋지~!”
“기다려.”
설거지를 끝낸 설아가 그렇게 녹차 두 잔을 타서 거실로 가져갔다.
“잘 마실게!”
건네주는 찻 잔을 받아든 성민이 입김을 불며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여동생이 타주는 차 한 잔이 최고라니까~!”
싱긋 웃음을 지은 생민이 설아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 해. 타줄 테니까.”
“진짜냐? 그럼 이거 다 먹고 또 타달라고 해도 타 줄 거냐?”
“오빠가 원한다면 타줄게.”
“햐~ 감동인데?”
“그걸로 감동받을 거 없어.”
“아니야, 오라버니를 위해서 이렇게 차까지 받치며 노력하겠다는데 당연히 감동이지!”
그렇게 말한 성민이 잘 했다는 듯 설아의 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이렇게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줄 때마다 설아는 자신이 강아지냐며 투덜거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야.”
“응?”
“너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냐?”
“뭐가?”
“보통은 이렇게 쓰다듬어주면 내가 강아지냐며 화를 냈었잖아.”
“그래도 오빠가 쓰다듬을 꺼잖아.”
“그래서 포기 한 거라고?”
“......”
“그럼 이제 쓰다듬고 싶을 때마다 쓰다듬어도 되냐?”
“몰라, 오빠 마음대로 생각해.”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고 계속 그러지마.”
“알았어, 알았어. 이 오라버니가 기특하다 싶을 때 마다 칭찬으로 쓰다듬어줄게~!”
“뭐야 그게?”
새침하게 바라보는 설아의 시선에 성민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렇게 평소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갔다.
“오빠.”
“응?”
“내일도 아르바이트가?”
“어. 사장님이 또 오라더라.”
“알았어.”
“잘 자라~!”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성민.
설아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동안 그렇게 성민이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리도 다음날 아침.
“오빠~! 언제까지 잘 거야!”
설아는 평소처럼 잡고 있는 성민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역시나 한 번 잠들면 잘 일어나지 않는 오빠의 특성을 잘 알기에 설아는 좀 더 세게 흔들었다.
“나 아르바이트 가야 한단 말이야! 안 일어 날거야?”
“10분만... 나 피곤해.”
“안 돼! 오빠 오늘도 아르바이트 간다며? 그렇게 게으름 피우면 어떡해?”
“설아야. 어제 오빠가 진짜 열심히 땡볕에서 알바 했거든? 나 10분만 더 자자.”
“안 돼. 어서 일어나.”
계속해서 흔들어 깨우는 설아의 행동에 성민이 여전히 잠에 취해 눈을 감은 상태로 한손을 들어 올리더니 엄지와 검지를 교차하며 설아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 줄 알지? 오빠가 너 진짜 많이 사랑하니까 너도 오빠를 위한다면 10분만 더 자게 해주라~!”
“......”
“10분 후에 일어날게. 잘 자라...”
그러고는 몸을 옆으로 틀어 버리는 성민이었다.
등짝을 내민 채 벽보고 누워 있는 성민을 설아는 더 이상 깨우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으음...”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잠에서 일어난 성민이 손을 뻗어 폰을 잡아 시간을 확인 했다.
“8시가 다됐네?”
다시 폰을 내려놓은 성민이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겨 거실을 나갔다.
“좋은아침~!”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설아를 보고 성민이 그렇게 인사를 했다.
“일어났네?”
“응. 그런데 너 몇 시에 나 깨우러 왔었어?”
“7시 30분에.”
“뭐야? 그러면 30분이나 더 잤네?”
“오빠 피곤해 보여서 8시에 깨우려고 그랬어.”
“그래? 그런데 설아 너 9시까지 가야 한다며?”
“30분 안에 나가면 돼.”
“밥은?”
“오빠하고 같이 먹으려고.”
“이거 괜히 미안해지는데...”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난 설아가 주방으로 향해 밥그릇을 꺼내 밥 두 공기를 담았다. 수저를 챙겨 식탁에 놔두고 반찬덮개를 걷어냈다.
“국 떠줄게 오빠.”
새로 끓인 얼음을 띄운 냉국 두 그릇을 떠서 각자 자리에 앞에 하나씩 놔주었다.
“오늘은 냉국이네?”
“날씨가 더워서 만들어봤어.”
“센스 죽이는데?”
수저를 들어 한 숟갈 떠먹으니 시원한 한기가 입안을 맴돌았다.
“많이먹어 오빠.”
“걱정마 말하지 않아도 많이 먹어 줄 테니까~!”
아주 좋게 아침식사를 시작한 성민은 문득 이제 정말로 설아 기분이 나아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안 먹어? 30분 안에 나가야 한다며?”
“먹을 거야.”
아직도 수저를 들지 않는 설아가 그제야 숟가락을 들어 냉국을 떠먹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오빠. 그런데 무슨 아르바이트 한다고 했어?”
“너 밤에 오빠가 말해줄 때 제대로 안 들었지?”
“미안해. 생각 좀 하느라.”
“아니 미안 할 것 까지는 없고. 인형 탈 아르바이트 하고 있어.”
“인형 탈?”
“거개 홍보도 하고 전단지도 나눠주면서 손님들 이목을 끄는 거야. 길 걸어 다니다 보면 한 번씩 보이잖아.”
“응.”
설아 역시 번화가에서 몇 번 인형 탈을 쓰고 홍보를 하던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많이 덥지않아?”
“말도마라. 찜통이다 찜통. 왜 여름에 안하려고 하는지 알겠더라니까.”
“그런데 왜 오빠는 그걸 해?”
“일당이 좋잖아.”
“아르바이트 하는 거 저번에 내 말 때문에 그런 거지?”
“그런 셈이지. 네가 열심히 마음먹고 하고 있는데 나 혼자 빈둥댈 수는 없잖아.”
“응.”
그렇게 성민이 다시 남은 밥을 먹으며 깨끗하게 비웠다.
“너 안 먹어? 벌써 20분 다됐는데.”
또 다시 먹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 성민이 의아한 듯 말했다.
“지금 먹을 거야.”
20분이라는 말에 설아가 급하게 남은 밥을 다 먹었다.
“오빠, 설거지는 다녀와서 내가 할 테니까 내버려둬, 알았지?”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설어가 먼저 집을 나섰다.
“정말로 괜찮아졌나보네.”
설아가 나간 현관문을 바라보며 성민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성민이는 오랜만에 주창이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향했다.
“여~ 그동안 연락도 없던 놈이 살아 있었네?”
“너야 말로 그 학교 가서 죽은 줄 알았어, 임마.”
오랜만에 만나 친우와의 제외를 뒤로 하고 성민이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전에 나 샤워 좀 하자.”
“샤워? 그러고 보니 너 땀으로 쩔었네?”
“아르바이트가 빡세더라.”
“도대체 뭘했길래..."
고개를 가로저은 주창이가 가보라는 듯 말했다.
그에 성민이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부모님은?”
“내일 오셔.”
“진짜?”
“그래. 그것 보다 이거 입어. 너 땀에 쩔었는데 그 옷 입지 말고.”
“땡큐~”
주창이가 건네준 옷으로 바로 갈아입은 성민이 소파로 이동해 몸을 앉혔다.
“너 학교생활을 할 만하냐?”
“그런대로.”
“현준이하고 잘 지내고?”
“뭐 그렇지.”
주창이 역시 성민이 중학교 때 현준이와 잘 어울려 다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주창이는 현준이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성민이가 친하게 어울려 지내길래 알게 된 것 뿐이었다.
“내일 학교도 가야하는데 이렇게 아깝게 시간을 허비 할 수는 없지.”
그때 주창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어디가냐?”
“기다려봐 임마.”
그렇게 주방 쪽으로 향한 주창이가 작은 잔 두 개와 함께 양주로 보이는 병 하나를 들고 왔다.
“너 술 마시냐?”
그 모습에 성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 한 번씩.”
옆에 앉은 주창이가 양주를 내밀었다.
“어기 아버지 건데 비싼 거야. 손대면 안 되는 건데 너 진짜 오랜만에 봐서 내가 혼날 거 각오하고 꺼내 온 거야.”
“나 술 안 먹는데.”
“한 두 잔은 괜찮아. 받아.”
계속해서 권유를 하는 주창이의 말에 성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잔 받았다.
어른이 주는 건 괜찮다며 18살이 되었을 성민은 아버지가 주는 약주 한 잔을 받아먹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술은 일제 손대지 않았었다.
“죽이지 않아?”
입에 털어 넣은 성민은 바로 퍼지는 독한 향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냥 쓰기만 한데?”
“네가 아직 맛을 몰래서 그래. 먹다보면 알게 돼.”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주창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 성민이 결국 둘이서 양주 한 병을 다 비워 버렸다.
“큰일났네.”
먹다보니 취기가 오르고 양주 한 병을 다비웠을 때에서야 주창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너 내일 아버지에게 죽는 거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지. 어떡하지?”
“그냥 혼나 새꺄~”
“네일 아니라고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방법이 없는데 뭘? 가만 보자... 시간이 늦었네? 나간다.”
“이게 어디서 혼자 발 뺄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 입으로 향하는 성민의 목을 손으로 감아버리는 주창이.
“놔, 새꺄.”
“빠져 나갈 수 있으면 나가봐~!”
“오냐.”
그렇게 성민은 빠져나가려고 용을 쓰고 주창이는 놔주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 결국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너 취했어, 임마.”
“너도 취했잖아.”
천장을 올려다보는 둘 모두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누워 있던 주창이가 상체를 일으켰다.
“간만에 만났는데 오늘은 넘어가 줄게. 한 번 혼나고 말지 뭐.”
“미친놈...”
피식 웃음을 지은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창이는 어느새 땀이 말라버린 자기 옷으로 갈아입는 성민이를 바라보았다.
“간다.”
그렇게 옷을 다 갈아입은 성민이 신발을 신고 인사를 한 후 현관문을 나서려했다.
“성민아.”
그때 뒤에서 주창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냥 보내주려다 또 마음...”
“나 희정이 하고 헤어졌다.”
순간 성민의 몸이 멈칫했다.
“어제 헤어졌어.”
“......”
“그 때문에 오늘 연락 한 거야.”
“......”
“너 희정이 좋아 했잖아. 나 희정이 한 테 고백하고 나중에 가서 너도 걔 좋아 했다는 거 알았어. 내가 사귀고 있어서 그동안 모른 척 했었어. 나도 그만큼 희정이를 좋아 했으니까.”
“이젠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이쪽은 돌아보지 않고 다시 문을 나서려는 성민을 보며 주창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희정이 말이야. 사실 너 좋아 했었다더라.”
“......”
“예전부터 짝사랑 했었데. 하지만 네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것 같아 보여 포기 하려는 심정으로 내 고백 받아주었다고 말해주었어. 그리고... 걔 지금도 너 못 잊고 있어.”
“......”
“그 때문에 오늘 너 부른 거야. 간만에 얼굴도 볼 겸.”
성민은 잠시 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갈게.”
이어 한 마디 남기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동안 나, 뭐 한 거냐.”
다시 거실에 대짜로 누운 채 멍하니 중얼거리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주창이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