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235화 (235/236)

***

(EP.235)[정령사] 그 뒤

모든 것이 사라졌다.

굴레도,

운명도,

여신도,

…에릭마저도.

***

“아, 에르티나 씨. 고마워요.”

“뭘요. 별 거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에릭을 향해 웃었다.

딱히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저 저녁시간이 되어 모닥불을 대신 지펴줬을 뿐이다.

…나도 할 수 있는데.

원래는 내가 하는 역할이었다.

저 옆에서 에릭의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나였어야 했는데….

내가 정령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 전에, 고생하며 처음으로 바깥에서 불을 피웠을 때 에릭이 감탄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날 이후, 항상 파티의 모닥불은 내가 담당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내가 아닌 에르티나가 그 역할을 대신 하고 있다.

나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대체 어떻게?

무슨 낯짝으로 내가 저 사이에 끼어든단 말인가?

나는… 에릭을 배신한 더러운 년인데.

세리아나 아린과는 다르다.

그녀들은 적어도 에릭의 연인이었던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나는 에릭의 연인이었으면서도 그를 배신했다.

내 손은 어느 샌가 내 손가락을 더듬고 있었다.

왼손 새끼손가락.

이곳에는 아무런 반지도 끼어있지 않았다.

에릭이… 에릭이 나한테 선물했던 반지.

그 반지는 지금 어딨지?

그에게 있다.

그 남자.

에릭을 상처 입힌 남자….

당장이라도 반지를 뺏어오고 싶지만, 그는 지금 내 정령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다.

평소라면 닿았을 텐데.

아직 정령들이 온전하게 돌아온 것이 아니라 멀리 갈 수가 없다.

왜… 왜 못 닿는 거야….

반지가… 나는 반지가 필요한데….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내 손가락이 어느새 약지를 툭 건드렸다.

“…….”

약지 손가락.

여기에는 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화를 참지 못하고 던져버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후회된다.

던지는 게 아니라 완전히 박살냈어야 했는데.

아니야, 박살내는 정도로는 부족해.

긁적.

무언가….

긁적긁적.

박살내는 것보다 더… 가루만 남게 산산조각 내서….

긁적긁적긁적.

그 가루들을 모아 다시 불에 태워버렸어야 했는데.

북북….

“읏…!”

손가락에 격통이 들어 내려다보니 어느새 내 왼손 약지 손가락이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살점.

나는 그의 반지에 닿았던 내 살점만 긁어서 벗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령으로 살짝 지혈을 하면서 에릭의 모습을 살폈다.

에르티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에릭.

얼굴에는 그늘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왜…?

에릭은,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언제… 언제 이렇게 성장해버린 거야?

에릭은… 내가 없으면 안 됐는데….

내가 지켜줘야 했는데….

어느새 내 손은 또 손가락을 긁고 있었다.

“흐윽….”

지켜주지도 못했고,

나는 지킬 자격도 없었다.

상처에 손가락이 닿아 아팠다.

***

“저번에 들렸던 마을을 지나서 가죠. 그 편이 더 빠를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둘은 또 대화를 나누고 있다.

우리 셋은 뒤에서 죽은 듯 따라가고 있고, 오직 둘만이 활발하게 대화를 나눈다.

에릭이 계속 신경써주고는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는 독이 되었다.

분명… 분명 저 자리는 내 자리였는데.

왜 그녀가 저기에 있지?

왜 스승이 제자의 자리를 뺏는 거야?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냐, 나는… 나에게는 자격이 없잖아.

이제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

“…….”

그 때 에르티나가 나를 본 것 같았다.

에릭에게 작게 무어라 말하는 그녀.

곧 에릭도 나를 바라봤다.

“…….”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왜 나를 보면서 작게 얘기하는 거야?

들어볼까.

정령을 쓰면 분명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나를 욕하고 있는 거라면?

더럽고 추악한 년이라고 나를 욕하고 있다면?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나는 그런 여자니까.

어릴 때부터 함께 했던 에릭을, 고작 몸을 몇 번 섞은 것으로 배신해버렸다.

그동안 쌓아올렸던 추억과 애정과 사랑이, 기껏 육체적인 쾌락 하나를 못 이겨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에릭을 탓할 수가 있겠는가.

에릭….

이제는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구나.

나는 안 되는데….

좀처럼 아물지 못하는 손가락의 상처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그를 생각했다.

그 남자.

나를 말로 꾀어 에릭을 배신하게 한….

아냐, 이건 내 잘못이잖아.

남의 탓을 하면 안 된다.

…하지만, 그 남자만 없었더라면.

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남자만 없었더라면, 에릭과 내 사이가 갈라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이렇게 괴로워할 일도 없었을 텐데.

나도 나쁘지만… 그가 더 나빠.

…그렇지?

***

“나는 여기에 남을 거야.”

“…뭐?”

귀를 의심했다.

성대한 환영식이 벌어진 후로 3일.

중요한 일은 거의 다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세리아는 마탑으로,

아린은 교회로,

그리고 나와 에릭은 고향으로.

그렇잖아?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촌장님께 안부 잘 전해줘.”

“…왜?”

왜 나랑…

아, 그렇구나.

나 같은 년이랑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구나.

“…알았어.”

“유니, 오해하지 말아줘. 나는….”

“아냐… 에릭도, 분명 그러는 게 더 좋을 테니까….”

그래, 우리 고향은 아무 것도 없는 촌동네니까.

마을 사람들은 에릭을 은근히 무시하고, 마을에서 아군이었던 것은 우리 가족 뿐.

하지만 이제는 나마저도 그를 배신하고 말았다.

에릭이 우리 마을에 정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다.

“…유니.”

내 얼굴을 본 그는 고민하는 얼굴로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나를 잊어줘.”

“…….”

그 날, 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유니, 우리는 서로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지만 서로가 서로의 존재이유가 되어서는….”

“…….”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싫어진 거구나.

내 마음 속에서도 존재하고 싶지 않은 것이구나.

돌아가는 길에 에르티나도 나를 붙잡고 뭐라고 더 얘기했던 것 같지만, 모르겠다.

이미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유니, 그의 말을 오해….”

“…….”

이제 나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

“유니, 무사했구나!”

“유니!”

고향에 돌아가자 마을 사람들이 성대하게 환영해주었다.

에릭이 없다는 것에 다들 당황하긴 했으나, 어차피 속으로는 다행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겠지.

그렇게나 그를 무시해놓고서, 영웅이 되어 돌아온 그를 환영하자니 그들도 부끄러울 것 아닌가.

염치가 있어야지.

…그래, 염치.

나에게도 에릭을 환영할 자격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래. 에릭은… 수도에 남았구나.”

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이야기는 전부 빠졌다.

그가 왜 나를 버렸는지.

왜 내가 그를 붙잡지 못했는지.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물어보지는 않으셨다.

“어쨌든 얼굴을 보니 반갑구나, 유니. 고생했다.”

나는 그렇게 마을에 돌아왔다.

마을을 떠날 때는 과연 우리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이라 마을 사람들은 나를 대신할 촌장 후보를 미리 선정해뒀다.

그렇지만 내가 돌아오게 되니, 그는 다시 자리를 내어줘야 하는 셈.

이로 인해 조금의 문제가 있었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부인이 아이도 임신했다.

그에 비해 나는 결혼도 안 했고, 무엇보다 여자다.

이런 점들이 강조되어 나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내가 에릭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결국 다시 자리는 나에게 돌아왔다.

친분이라.

이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는데.

아마 내가 에릭이 바라는 마족과의 융화를 나름대로 돕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근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예전에 보여주었던 모습들도 있고.

지금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서로에게 닿아있다거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아닌데.

전부 사실이 아니다.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에릭의 생각에 공감했다기보다는 반 쯤 의무감이었던 것 같다.

매일 에릭을 그리워하고, 제렌을 탓하고.

그러면서 어떻게든 무언가 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우리 마을은 다음 선정지의 후보 중 한 곳이 되었다.

정말로 선정된다면 이 마을도 사람들로 북적이겠지.

지원도 이것저것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에릭을 어떻게 대해야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고, 그 남자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라와 에르티나가 우리 마을에 찾아왔다.

“오랜만이네, 유니. 그리고 그 쪽은 이 마을의 촌장님?”

“그렇습니다.”

후보지를 직접 찾아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세라와 그녀의 밑에 있는 음마들 몇만 찾아올 예정이었는데, 에르티나도 무슨 일에서인지 동행했다.

“유니.”

“…….”

나는 그녀를 보자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에르티나.

그녀는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나하고는 다르다.

그녀는… 어쩌면 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나다.

더럽고 비루한 나와는 다른 나.

“그럼 우선 마을을 좀 둘러볼까요?”

“아, 네… 그럼 이쪽으로….”

그렇게 그녀들은 반나절 정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을 확인했다.

“네, 확인했고 저희는 내일 다시 돌아가 볼게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사실 시찰 자체는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만 곧장 돌아가기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으므로 하룻밤 묵어갈 뿐.

무엇 이유에서였는지 에르티나는 우리 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유니.”

“…네.”

간만에 만나는 그녀는 예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동안 잘 지냈나요?”

잘 지냈냐라.

과연 나는 잘 지낸 걸까?

“잘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마음고생이 심한 모양이군요.”

“그건….”

잠시 그녀를 보았다가,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말을 흐렸다.

“저를 미워하고 있나요?”

“아, 아니에요…!”

하지만 거짓말은 소용없다.

이미 그녀는 다 보고 있으니까.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녀를 볼 때마다, 어쩌면 내가 저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남자만 아니었어도….

내가 조금만 더 잘했어도….

에릭….

에릭이 없는 지금의 나는, 도대체 왜 살아가는 걸까.

“유니, 그 때… 용사가 했던 말 기억해요?”

“…네.”

자신을 잊어달라는 그 말.

분명… 기분 나쁜 거겠지.

나 같은 더러운 년이 계속 에릭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분명 기분 나빴던 것이리라.

“역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군요. 지금이라면 저의 말을 들어주시겠나요?”

“…무슨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 때도 에르티나와 에릭이 무언가 더 말을 했었지.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신은 너무 그에게 집착하고 있어요.”

에르티나는 내 손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계속 그만을 바라보고 살아와서,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거죠.”

“…그게 뭐가 문제죠?”

나와 에릭은 어릴 때부터 함께였는데.

내가 에릭이고 에릭이 곧 나였는데.

“그럼 당신이 없잖아요.”

“…저요?”

내가 없다니?

“지금 당신의 마음에서는 집착과 원망밖에 보이지 않네요. 당신이 보이지를 않아요.”

“…….”

에르티나는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자신의 말을 이해해달라는 마음으로.

“벗어나세요. 그것들은 당신의 본질이 아니에요. 그런 것들이 아닌… 유니 당신을 마음속에 담아주세요.”

…여전히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왠지 무언가 알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부디 스스로 벗어나길 바랄게요.”

벗어나라.

벗어나라….

어째서인지 그 말만이 계속 가슴에 남았다.

***

그 뒤로도 나는 계속 촌장 대리로서 일했다.

후보지 선정 건은 잘 풀려, 우리 마을은 인간과 마족의 융합을 위한 그 다음 선정지로 뽑혔다.

덕분에 해야 할 일도 무척이나 늘어났다.

우선 우리 모두가 마족의 생태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만 했고, 또 그들이 살 집이나 각종 시설들도 지어야 했다.

지원금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잘 따져봐야 했고.

정말 무척이나 바쁜 날들이었다.

해가 뜨기도 전부터 일어나 아버지와 같이 하루종일 검토하고, 수정하고, 진척을 확인했다.

모두가 마족을 받아들이는 것에 찬성한 것은 아니라, 그들을 설득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야말로 하루가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마을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가끔 괜히 일을 만든걸까 후회도 했지만, 적어도 아버지나 많은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뭐, 사람이 늘어나면 좋은 일이지.”

“아무튼 지금이야 힘들지만 나중에는 더 좋아지지 않겠어? 폐하도 기대하고 계신다던데.”

미래.

그들은 미래를 보며 지금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럼 나는?

나는 무엇을 보고 있지?

땀으로 온몸을 흠뻑 적시며 노동하는 그들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과거만을 보고 있었다.

에릭을, 제렌을.

에릭을 생각하며 후회했고,

제렌을 생각하며 분노했다.

마왕성에서 돌아오는 내내 그랬다.

그렇지만 지금 문득 바라본 내 왼손은 깨끗했다.

에릭이 주었던 반지.

수도에서 마탑에 갇힌 그를 만나 받아내려고 했지만, 이미 그 때는 에릭이 나를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해 받으러가지 못했다.

바쁘다보니 반지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

반지보다도 새로운 주민들을 받아들일 계획을 궁리하는 것이 더 먼저였다.

지금 보니 약지 손가락도 완전히 상처가 아문 뒤였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손가락을 완전히 파내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마지막으로 긁어낸지도 한참이 지났다.

…그렇구나.

이제 그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구나.

어느새 나는 에릭을 그리워하고 있지도 않았고, 제렌을 원망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바빴으니까.

전에는 하루라도 그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지금은 그러지 않고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짓궂은 농담도 가볍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벗어나라.

그렇구나.

이런 뜻이었던 건가?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겨우 이해했다.

에릭에 대한 집착, 제렌에 대한 원망.

그것들은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정작 에릭은 나를 원망하고 있지 않았고,

제렌에 대한 원망은 그저 내 잘못에서 눈을 돌리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잊어달라고 했구나.

에릭이 수도에서 했던 얘기도 그제야 이해했다.

에릭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나를 위한 사과가 아니라 그를 위한 사과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제렌에 대한 원망을 버림으로써 내 잘못에서 눈을 돌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

나는 이제야 에릭과 마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밑이 아니라 그의 옆에서.

잘못을 반성하고 그 고통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는 자리에서.

나는 그렇게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우던 것들을 전부 정리할 수 있었다.

무언가가 뻥 뚫리는 느낌.

오랫동안 내 가슴을 채워오던 것이 사라져버렸다.

그래, 비어버린 것이다.

“유니!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네, 지금 가요!”

비어버렸으면 다시 채울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에릭과 내가 다시 연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연인이 아니라 친구라면?

다시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걸까?

그날 밤, 나는 자기 전에 짧은 편지를 한 통 작성했다.

편지의 내용을 하루 종일 고민했지만, 막상 쓰는 것은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몇 년 동안이나 고민했으니까.

기교도, 수식도 필요 없다.

그저 내 생각만을 적었다.

그렇게 다음날 보낸 편지는, 약간의 시간을 거치고 돌아왔다.

“유니, 편지 왔다.”

“혹시….”

“에릭한테서구나.”

두근거리는 가슴.

떨리는 손.

과연… 에릭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더러운 년이 이제 와서 착한 척한다고 보이지는 않았을까?

내가 다시 그에게 돌아가려고 하는 것처럼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걱정되는 마음으로 연 편지에는 짧은 문장만이 적혀있었다.

고마워.

그 말을 듣고 싶었어.

“흑, 흐윽….”

그 날은 하루 종일 울었던 것 같다.

***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

에릭이 우리 마을을 찾은 날.

나는 마을의 언덕에 앉아있었다.

이 언덕에 앉아있으면 마을의 모습이 무척이나 잘 보인다.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결코 멈춰있지는 않았다.

마을은 변화하고 있다.

우리도 변화할 것이다.

저벅저벅.

몇 년 만에 듣는 발걸음 소리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달라지지 않은 부분도 있구나.

“…안녕, 유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안녕, 에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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