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234화 (234/236)

***

(EP.234)[신관] 그 뒤

모든 것이 끝났다.

오랫동안 이어진 용사와 마왕의 대립이.

여신이 만든 굴레가.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신앙이.

…나와 용사님의, 관계가.

“아, 아으….”

나는…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를 비웃고, 매도하고…

항상 경건해야 할 신관이 옷을 벗고 남자들 앞에서 춤추고…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할 몸을 마치 창녀처럼….

“아, 아아악!”

유니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내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우는 것으로 나 또한 깨달아버렸다.

이미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러버렸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나는 어떻게 용사님의 얼굴을 봐야하지?

***

처음에는 살짝 못미더웠다.

여신의 사명을 받고 모든 마물들의 정점에 오른 마왕을 죽이기에는 너무 연약한 남자였다.

마물 하나 못 잡을 때는 솔직히 잠깐 한심하다고도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같이 지내다보니 왠지 모르게 그에게 끌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유 같은 건 찾을 필요 없다.

그저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이해했다.

…설마 이것도 거짓이었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별 다른 계기도 없는데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아냐,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원래… 사랑을 하는데 이유 같은 건 필요 없는 거야….

어디 이름 모를 연애 소설에 나오는 대사였지만 지금은 그 말이 너무나도 와 닿았다.

분명 굴레… 의 탓은 아닐 것이다.

그래, 나는 아무튼 그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리아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었지만, 유니가 있어 우리는 포기하려고 했다.

그녀가 우리에게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 기회를 최악의 형태로 되돌려준 것은 누구였지?

용사님의 호의를 잔인한 악의로 뒤덮어 돌려준 것은 누구지?

나.

바로 나다.

나는 용사님의 인격을 모독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가 진정한 용사로 각성하는 것마저 짓밟으려고 했다.

용사님….

여신도 믿을 수 없게 된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인데.

“…죄송해요.”

지금의 나는… 그에게 의지할 수조차 없다.

“아린.”

“…용사님.”

수도로 돌아가던 어느 날, 그는 푸석푸석한 머리로 일어난 나를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아차.

잠들지 못해 밤을 새느라 머리가 푸석푸석해진 것인데, 설마 용사님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었나?

생각해보니 용사님에게 상처를 줬을 때 주로 이런 머리였던 것 같다.

용사님에게 어떻게 보이든 상관이 없어져 꾸미지도 않은 맨 머리로 맞이했던 그 당시.

“아, 아아… 미, 미안해요…! 정말, 정말로… 지, 지금 당장… 당장 씻고 올 테니….”

“아냐, 괜찮아. 난 정말 괜찮으니까 진정해, 아린.”

내, 내가 용사님한테 안 좋은 기억을…!

“저, 저는 용사님을 상처 입히려던 게… 흐윽, 이, 이 머리가… 이 머리 때문에…!”

“아린! 나는 정말 괜찮아.”

용사님이 내 어깨를 붙들고 소리친 뒤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을 듯 잡아당기던 내 손은 그제야 멈출 수 있었다.

“…읏, 흐윽… 죄송해요… 죄송해요, 용사님….”

“아린….”

나는, 용사님께 그저 사과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거 밖에 없으니까.

남은 건 오직 이것뿐이다.

사과를 하면 언젠가 용사님이 다시 나를 돌아봐 주실 것이다.

아니, 그런 짓을 저지른 주제에 염치없이 이런 소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저… 그저 나를 욕하고 더 원망해주셨으면.

차라리, 그 손으로 뺨이라도….

“더 이상 나한테 사과하지 말아줘, 아린.”

“…네?”

그런데 어느 날, 용사님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사과를… 하지 말라고?

그럼…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그 마음은 이해해. 그렇지만 나는 정말 괜찮고, 아린도 더 이 일을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그럴 수는….”

안 돼.

나는… 나는 용사님께 사과해야만….

사과를 하지 못하면… 나는… 나는 뭐가 되는 거지?

신에 대한 믿음도 잃어버렸고, 신관으로서의 자세도 갖추지 못한 나는 더 이상 신관이 아니다.

그럼 나에게 남은 게 뭐가 있지?

변태? 쓰레기? 배신자?

“…정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하겠으면.”

용사님은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

“네, 네! 마, 말만 하세요…!”

용사님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을 자신이 있다.

무릎 꿇고 사과하라면 당장 옷이라도 다 벗고 사과할 수 있고,

평생 용사님의 곁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라면 그렇게….

“아린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면서 살아줘.”

“……네?”

내가… 하고 싶은 것?

“아린, 원래는 무엇을 하고 싶었어?”

“저, 저는….”

나는 무엇을 하려고 했지?

애초에 다른 목적을 갖고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저 여신님… 아니, 여신이 나에게 계시를 내린 것. 그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목표라던가, 그런 건 없었다.

“저, 저는 그냥…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만약 계시가 오지 않았다면?”

“그, 그랬으면… 계속 교회에 남아있었… 겠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계속 기도하면서,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여신을 섬기고 있었으리라.

“저, 저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심코 그에게 그런 말을 꺼내고 말았다.

안 돼.

이런 얘기로 용사님을 고민하게 만들 수는 없어.

안 그래도 나 때문에 힘드셨을 텐데, 내가 더 부담을….

“흠….”

“시,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저 같은 년이 하는 말은 듣지 않으셔도….”

“나는 말이야.”

하지만 용사님은… 너무나 친절하게도 나 같은 더러운 년이 하는 말도 전부 주의 깊게 들어주시는 것이었다.

“…세라 씨를 도우려고 해.”

“네?”

“마족들의 마을을 지나가면서 느꼈어. 역시… 그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분명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이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왜… 그런 여자한테….”

세라는 우리의 적이었는데….

아니,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용사님을 배신한 우리 같은 년들보다는, 적이면서도 용사님을 도와준 그녀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적보다도 못하구나, 나는.

용사님의 동료였는데도 오히려 적보다 더 나쁜 년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아린도, 분명 하고 싶은 걸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런 거….”

그런 것은 더 이상 없어요, 용사님.

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음… 정 생각나는 게 없고, 잘 모르겠으면.”

용사님은 내 표정을 보더니 살짝 농담조로 그렇게 말했다.

“나랑 같이 우리의 일을 도와주는 건 어때?”

“제가… 용사님을….”

용사님을… 도와?

용사님 곁에서 속죄를… 아니, 건방지게 옆에 서겠다는 생각 따위를 해서는 안 된다.

그저 멀리서라도… 아니, 용사님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도 좋다.

용사님을 떠받치는, 용사님 밑의 발판 같은 존재.

그래, 그거면 된다.

감히 일어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용사님 밑에 웅크려,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용사님을 도와드리는 것.

그거면 된다.

“…네.”

“아, 물론 강요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이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렇게 할게요.”

내 남은 삶을 모두, 당신에게….

***

“아린 자매님, 그… 취지는 이해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다고나 할까요….”

맞은편의 그들은 곤혹스럽다는 태도로 나를 말렸다.

왜?

왜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지?

용사님이 이것을 바라시는데?

“마족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용사님이 그것을 바라시니까요.”

“아니, 그… 용사가 여신님의 선택을 받은 존재라는 것은 알지만….”

그나마 온건한 이는 나를 설득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내 믿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고작 그런 말 몇 마디로는 나를 설득할 수 없어.

“교단의 문을 그들에게도 개방하고, 교회가 진행하는 구호사업의 범위를 마족까지 포함시켜 더 넓혀야 합니다.”

“아린 자매! 너무 지나친 주장이야!”

결국 몇몇 신도들은 나에게 화를 냈다.

“자네는 대체 여신님을 섬기는 건가 아니면 용사를 섬기는 건가?”

존재하지도 않는 여신보다, 우리를 농락하고 사라진 여신보다 용사님을 섬기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미 여신에 대한 믿음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용사님의 눈에 띠지 않으면서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소가 여기 교회이기 때문.

“성서에도 마물들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얘기가 적혀있네. 어차피 용사라고는 해봤자 성서를 읽어본 적 없는 무지렁이….”

쾅!

나는 순간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크게 내리치고 말았다.

“그딴 여신보다…!”

…용사님의 존재가 더 가치있다고.

하지만 이 말은, 내가 교회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싸늘하게 얼어버린 실내.

다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

나는 그런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회의실을 뒤로 했다.

당신들은 아무 것도 모르니 그렇게 속 편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

“후우… 아린 자매. 분명 약속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이례적으로 교황이 참석하는데다 비공개로 진행되는 심문회.

티끌만큼도 남지 않은 내 신앙심을 검증한다는 명목으로 교황부터 좀처럼 얼굴 볼 일이 없는 고위직 신관들이 모조리 참석한 무척이나 무거운 자리다.

하지만 그것들이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다들 존재하지도 않는 여신의 공허한 권위만을 등에 업은 늙은이일 뿐인데.

“여신님이 사라지셨다… 그래, 그 얘기는 지금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하지. 이 이야기가 불러올 파장도 어마어마할 테고.”

“네.”

여신이 없다.

이 사실은 교회의 근본 그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당연히 교회가 이 사실을 공표할 리가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뿐.

그 밑에는 철저하게 진실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사정을 이해하는 만큼 참작은 해주지만, 세간의 시선이라는 것이 있으니 처벌은 불가피할 거야. 이해하나?”

“네.”

교회가 용사님을 돕기 위해서는, 내가 이 집단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도망치지 말고 어떻게든 버텨야겠지.

게다가 이정도 처벌은… 용사님이 받으셨을 충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테니까.

“한 달. 한 달 동안 지정된 숙소에서 나오지 말게. 최대한으로 자네의 처지를 고려해 내린 형이야.”

“…알겠습니다.”

아마 내가 이 사실을 함부로 발설할까봐 최대한 심기를 맞춰준 것 같다.

어차피 나도 굳이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적당히 짜고 치는 절차를 밟고, 나는 한 달간의 징계처분을 받았다.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삶.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정해진 시간에 식사만 전달해주는 신관이 전부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의 대부분을 용사님을 그리워하며 보냈다.

용사님.

용사님….

똑똑.

“…….”

“…아린.”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다.

“아린, 나야. 헤일.”

“…헤일?”

친하게 지냈던 동기.

서고에서 일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오늘 담당이 내 친구라서 부탁하고 하루만 대신 찾아왔어.”

“…무슨 일이죠?”

사람과 대화하는 건 참 간만의 일이다.

그녀와 짧은 잡담을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그리고 사실 내가 오늘 오게 된 건….”

그녀는 잠시 목소리를 낮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문 밑으로 종이 한 장을 슬쩍 집어넣었다.

“누가 부탁하더라고. 너한테 이걸 전해달라고.”

“…누가요?”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음,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그래도 너랑 잘 아는 사이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설마….

“호, 혹시… 남자 분이셨나요?”

“어? 아린, 너 남자 생겼어? 후훗… 미안하지만 아니야.”

“……그렇군요.”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애초에 용사님에게 이런 소식이 들어갔을 리도 없다.

들어갔더라도 굳이 나한테 신경 쓰실 이유도 없지.

나라도 그런 년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이건 누구의 편지지?

…누구든지 용사님의 편지가 아니라면 쓸모없다.

“…고마워요, 헤일.”

그렇지만 그녀한테까지 이런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편지를 받는 척만 했다.

“앗, 시간이 촉박하네. 이만 가볼게. 그리고 그…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말할 때 조심하구!”

“네, 헤일도 다음에 봐요.”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내가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들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되면… 교회는 완전히 무너지려나?

“후, 후후….”

그렇게 되면 다들 화를 내겠지.

평생을 바쳐 믿어왔던 여신에게, 그리고… 이 사실을 퍼트린 나에게.

그래, 더 나를 욕해줘.

나는 마땅히 욕을 먹어야 할 인간이니까.

모두에게서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는 나 자신을 상상하며 나는 누구에게서 왔는지 모를 편지를 슬쩍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어차피 용사님에게서 온 편지도 아니니까 볼 필요는 없다.

툭.

그런데 이 편지는 봉인이 허술했는지, 약간의 충격으로도 금세 봉인이 벗겨져 활짝 열리고 말았다.

“하아….”

다시 접어두려던 나는 무심코 거기 적힌 한 줄을 보고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

그리고 한 달의 징계처분이 끝나는 날, 나는 곧장 편지의 주인을 만나러 갔다.

***

“오랜만이야, 아린.”

“……세라.”

편지를 보낸 것은 세라였다.

꼬리와 날개는 옷 안에 감춘 것인지 적어도 외형만을 봤을 때 그녀는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일단 앉아.”

“그건 무슨 말이죠?”

나는 앉기 전에 그녀에게 물었다.

편지에 적혀있던 그 말.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제가 용사님한테 방해가 되고 있다고요?”

“…그래, 그 얘기 할 테니까 앉아.”

내가 용사님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았다.

“올 때는 거의 시체 같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좀 사람답네.”

“…누구한테 들으셨….”

아니, 들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않는가.

그녀의 입에서 그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세라는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후후… 누구한테 들었냐고?”

“아뇨, 말하지 마세요.”

“그건 말이지….”

“말하지 마요!”

제발…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래, 그럼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왜 방해냐고 물었지?”

“…저는 용사님을 뒤에서 지탱하는….”

“정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나는… 도움이 되고 있지 못한 건가?

“나름 소식을 건너건너 전해 듣고는 있거든. 꽤나 과격한 말들을 했던데?”

“…용사님과 당신이 바라는 거 아닌가요?”

세라 그녀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건 전부 용사님을 위해서니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아니, 애초에 교단 같은 건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공감되는 말이네요.”

“어머, 너 아직 신관인데.”

“그랬던가요?”

내가 교회에 남은 것은 그저 용사님을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었기 때문.

더 이상 미련은 없다.

“그렇지만 아린.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지는 않아.”

“그러니까 강제로라도….”

“자꾸 그러면, 사람들이 더 싫어할 거라고.”

그런가.

그러고 보니 최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제가 욕을 먹는 건 상관없어요.”

“네가 아니라 에릭이라면?”

“…용사님이….”

나 때문에… 용사님이 욕을 먹는다고?

내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그런 간단한 생각도 못 해본 거야?”

“요, 용사님이… 제가 용사님을….”

내가 용사님의 평가를 더럽히고 있었다고?

생각해보니 당연한 말이었다.

맨날 내가 용사님을 들먹이면서 과격한 말을 쏟아냈으니, 자연스레 나에 대한 불만이 용사님에 대한 불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왜… 나는 이런 당연한 생각도 못하고 있었지?

“그건 우리 어린 신관님이 이기적이라 그런 거야.”

“제가… 이기적이라고요?”

“그래. 에릭보다 네 부채감을 더는 것을 더 우선시 한 거지. 이러면 내 잘못도 줄어들 거야… 나는 잘못 한 걸 갚고 있는 중이야… 하면서 말이야.”

“아, 아아….”

용사님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거였다고?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들이?

“응. 너는 용사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만 있었던 거지.”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 그렇지만 그녀의 말대로다.

나는… 용사님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 으읏… 저, 저는 어쩜 이리도….”

어쩜 이리도 추악할까.

내가 한 짓들은 전부….

전부….

스윽.

그 때 그녀가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럼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

“…앞으로?”

“그래, 앞으로.”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예전처럼 너무 과격한 발언은 하지 말고… 마음에 안 드는 말이 있어도 좀 참고….”

“모, 못하겠어요… 용사님보다 여신 따위를 섬기는 그들을… 저, 저는 이해할 수….”

“그럼 내가 도와줄게.”

“…당신이요?”

세라 본인이?

왜?

“사실 우리도 교단 측과 소통할 창구가 필요하거든. 그래서 아린, 네가 그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는데.”

“제가…?”

“그러면 에릭도 기뻐해줄 거야.”

“아….”

용사님이….

“할게요.”

“더 안 들어봐도 괜찮아?”

“네.”

그러자 세라의 손이 잠시 멎었다.

“해야 할 일이 늘겠네.”

“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세라는 가볍게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네.”

그렇게 나는 본격적으로 그들을 돕게 되었다.

***

나는 한동안 특별한 주장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세라가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용히 지내다보니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씩 예전처럼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이 안 좋았었구나.

그제야 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시선이 용사님에게도 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꾸준히 그들은 교회와 대화를 시도했고, 매번 거절당했지만 서서히 이 이야기는 교회의 아랫사람들에게까지 널리 퍼지고 있었다.

“여신은 마족들을 긍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신이 마족을 꺼려한다는 이야기는 전부 후대에 덧붙인 해석에 지나지 않아요.”

다시 성서를 공부하면서 논리가 어설픈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빈틈을 넓혔다.

그 때는 성서와 선조들의 해석을 철석같이 믿고 따랐지만, 다시 보니 군데군데 엉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어쩌면 이것들도 여신의 말을 직접 들은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몇 차례 건너들은 것이 아니었을까.

혹은… 처음부터 아무런 말도 들은 적 없었다거나.

아무런 말도 없이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린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여신에게 우리는 그저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에 대한 분노를 원동력 삼아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내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주변국들이 조금씩 마족들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변해가면서 교단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내 역할이 컸지만, 아마 세라가 그 때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용사님을 뒤에서 응원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 샌가 나는 또 용사님을 방해하고 있었다.

같은 실수를 2번이나 반복할 줄이야.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말아야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조금씩 나도 용사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사실 여기에는 세라의 도움이 컸다.

도움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도발이라고 봐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기적으로 그녀와 만나면서 조금씩 나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 남자에게 길들여졌던 과거를 어떻게든 잊고 싶어서 그 반대에 있는 용사님에게 매달렸다.

용사님에게 속죄하고 싶어서, 내 과거를 부인하고 싶어서….

그래,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 때 있었던 일은 결국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일이고, 굴레 때문이라 하더라도 내가 했던 짓이다.

용사님은 이미 다 용서하고 신경을 쓰지 않는데, 내가 매달리며 내 감정을 용사님께 쏟아 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절대 잊지 말자.

그리고 절대 가벼이 여기지도 말자.

“…따라서 전 교회는 오늘부로 마족들의 입교를 제한적으로 허가할 것을 밝히는 바이다.”

마침내 거둔 첫 성과.

비록 제한적이나마 마족의 존재를 그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 성공했군요, 아린 자매님! 저희가 해냈어요!”

“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랍니다.”

해야 할 것이 많다.

그들이 성공적으로 교회에 융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기준도 더욱 넓혀야 할 테고.

또한….

곧 모두를 만날 날이 다가온다.

용사님과, 용사님을 상처 입혔던 우리 셋이 만나는 그 날이.

그 때 나는 용사님을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까.

너무 친근하게 다가가지는 말자. 그러기에는 내가 했던 죄가 남아있으니까.

그렇지만 불편해하지도 말자. 그건 오히려 용사님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

그냥 웃으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

오랜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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