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마법사] 그 뒤
*저번 화의 기호마법이 각인마법으로 수정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돌아왔다.
어긋난 세상이 원래대로.
비정상이었던 것이, 정상으로.
그리고… 우리의 감정까지도.
“…내려가자.”
그 더러운 남자가 떠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겨우 내려올 수 있었다.
세상은 분명 좋게 되었건만, 우리들은 마치 장례식이라도 치룬 듯한 분위기로 성을 내려갔다.
“다들….”
그의 목소리를 듣자 유니가 흠칫하고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녀뿐만 아니라 나도 그랬을 것이다.
무슨 얼굴로 그를 보아야 하지?
용사파티의 일원이면서도 그를 돕기는커녕 끝까지 방해만 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한 때 그를 좋아했으면서도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다.
그래, 이것도 전부 굴레 때문….
자꾸만 그런 생각들이 두둥실 떠오르지만, 결국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게 면죄부가 되는가?
아무리 내 의사가 저항할 수 없는 무언가에 조종당했다고는 하나… 어쨌든 내가 그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데.
내가 과거에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미, 미쳤지 진짜…!
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딴 말을 했지?
“고생 많았어. 이제 돌아가자.”
그는 그러고도 우리에게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래, 다른 무엇보다 그 사실이 제일 안타까웠다.
***
제렌은 내가 루드니엘 마탑에 연락을 넣어 구금 요청을 했다.
역시 사실대로 다 말할 수는 없어 조금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 억지는 부려도 되겠지.
우리는 용사 파티니까.
…용사 파티라.
정작 우리는 아무 것도 못했는데.
“세리아?”
“아, 으, 응…!”
에릭이 걱정된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정말 괜찮다니까.”
“…미안.”
돌아가는 길, 나는 몇 번 에릭과 대화할 일이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이러면 안 되는데.
그의 얘기가 제대로 들리질 않는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했던 짓들과,
정말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닌가 조마조마한 마음.
에릭이 용서했다고 해서 정말 그런지부터 살피는 스스로가 참 추악하게 느껴졌다.
“돌아가면 뭘 할 거냐는 얘기였어.”
“돌아가면….”
…내가 왜 이 파티에 참가했더라.
마탑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연구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는 것도 좋지만, 역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강렬한 업적이 하나 있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용사파티에 참가했다는 이력은 그 조건에 더 할 나위 없이 맞아떨어지는 것이었고.
목표부터 그랬던 만큼, 당연히 나는 마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모르겠어.”
“마탑으로 돌아가려는 거 아니었어?”
“이젠…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어….”
이런 내가, 용사파티에서 활약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무슨 낯짝으로 그런 이력을 당당하게 내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용사를 돕기는커녕 발목만 잡았는데.
심지어 자칫 잘못하면 마왕의 편에 붙어 그의 영원한 노예가 될 뻔했다.
…마치 루엘라처럼.
에릭은 최선을 다해 나를 위로해줬지만, 미안하게도 그 위로는 오히려 나를 더 상처 입힐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몇 번이나 사과했고, 그는 전부 받아들였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은 편해지지 못했다.
***
“고생하셨습니다! 이야, 이거 어쩌면 바로 준교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 썼던 논문이 재조명받고 있다던데….”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수도에 돌아오고 난 뒤로는 매일이 괴로웠다.
성대한 환영식이 열리고 마탑에서도 온통 나를 칭송하는 사람, 사람, 사람….
둘도 없는 천재 마법사라는 둥, 용사 다음 가는 공로를 세웠다는 둥 온갖 칭찬들이 나에게 쏟아졌다.
아냐, 나는… 나는 아무 것도 못했어.
그냥 육체의 쾌락 하나 못 이겨 앙앙거린 병신 같은 여자라고.
수도에 돌아온 뒤로 나는 마탑에 복귀했지만, 무기력한 매일을 보냈다.
원래라면 한창 내 이름이 뜬 이 기회를 노려 다양한 활동에 참가해 실적을 쌓아나갔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낯짝으로 용사 파티 출신이라는 이력을 들먹일 수 있겠는가?
…역시 나도 아린이나 유니처럼 에릭이 하는 일이라도 도울 걸.
그랬으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졌을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 거리다가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다.
아린과 유니… 나는 그녀들에게도 못된 짓을 해버렸다.
앞장서서 그녀들을 떨어뜨리는데 협력했으니.
그래, 셋 중에서도 내가 제일 나쁜 년이지.
이제와서 뻔뻔하게 그들과 같이할 수는 없다.
이 갈 곳 없는 우울과 분노는 결국 그에게 돌아가 버렸다.
제렌.
지하에 구금되어있던 그는 이제 10년간 마탑의 피험자로 살게 될 것이다.
이는 내 복수인 동시에 그의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적어도 10년을 살고 나오면, 그 뒤로는 자유로워질 테니까.
내가 과연 그를 처벌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은 계속 들었지만… 아무튼 마탑에서는 그럴 권한이 있었다.
마법사를 협박하고 강간을 시도했다는 것은 심각한 죄니까.
물론 실제로는 시도 수준이 아니라….
아니, 지금은 더 생각하지 말자.
나는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을 털어버렸다.
마탑만이 아니다.
교회 또한 자신들의 신관을 건드린 그를 처벌할 권한이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로 갔으면 곧장 처형당했겠지.
막상 그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복잡했다.
나를 그렇게나 괴롭힌 남자니까 당연히 죽어야하는 거 아닐까 싶다가도,
너무 쉽게 죽어버리면 허무할 것 같다는 생각부터,
뭐가 잘났다고 그를 비난하는가 하는 자책적인 사고까지.
그의 노예가 되어 보냈던 그동안의 생활은, 아직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있다.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는지도.
……잊자.
전부 잊어야지.
그렇지만 결국 그를 생각할 때마다 찜찜한 부분이 남아 나는 판단을 유보했다.
그렇게 나대신 마탑이 내린 형벌이 10년이었다.
10년.
10년이면 그도 나도… 무언가 달라질 수 있겠지.
적어도 마주할 용기가 생기기를 바란다.
그렇게 그에게 사정을 통보한 뒤 올라오는 길, 나는 마탑의 조수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뭐하는 거예요?”
“아, 마법사님. 그게… 연구실 개편 때문에 짐을 옮기고 있습니다.”
연구실 개편이라.
벌써 그럴 때가 오긴 했구나.
공간은 한정되어 있어도 사람들은 점점 몰리는 루드니엘 마탑은 항상 연구실의 수가 부족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연구실을 개편하고는 하는데, 보통 교수 자리를 박탈하거나 신원불명자의 연구실을 정리하는 등의 방식으로 새 자리를 마련한다.
저들이 들고 있는 것도 한 때 교수였던 자의 연구 자료겠지.
장본인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신원불명자인가?
사고라도 당한 걸까, 조금 안타깝다.
연구실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면 훌륭한 사람이었을 텐데….
“어이쿠.”
그 때 한 조수가 든 짐에서 책 한 권이 툭하고 떨어졌다.
“제가 주울게요.”
“감사합니다, 마법사 님.”
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책이 내 쪽으로 떨어졌으니 줍자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 책을 집어든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움직였다.
[루에 아스트라]
“이거 혹시 루에 교수의 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최근 행적이 불명이라….”
…불명.
그야 그렇겠지.
“혹시 아는 분이셨습니까? 필요한 자료는 이미 다 보관 처리 했으니 남은 건 가져가셔도 괜찮습니다만….”
그의 말에 나는 책을 살짝 펴보았다.
사실 책이라기보다는 그냥 종이 몇 장을 묶어둔 것에 더 가깝다.
그렇게 펼쳐본 첫 장에는, 무척이나 익숙한 문양이 그러져 있었다.
“마법사 님?”
“…제가 가져가도 괜찮은 건가요?”
“음… 지금 남은 것들은 다 개인적인 것이니 어차피 폐기 처분할 예정입니다. 뭐, 지인 분이시라면 하나쯤은 가져가셔도 괜찮겠죠.”
이건 그녀의 연구기록이다.
그것도 나와 무척 관련이 있는.
“그럼… 이것만 챙길게요.”
“네, 그렇게 하십쇼.”
나는 그것을 갖고 방으로 돌아왔다.
루엘라…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각인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
각인 마법을 상당히 많이 연구했음이 틀림없다.
그다지 인기 있는 학문은 아니라 사실상 지금은 연구자가 없는 상태….
애초에 그녀는 왜 각인 마법을 연구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굴레.
그리고 장미 문양.
그녀의 얇은 노트에는 이에 대한 그림들과 약간의 설명이 덧붙여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별 의미 없는 낙서로 보였으리라.
적혀있는 내용들도 황당무계하고, 실제 마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얘기들이니까.
아마 그래서 연구 자료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실제로도 연구를 한 자료라기보다 생각 정리용으로 적어둔 것에 가까워보였다.
그렇구나.
그녀는 이것을 연구했구나.
생각해보면 루엘라 또한 한 때는 나처럼 인간 마법사였을 것이다.
어느샌가 그녀의 신체에도 문양이 새겨졌을 테고, 마법사라면 당연히 그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겠지.
그리고 그 의구심은 마족이 된 뒤로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자료의 일부다.
두근두근.
왠지 가슴이 뛰었다.
자연스레 내 손은 어깨로 향했다.
지금은 지워진 문양.
이것은… 대체 뭐였던 걸까.
과거의 마왕이 만들었다고 그랬지.
어느 마왕이?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지?
결전의 마지막 순간, 분명 우리는 보았다.
굴레를 휘감은 수많은 넝쿨과 장미들을.
대체 어떻게?
나는 지난 며칠간 끄적인 내 연구를 바라보았다.
딱히 목적도 이유도 없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적은 글.
별 영양가도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 이것.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연구.
둘을 잠시 바라보고, 나는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의 연구방향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루엘라의 연구를 하나부터 차근차근 되짚어보았다.
그녀가 무엇을 어떤 방향에서 접근했는지를 살펴보고, 그녀의 연구들을 분석했다.
당연히 마탑에서는 성과가 나오지 않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그것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반년 쯤 보내고 나니 무언가를 알 것 같았다.
그 뒤로는 그녀의 연구를 혼자 이어나갔다.
다른 방향에서도 접근해보고, 문양이 있던 때의 기억을 되살려 관련된 분야들도 조금씩 파고들기 시작했다.
최면마법, 성마법 등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분야들은 다 건드려보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마탑에 이상한 소문이 돌게 되었다.
각인마법에 몰두하는 괴짜 마법사가 하나 있다는 소문이.
어느새 나는 용사 파티의 동료라는 별명보다, 괴짜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연구를 계속 진행하다보니 조금씩 성과도 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바탕으로 연구를 확장해갔다.
그러다보면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벽.
분명 루엘라도 이런 벽과 마주했겠지.
그녀는 이를 어떻게 넘었지?
답을 알 만한 자들은 우리 중에 없었다.
“…마물을 우리 마탑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이군.”
“교단에서는 조만간 성명문을 발표한다던데, 세상이 바뀌려는 모양이지.”
지나가다 들은 마법사들의 잡담이 힌트가 되었다.
그래, 루엘라에 대해 더 알만한 존재가 있지 않은가.
그녀의 밑에 있었던 마물.
아니, 마족들.
“당신이 마물들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헉… 괴, 괴짜… 앗, 시, 실례했습니다! 네, 마, 맞아요!”
상대는 나보다 조금 어린 여마법사였다.
그녀는 마족 영토 출신의 마법사로, 같은 마을에 살던 마족들에게 마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 그들도 분명 마법을 알고 있었고… 체계적이지는 않더라도 나름 수준 높은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어요. 아마 그들 중에 누군가 좋은 스승이 있었을….”
“…같이 하자.”
“네?”
“나도 같이 하고 싶거든.”
나는 그녀와 손을 잡았다.
아린은 교단에서 마족들과의 융화에 힘쓰고 있겠지.
유니도 고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들었다.
그럼 나도… 내가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
헤어질 때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순수한 바람을.
이건 속죄다.
그저 내 마음 속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수단일 뿐.
하지만…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문양, 그리고 굴레의 비밀을 알기 위해.
루엘라… 루에 교수의 연구를 더 이어가기 위해.
그리고 에릭, 너를 돕기 위해.
우리는 마족 마법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마탑에 꾸준히 요구했다.
그렇게 몇 년이 더 지나자, 많은 것이 바뀌었다.
***
“아, 세리아님! 오후 강의는 잘 들었습니다. 혹시 잠깐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언젠가부터 쓰게 된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나는 상대를 바라봤다.
음… 학생이나 연구원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 저는 관리부 소속입니다.”
“관리부?”
나는 내 밑에서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조수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지시하고 잠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고드릴 것이 하나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보고요?”
뭐 특별한 게 있던가?
정기평가는 끝났고, 연구소 개편할 시기도 아니고….
“피험자의 형벌 종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군요.”
그래, 그러고 보니 올해로 10년 째지.
끝났구나.
그에게 주어진 10년의 형벌이 끝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 퇴속 절차를 밟을 예정인데, 혹시 참여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저희들끼리….”
“저와 잠시 이야기를 하게 해주세요.”
“네?”
10년이라.
그 사이 그를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지만, 깊게 대화를 나누어보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도 쉽게 들지 않았고.
10년.
제렌, 당신은 그 10년을 어떻게 보냈지?
“음…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과거와 다시 마주하기로 했다.
지금이라면, 그 모든 것들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 나는 마침내 그와 10년 만에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축하해. 오늘로 10년 딱 채웠네.”
10년 만에 보는 그는,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 나이를 먹은 상태였다.
나도, 그도.
둘 다 나이를 먹었다.
어느 정도 세상에 적응한 시기.
그의 눈빛은 차분했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던 눈빛은 사라지고, 그 대신 차분하고 조용한 눈빛이 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분이 어때?”
“복잡하군.”
“그래, 그동안 고생했어.”
달라지긴 했구나.
너나 나나.
솔직히 다시 보게 되면 화가 날 줄 알았다.
그 때 왜 그랬냐고, 체면도 잊고 곧장 멱살부터 잡지는 않을까 고민했는데….
이제는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시간이 감정과 기억을 퇴색되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나에게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있어서일까.
원래라면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사과를 받아낸 후, 그를 내보내려고 했다.
그 이상을 바라기에는 나도 떳떳하지 못했고, 그것마저 받지 않자니 내 안의 무언가가 용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뭐할 거야?”
“…글쎄.”
나는 그에게 문득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는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몸 쓰는 일은 이미 힘 좋은 마족들이 차지한 지 오래고, 인간 도박사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는데.
“…그거 알아?”
그래서인지, 나는 문득 그에게 그런 말을 건네고 있었다.
“마탑의 피험자들이 끝나고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뭔지.”
나는 그가 싫다.
그는 나에게 억지로 미약을 먹이고, 내 약점을 잡아 협박했으며, 그의 편이 된 후에도 한 번도 나를 대등한 입장에서 대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 자신도 밉다.
그런 멍청한 협박에 그대로 넘어간 내가 밉고,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그의 곁에 남고자 했던 내 마음이 너무 미웠다.
나와 그의 대한 혐오 사이에서,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분노하고, 화를 내야할까?
아니면 이제 다 잊었다면서 그를 용서해야하는 걸까?
굴레, 운명, 여신.
댈 수 있는 변명은 많다.
내가 에릭을 상처 입힌 것이 전부 굴레 탓이라면, 그가 나를 굴복시킨 것 또한 굴레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다짐했다.
내가 했던 짓을 전부 굴레의 탓으로 돌리지 않겠다고.
온전한 내 책임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너도… 도망치지 말아줘.
“계속 마탑에 남는 거야.”
나는 처음부터 여기까지 생각하고 그를 데려왔던가?
글쎄, 너무 옛날이라 생각이 잘 안 나네.
“…여기 남겠어.”
그는 남는 쪽을 선택했다.
내 제자들의 조수.
마탑에 남아 마법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뒤에서 돕는 역할.
내 협박 아닌 협박의 영향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는 계속 남을 돕게 되는 것이다.
“그래,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겠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이 있을 테고, 지금은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생각이 잔뜩 있으니까.
나는 그를 보내고, 얼마 전 도착한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간만에 모두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에릭의 편지.
나는… 에릭을 무슨 얼굴로 볼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더 이상 우물쭈물 거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그것만큼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