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 [짐꾼] 그 뒤
“네 여자들 참 좋더군.”
빠악!
“크흡….”
제길, 아프군.
***
용사는 승리했다.
그는 본래의 목적이었던 마왕을 죽이는 데도 성공했고, 이를 넘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굴레 그 자체를 끊어버리기까지 했다.
누가 뭐라 해도 명실상부한 용사.
처음 모습과 비교해보면 완전히 딴 사람이다.
“파티는 이제 해산이야.”
용사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내려갔다.
물론 그것이 당장 여기서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가자는 뜻은 아니겠지.
아마 나와 그녀들만 남긴 것은, 굴레가 깨졌으니 해야 할 이야기를 하고 내려오란 뜻이리라.
그렇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읏.”
유니의 몸이 떨렸다.
“윽, 흐읏….”
유니의 눈에서 조금씩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흐윽, 읍….”
남겨진 그녀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겠지.
“…공격했어.”
유니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내, 내가… 에릭을… 에릭을 공격했어….”
녀석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들의 감정이 해방된 지금, 셋의 마음속에 그동안 있었던 일이 얼마나 아프게 다가올지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마 본인은 극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기도 했고.
“저는… 저, 저는….”
혼란스러워하는 아린.
그들의 어깨에서 문양이 지워진 것이 보였다.
그녀들의 머릿속에는 아마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래 자연스레 들었어야 할 감정들이 하나씩 솟아오르는 중일 것이다.
마왕의 편에 서서 용사를 공격했던 것.
여신이, 그녀가 만든 굴레가 그녀들을 가지고 농락했다는 것.
그리고… 나 같은 놈에게 몸과 마음을 내어줬다는 것.
털썩.
유니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린이, 세리아가 주저앉았다.
“흐으읏… 흑, 흐윽….”
“아, 아아….”
서서히 되돌아온 그녀들의 마음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녀들에게 한 걸음 내딛자….
고개 숙인 세리아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뜻.
“…부, 부탁이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다가오지 마….”
평소의 그녀와는 달리 무척이나 약한 소리.
그러나 그 안에서는 명백한 적의가 느껴진다.
“안 그러면…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반응이 아마 제일 이성적이리라.
그런 그녀마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흠.”
지워진 문양.
그리고 그녀들의 거부감.
그래, 역시 그렇군.
나는 실패했다.
이대로 남아있다가는, 아마 분명 그녀들이 나를 죽이겠지.
용사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들의 감정이 나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본 나는 홀로 성을 내려왔다.
***
“도망가는 건가요?”
“…조금 일찍 해산했다고 해주면 좋겠군.”
용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또한 굴레의 피해자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면죄부가 되지는 못해요. 당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 죄를….”
“제렌 씨. 그녀들은 당신을 용서했나요?”
에르티나를 진정시키고 그가 나에게 물었다.
용서라.
그녀들은 나를 용서했는가?
“더 이상 얼굴도 보기 싫다더군. 그래서 원하는 대로 꺼져주려는 거야.”
사실 거짓말이다.
그녀들은 아직 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세리아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뱉었던 한 마디를 부풀려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 뿐.
이 말을 뱉고 나자, 에르티나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좋아요, 가세요.”
용사는 에르티나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나를 풀어주었다.
과연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일까.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우선 허락은 떨어졌다.
“…….”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가, 몸을 돌려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용사파티의 짐꾼 역할은 끝났다.
그럼 나도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지.
…역시 옛 도시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아무튼 나는 용사파티의 짐꾼이었으니까.
일이 모자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정신을 차린 그녀들이 언제 나를 쫓아올지 몰랐으므로 나는 잽싸게 도망쳤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고, 마물의 영토를 넘어 다시 인간의 영토로.
이상하게도 적대적인 마물들과는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비록 마왕이 될 마음도 없었고, 되지도 못했지만… 역시 아직 나에게는 무언가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
오직 그 생각만 하면서 이동하다보니 어느덧 나는 수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법 빠르게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중간중간 최소한의 휴식을 위해 들른 마을에서는 이미 용사의 이야기가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마왕 퇴치에 성공한 용사와 그 일행.
일행이라.
사실상 용사 혼자서 다 했는데 말이지.
나와 그녀들은 오히려 방해꾼이었다.
내가 떠난 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상당히 골치 좀 앓고 있겠지.
그렇게 간단하게 봉합될 상처는 아닐 테니까.
“행인입니다.”
“…잠시만.”
나는 수도에서 하룻밤 지내기로 했다.
다른 마을을 찾으려면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하는데, 남은 식량으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이것이 최선책이었다.
이렇게 큰 도시는 혹시 몰라 찾아가지 않았는데… 뭐, 그 동안에도 아무 문제없었으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별 생각 없이 검문소를 지나치려는데 병사들이 나를 막았다.
“뭐… 뭐야?”
“가서 사람들 불러와.”
“네.”
앞의 사람들한테는 이런 절차 없었잖아?
“착각이라면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확인이 한 번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확인이라니… 대체 무슨?”
뭐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마치,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여기입니다.”
“이 자인가.”
“들은 것과 똑같이 생겼군요.”
그리고 곧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무리를 이루며 나에게 다가왔다.
마법사?
마법사들이 왜 이렇게 많이….
“이봐, 거기.”
“…무슨 일입니까?”
“네 이름이 제렌 맞나?”
…제기랄!
“표정이 바뀌었군. 장본인이 맞다. 데려가.”
“뭐, 뭐야! 대체 뭘 듣고 이러는…!”
빌어먹을.
모든 힘도 다 잃어버린 지금의 내가, 그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용사가 마왕을 처리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파티에 소속되어 있던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너 스스로는 이유를 알고 있겠지. 얌전히 따라와라.”
…벌써 소식이 수도까지 닿았다고?
그것도 내 얘기까지?
아니,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전말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제길, 그럼 그냥 붙잡게만 시킨 건가? 이렇게 빨리?
“…그녀가 시켰나?”
“질문 외의 대답은 하지 말도록.”
빠악!
한 마법사가 휘두른 스태프에 머리를 맞았다.
“크읍… 제기랄….”
그렇게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에게서 도망친 후에 다시 붙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마탑의 감옥에 갇힌 지 한참 뒤, 익숙한 인물이 나를 찾아오고 나서야 나는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맞아. 일부러 놓아준 거지. 네가 가고 곧장 마법으로 소식을 보냈어. 이 남자를 보면 바로 붙잡아달라고.”
“…왜?”
창살 바깥에서 그녀는 팔짱을 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수도까지 다녔다가는, 정말 죽여 버릴 거 같았으니까.”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
그녀가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 말투만으로도 전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적어도 세리아가 그 때처럼 혼란스러운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은 멀쩡해 보이는군.”
“…멀쩡?”
세리아가 쿡 웃었다.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네. 환영식 때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
환영식이라.
용사와 그녀들이 수도에 돌아왔던 날인가.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분위기가 어렴풋이 이 마탑 아래쪽까지 전해지기는 했다.
“그 때 우리가 무슨 기분이었는지 알아? 모두가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데… 정말 가시방석도 그런 방석이 따로 없더라. 다들 아무 것도 모른 채 우리를 반기기만 하고… 에릭은 진심으로 우리를 용서했는데, 정작 우리는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
그렇군.
아마 그녀들도 돌아오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으리라.
“그것 참 고생….”
쾅!
그녀가 창살을 발로 걷어찼다.
“…어쭙잖은 위로는 집어치워.”
“……그래.”
그녀는 발을 내리고 조금 마음을 가다듬은 뒤 계속 말했다.
“사실 너, 이거 운 좋은 거야.”
“…운이 좋다고?”
갇혀 있는 이 상황이?
“나 아니었으면 넌 아마 교단 본부에 끌려갔을 테니까.”
“…그렇군.”
아린을 건드려서인가.
그럼 여기도 마찬가지로 세리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와있는 셈.
아마 거기에 갔으면… 일단 살지는 못하겠지.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녀는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닌가?
“마탑은 말이야. 항상 사람이 모자라.”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한 때는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지만, 이제는 반대가 되어버렸다.
“…마법을 연구하다보면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거든. 그것도 꽤 많이.”
마법사를 건드리지 마라.
모두가 아는 그 말.
아무래도 이는 그저 마법사 개개인의 위력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군.
마법사를 건드리면 마탑이 출동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어째서지?
“10년. 넌 앞으로 10년 동안 마탑에서 마법 실험의 피험자가 될 거야.”
세리아의 말에 따르면 10년은 마탑에서 복역하는 마법 피험자들의 평균 형량이라고 한다.
“뭐, 그래도 거기 끌려가는 것보다는 낫지? 피험자라고는 해도 고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의식주도 제공되니까. 어찌 보면 그렇게나 바라던 편한 생활일지도 모르겠네.”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며 창살 가까이 다가왔다.
“…사과는 10년 뒤에 받겠어.”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미묘한 표정.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도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있어 무엇인지 쉽게 알 수가 없었다.
“마법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면서… 반성하도록 해.”
세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나에게서 멀어졌다.
“안녕, 주인님. 다음에 볼 때는 우리 둘 다 달라져있기를 바랄게.”
그리고 그녀는 올라가버렸다.
***
나는 곧 피험자용 숙소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여러 실험들에 동원되었다.
아무래도 마탑도 마탑 나름의 규칙이 있는지, 생각했던 것만큼 고통스럽고 잔인한 마법들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존중해준 것도 아니다.
그저 피험자.
나는 그 뿐인 존재였다.
그래,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고는 없는 피험자 중의 하나.
그렇게 일 년, 이 년이 지나고.
분노는 서서히 사그라졌다.
삼 년째에 접어들면서 나는 처음으로 세리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마탑의 실험자들이 잠시 잡담하는 것을 우연찮게 엿들었는데, 실종된 루에 교수를 이어 기호 마법을 연구하는 괴짜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리고 사 년, 오 년이 지나니 마탑에도 변화가 생겼다.
탑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에 낯선 무리가 끼어있었다.
저 녀석들은… 분명 마물인데.
왜 이런 곳에 있지?
육 년, 칠 년, 팔 년이 흐르면서 어느덧 마물들은 조금씩 마탑에도 자리를 잡았다.
이에 대한 인간 마법사들의 의견은 반반이었지만, 마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 주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굳이 더 캐볼 것도 없었다.
구 년, 그리고 마침내 십 년.
어느 날… 그렇게 마지막이 찾아왔다.
***
끼익!
악마 하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마도 비서 쯤 되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연구실.
그것도 마탑의 고위직 쯤 되는 그 연구실에는 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사방에는 빼곡하게 책들이 책장에 꽂혀있고, 제자인지 아니면 동료인지 주변에 몇몇 사람들과 마물들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와.”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축하해. 오늘로 10년 딱 채웠네.”
“…그래.”
이제는 이런 일이 아니면 얼굴도 못 볼 만큼 차이가 벌어져버린, 세리아와 나.
굵직굵직한 업적들을 쌓고 빠르게 마탑의 핵심인물로 등극한 그녀는, 안경을 슬쩍 올려 쓰며 나를 바라봤다.
“기분이 어때?”
“복잡하군.”
“그래, 그동안 고생했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많이 성숙해져있었다.
10년 동안 그녀를 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가 조금씩 변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껴졌던 격한 감정은 더 이상 없었고, 차분하고 이지적인 모습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나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그 때 같은 분노는 없었다.
세리아가 문득 책상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이제 뭐할 거야?”
“…글쎄.”
이곳에서 10년을 보내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어버린 것 같다.
인간과 마물.
듣자하니 이제는 마물이라는 표현도 쓰지 못한다던가.
그 마족들과 인간이 공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몸 쓰는 일은 하기 힘들 거야. 인간은 절대 미노타우로스나 트롤들의 힘을 넘지 못하거든.”
“…그렇군.”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도박과 몸 쓰는 부류의 일들뿐인데.
남은 것은 도박인가.
그렇지만 도박으로 먹고 살만큼 나는 재주에 능하지 않다.
“감각이 예민한 마족들 상대로는 사기도 치기 힘들 거고.”
그럼… 뭘 해야 하지?
10년의 차에 적응하기 이전에 당장 굶어죽게 생겼다.
“…그거 알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보고 슬쩍 웃었다.
“마탑의 피험자들이 끝나고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뭔지.”
그녀가 내놓은 대답은,
“계속 마탑에 남는 거야.”
어쩌면 처음부터 준비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너희들은 바깥 세상에 돌아가기 힘들어. 마탑의 기밀 실험들과도 연관되었으니 항상 감시를 받으면서 살아야할 테고, 특히나 지금은 시대도 많이 바뀌었지.”
이런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는데.
하긴, 애초부터 나에게 선택권이 있을 리는 없지.
“여기 남으면 마법사는 될 수 없어도 그 밑의 조수는 할 수 있어. 그 동안 보고 들은 게 있으니 적어도 완전한 타인보다는 적응이 빠를 거고.”
그래.
그래서 마탑의 복역수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군.
말하자면… 나는 속임수에 걸린 것이다.
마탑에서 피험자 역할을 몇 년 하면 내보내주겠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정작 그 본인은 마탑 밖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린다.
“기호 마법을 공부하는 내 제자들을 도와. 그게 내가 제시하는 길이야.”
“…또 봉사하라는 건가?”
“그렇지.”
한낱 피험자와 드높은 마법사의 관계에 대해 다들 궁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세리아도 딱히 이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대놓고 밝히지는 않은 것 같지만, 동시에 필사적으로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보면서 확실하게 느꼈다.
아마 앞으로 그녀에게 협박이나 위협은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물론 이제는 그럴 힘도 생각도 없지만.
“아니면 그냥 나가던지.”
마탑에서 초급 마법사들의 조수로 지내던지, 아니면 어떻게 변했을지도 모르는 낯선 사회에 맨몸 하나로 나서던지.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여기 남겠어.”
“잘 생각했어.”
세리아는 제자들에게 나를 소개시키며 다른 조수들에게로 안내하라 말했다.
“아참, 조만간 우리 넷이 모이는 날이 올 거야. 그 때는 너도 참석하도록 해.”
넷이라는 것을 보면 세리아, 아린, 유니. 그리고… 용사까지 모이는 날인가.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때 나는 10년 혹은 그 이상 묵은 분노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 때 뭘 해야 할지는 알고 있겠지?”
원래라면 어떻게든 도망갈 방안을 궁리해보겠지만….
역시 여기에 10년 동안이나 있다 보니 그런가.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할 수도 없고, 할 의지도 없다.
나에게 남은 것은 그저 그들과 마주하는 것 뿐.
이제는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설마 이것까지 생각해서 나를 여기에 처박아둔 것인가.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제 나가봐도 좋아.”
“…그래.”
그렇게 나는 전환점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