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229화 (229/236)

〈 229화 〉 [용사] 그 뒤 (수정)

“음… 조금 있다가 회의하시구, 그 다음에는 현지시찰이에요!”

옆에서 분홍 머리 소녀가 재잘거리며 말을 걸었다.

“그래, 고마워, 미리.”

“헤헤… 별 거 아니에요!”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비서라도 된 마냥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간략하게 보고해주고는 했다.

…딱히 그런 보고가 필요할 만큼 바쁜 일은 아닌데.

뭐, 그래도 미리가 좋아하는 것 같으니 됐다.

“앗, 그나저나 그… 오늘도 되게 잘 어울리세요!”

“그래? 나는 여전히 어색한데….”

그렇게 말하며 나는 팔을 슬쩍 들어보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진 천으로 지은 옷.

솔직히 나는 평소 입던 옷이 더 좋지만, 격식에 맞는 옷을 입어야한다고 하도 성화라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다.

“하나도 안 이상해요! 네, 정말 멋져요!”

“아, 응… 고마워.”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하긴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렇게 미리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이어가던 도중, 마침내 나는 목표했던 방까지 도착했다.

“앗, 으음….”

미리는 문 앞에서 잠시 나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한 발 물러섰다.

“그러엄…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좋은 시간 되세요오…!”

휭 하니 가버리는 그녀.

거참, 그렇게나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노크를 했다.

“네에, 들어오세요.”

안에서 허락이 떨어진 뒤에야 나는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긴 테이블과 의자 여럿이 놓여있었다.

아직 아무도 안 온 건가.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 같다.

먼저 앉아 있으려고 발을 뗀 순간, 내 발에 무언가가 밟혔다.

“아앙♥”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잠시 당황했지만, 여기서 이럴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슬쩍 시선을 내리니, 내 발에 꼬리가 밟혀있는 것이 보였다.

“…또 무슨 이상한 짓을.”

“남의 꼬리를 먼저 밟아두고 그런 소리를 하시나요? 못됐어, 정말.”

누가 봐도 밟게 두려고 안 보이는 곳에 숨어있었으면서….

나는 한숨을 쉬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번 질리지도 않나요, 세라.”

“어째 점점 반응이 심심해져 가는데… 설마 질렸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그녀가 방금 나에게 밟힌 꼬리로 내 볼을 쿡쿡 찔렀다.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그녀의 꼬리를 잡고 슬쩍 내 볼에서 떨어뜨려놓았다.

“아흣♥ 대담하셔라, 이런 곳에서? 모두가 오기 전에 재빠르게 한 번 할까요?”

“네? 아니, 저는 그럴 생각으로 잡은 게….”

“후후… 먼저 성감대를 자극한 게 누구신데?”

“아니, 그렇게 따지면 먼저 볼에 들이민 것도….”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가슴에 손을 얹고, 몸을 내 쪽으로 서서히….

덜컹!

“…늦어서 죄송합니다.”

“충분히 빠른데요, 에아?”

세라의 부하, 에아는 나와 그녀를 슬쩍 바라본 뒤 헛기침을 했다.

“…다들 곧 올 겁니다.”

“그럼 문 앞에서 못 들어오게 막아줘요.”

“네?”

당황하는 에아에게 세라는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급하니까… 한 30분 정도면 되겠네요.”

“아니, 그게… 30분이나 세워둘 수는….”

땀을 흘리며 당황하는 에아를 보며 세라는 쿡쿡 웃었다.

“봤어요? 저게 옳은 반응이라구요.”

“노력해보죠….”

그녀는 키득거리며 나에게서 물러났다.

“농담이니까 들어와요, 에아.”

“휴우… 네.”

세라라면 정말 하고도 남을 음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서 슬쩍 멀어지면서 세라가 내 다리를 콕콕 찔러 신호를 보냈다.

나머지는… 꿈에서?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후후, 잘 되고 있나요?”

“조금 뒤에 발표로 마저….”

그녀는 에아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와는 대비되게 그녀의 꼬리는 분주하게 나를 찌르고 있었다.

복수의 시간인가.

나는 그녀의 꼬리를 확 움켜쥐었다.

“음마는 어느 정도 융화가 끝났으니까 이제부터는 다른… 햐읏!”

“세, 세라님?”

“후, 후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강렬한 메시지가 전해진다.

두고 보자는 저 눈빛.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무서운 꿈을 꿀 모양인 것 같다.

***

잠시 뒤 인간 측 대표자들이 더 들어오고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전부 그 국왕이 보낸 대표들뿐이었고, 교회나 다른 국가들에서 온 대표는 없었다.

매번 서신은 보내지만, 아직 그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겠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에아는 그렇게 말하며 준비한 자료를 나눠주고 발표를 시작했다.

당연히 그 내용은 마족과 인간의 융화 프로젝트가 얼마나 진행이 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세라의 뒤에 서서 그 내용을 같이 들었다.

“저 사람이….”

“…용사….”

인간 측 대표 중에는 이번에 새로 온 인물들도 있는 것인지, 그들은 나를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신경 쓰지 마요.”

“신경 안 쓰니까 괜찮아요.”

뭐, 당혹스러운 것도 한 두 번이지 이제는 익숙하다.

아마 그들에게는 제법 재밌는 가십거리이리라.

마왕을 죽인 용사가 이제는 적극적으로 마족과의 융화를 외치고 다니니까 말이다.

어딘가에서는 음마가 용사를 꼬셨다던가 그런 얘기도 돌고 있는 모양이지만….

뭐, 진위 여부를 밝힐 필요는 없겠지.

“…이상입니다. 보셨다시피 세 종족 중에서는 음마가 가장 동화율이 높았고, 그 뒤로 악마, 트롤 순으로….”

사실 나는 딱히 전문적인 내용은 잘 모른다.

그래서 이런 회의에 참석할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세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잘 들어두세요. 이해 안 가는 게 있으면 저나 에아에게 물어보시구요.”

“정말 이런 것까지 알아둬야 하나요?”

뭐, 내가 모르더라도 어차피 세라나 에아가 있으니까….

“후후, 제가 아는데 당신이 모르면 안 되죠.”

“…크흠….”

왠지 그녀의 말이 부끄럽게 들려 얼굴이 빨개졌다.

“질문 있으십니까?”

에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누군가 손을 들었다.

“지난주에 트롤에 의한 폭행사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그거 말하는 건가.

“정확히는 쌍방폭행입니다. 조사해보니 인간 측에서 먼저 그 트롤을 욕하고 폭행했다고 하더군요.”

“아… 그렇군요.”

이런 식으로 시찰을 자주 다니는 내가 현장의 정보들을 전달해주는 일도 있었다.

뭐, 적어도 이런 역할이라도 있으니까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정말 멀뚱멀뚱 서있기만 하고 오는 셈이니까.

“잘 했어요.”

세라는 꼬리로 엉덩이를 툭툭 쳐주며 그렇게 말했다.

“저 어린애 아니거든요.”

“후후…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꼬맹인데.”

“치사하게 나이를….”

“쉿.”

그녀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인간들에게도 마왕 부활과 함께 깨어났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했을까.

뭐… 그 기간 동안에 조용하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국왕은 우리에게 호의적인 편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들이 그녀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결국 그녀는 사천왕.

마왕의 편에 섰던 마족이니까.

마왕군을 직접 이끌고 다녔던 루엘라나 과거의 용사 헨스보다는 그 죄가 가볍고, 인간 측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으니 적어도 대놓고 공격받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시선이 늘 곱지만은 않다.

지금도 대표단 중에 살짝 불편하다는 티를 내는 인물들이 있다.

누군지는 다 기억해뒀다.

만약에 그녀에게 해꼬지라도 하려 했다가는….

탁.

내 손 위에 그녀의 꼬리가 얹혔다.

“…….”

그녀는 미소를 띠우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것이 세라의 바람이라면야.

“…이상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다.

***

회의가 끝나면 그 뒤로는 시찰시간.

나는 수도를 돌면서 경비단장들을 만나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사정을 들었다.

아무 일이 없는 것이 제일 좋지만, 아무래도 이종족과 섞여 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보니 자잘한 잡음이 조금 많았다.

이를 말로 잘 타이르거나, 용사라는 이름으로 잘 무마시키는 것이 내 주된 업무다.

최악의 경우에는 무력을 동원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까지 가는 일은 별로 없다.

어째 용사라기보다는 경비단의 일원이 된 느낌이지만, 뭐… 나쁘지는 않다.

“이상입니다, 용사님!”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다니까요.”

“그럴 수는 없죠, 덕분에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제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어찌 보면 용사님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경비단장들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이 사람은 특히나 나를 구국의 영웅쯤으로 보는 느낌이라 살짝 어색하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왠지 낯부끄러우니까.

“음… 그래서, 폭행사고가 6건에 절도가 4건, 살인사건이 1건… 많네요.”

“뭐, 어쩔 수 없죠. 수도에는 지휘관 출신의 귀족들과 전장에 나가 싸웠던 병사들이 많으니까요.”

마족과의 융화.

꿈만 같은 소리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같은 인간끼리도 싸우고 나면 쉽게 관계를 되돌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물며 그것이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실질적으로 남은 마족들을 통솔하는 세라나 현 국왕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져서 다행이지, 둘 중 하나라도 삐걱거렸으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웠으리라.

“그래요. 살인사건 쪽부터 가보죠.”

“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남은 시간은 이렇게 수도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보냈다.

가끔 고향 생각도 난다.

다들 뭘 하면서 지내고 있을까.

소식은 몇 번 편지를 쓰면서 전했다.

촌장님의 답장으로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다고는 했는데… 한 번 시간을 내서 찾아가봐야지.

드릴 얘기가 참 많으니까.

그렇게 일과를 마치고 나는 수도에 마련한 집으로 돌아왔다.

귀족들의 자택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부끄러울 정도의 집도 아니다.

작위는 거절했지만, 집까지는 거절하지 못했다.

마당에 들어서자 최근에 고용한 메이드 한 명이 나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받아주고 집 안에 들어가니 가장 먼저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뭘요, 별 일 없었어요.”

그녀는 내게 다가와 외투를 걷어주고는 자기 손에 그것을 걸쳤다.

“세라는 오늘 못 돌아오나보죠?”

“네, 급히 나가봐야 할 일이 있다고….”

그녀, 에르티나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면 제가….”

“아뇨, 괜찮아요. 오히려… 없어서 다행이죠.”

그녀가 슬쩍 웃은 것 같다.

“네?”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자, 들어와요. 저녁은 이미 차려뒀으니까.”

그녀는 살짝 내 팔을 잡아끌며 나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