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 [용사] 굴레
그가 그녀들을 무릎 꿇린다.
세리아가, 아린이, 결국에는 유니 마저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마왕이 되려는 그에게… 머리를 숙인다.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저 가만히, 움직일 수 없다고 하여 바라만 볼 것인가?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되지?
나를 옭아매는 것들.
무언가가 나를 칭칭 묶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힘을 끌어내 내 몸에 두르니 그 부위만 힘이 툭툭 끊겨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곧장 다시 붙는다.
이래서는 소용이 없다.
잘라내도 금방 다시 붙는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이제부터 시간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인간의 시간에 자신을 가두지 말거라.”
“그런가.”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무언가, 무언가라도 해야 했다.
금방 다시 붙는다는 것은, 잠깐이나마 움직일 수는 있다는 뜻.
그럼 매번, 새로 불태워버리면 될 일이다.
“보아라. 너를 섬길 너만의 여자들을.”
신성력… 아니, 이름은 뭐가 됐든 좋다.
힘을 전신에…!
드르륵.
굴레가 돌아간다.
나를 묶는 이 무언가에 다른 기능도 있는 것인지, 힘을 전신에 두르려고 하니 온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프다.
그렇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야…!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을 칭칭 묶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슬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쨍그랑!
사슬들이 모조리 타 사라졌다.
“후윽, 후우….”
“끊었군. 힘을 전신에 두르고 억지로 움직였나.”
그런 나를 보고서도 마왕은 태연했다.
이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닌 것일까.
그럴 지도 모르지.
여기까지는 오는데 성공하더라도, 그 이후에서 하나 같이 막혀 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개를 든 내 시선에 보이는 것은 다 망가진 수레바퀴.
너무나도 많이 부스러져 조금만 치면 산산조각 날 것 같다.
저것을 부숴버리면… 모든 게 끝난다.
저쪽으로 갈까.
굴레 그 자체인 이 수레바퀴는 분명 성의 지붕을 뚫고 내려앉았다.
즉, 저 수레바퀴는 지금 실제로 존재하는 물체라는 뜻.
저것을 부순다면… 조금만 건드릴 수 있다면….
기묘한 확신이 든다.
할 수 있다.
나는 저것을 부술 수 있다.
그것을 향해 간신히 한 발을 내딛기 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마디가 있었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속임수인거죠.”
누구더라.
왠지 머리가 흐려져서 잘 생각이 안 난다.
그렇지만… 왠지 이 말 만큼은 기억이 난다.
속임수.
속임수….
내가 가야할 곳은 저 쪽이 아닌 건가?
내 시선이 반대로 향한다.
그 쪽에는 쓰러진 에르티나가 있다.
힘이 다 빠진 그녀를… 일으켜 세울까?
과연 지금 그녀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쪽으로 향했다.
굴레가 아닌,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최악의 선택은 피했군.”
마왕의 말이 내 뒤에 꽂혔다.
신경 쓰지 말자.
지금은 그것보다… 그녀를 일으켜주어야 한다.
그리고는 그녀들도.
마왕에게 머리를 숙인 그녀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워줘야 한다.
“…용사.”
에르티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자, 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 나를 봤다.
“일어나요. 또 다시 질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저번에도 한 번 무너졌다.
저번 대의 용사와 함께 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과오를 다시 한 번 반복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내 말을 들은 에르티나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렇죠.”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이제 남은 것은….
“일어나라. 그리고 싸워라.”
마치 벌써 마왕이라도 된 듯 거만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제렌.
그러나 그녀들은 그의 말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다.
***
내 앞을 그녀들이 가로막고 있다.
한 때는 동료였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은 그녀들이.
“…보낼 수 없어.”
이렇게 말한 것은 유니였다.
유니가 나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유니뿐만이 아니다.
세리아도, 아린도 나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정말로….”
나는, 그녀들과 싸워야 하는 것인가?
내 소중한 동료들에게?
“아린, 우선은 발을 묶어주세요.”
“알았어요.”
“유니, 당신은….”
“알고 있어. 할 수 있어.”
세리아가 지휘를 맡았는지 그녀가 아린과 유니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셋.
그에 비해 나는….
“저 신관의 저주는 분명 세라의 것이겠죠. 세라의 저주는 몸을 활성화시키는 축복을 역으로 이용한 것. 당신이 방금 사슬을 끊어냈듯이, 신성력으로 대신 움직이면 돼요.”
그래, 에르티나가 있다.
“유니는 저한테 배웠으니, 제가 알고 있어요. 그녀는 집요하게 당신의 약점을 노릴 거예요. 당신이 가장 방심한 순간을 노려 공격하겠죠.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빈틈은 제가 메워드릴 테니까.”
“…그럼 제가 세리아를 상대하죠.”
이것 참, 적과 아군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그런 우스운 상황 속에서 나는, 검을 쥐고 그녀들을 마주했다.
“…죽이지는 않을게.”
“주인님이 죽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내 말을 세리아가 싸늘하게 받아친다.
그녀들은… 지금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마왕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나를 상대하는 걸까?
마음속 한켠에 약간의 불안이 자리 잡았다.
어쩌면, 그녀들은 그저 진심으로 나를 상대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이미 몸도 마음도 그에게 너무나 물들어버려, 그가 마왕이 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용사의 사명보다 그의 충성이 더 우선하게 된 것은 아닐까?
나의 존재보다, 용사의 존재보다 그의 존재, 마왕이 더 소중해진 걸까?
검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툭.
무언가가 내 손에 닿았다.
아니, 닿지 않았다.
잠시 바람이 불었는지 조금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왠지,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그 바람은 누군가의 꼬리와 비슷한 감촉이었던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래서일까? 왠지 우리의 뒤에 한 명이 더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리도 셋. 상대도 셋이라.
그러면 할만하잖아?
덕분에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그래, 분명 잘 될 것이다.
그녀들의 뒤에… 우리를 바라보는 그 둘의 뒤로 자리 잡은 그 굴레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다려.
내가 곧….
“…갈게.”
“시작하자.”
그리고 그녀의 신호를 시작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검을 맞댔다.
순식간에 굳어버리는 내 몸.
아린의 저주다.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세리아의 열 마법이 쏟아진다.
저것에 맞으면 분명 녹아버리겠지.
죽이지 않겠다고 한 것은 거짓이었나?
나는 재빠르게 몸에 힘을 담아 속박된 몸을 억지로 이끌었다.
치이익!
간신히 피한 내 뒤로 타일이 녹아내렸다.
“어떻게….”
“하압…!”
저주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움직이는 나를 보고 당황하는 그녀.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린을 노려 좁아진 내 시야.
그 시야의 바깥에서, 날카로운 물줄기가 치솟았다.
치익…!
그렇지만 그것들이 내 몸을 파고드는 일은 없었다.
“큿…!”
“유니, 어설퍼요!”
에르티나가 막아준 것이다.
고마움을 표할 시간은 없었지만, 속으로나마 감사를 담았다.
“다, 당신한테…!”
다시 한 번 내 몸을 멈추려는 그녀에게 나는 검을 위가 아닌 아래로 휘둘렀다.
베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력화를 시킬 뿐.
우뚝!
내 몸이 멈춰 섰지만, 나는 다시 움직였다.
퍼억!
“크흡….”
“…잠시 쉬고 있어.”
내 검 손잡이가 그녀의 배에 꽂히자, 아린은 기절할 만큼 센 충격이 아니었는데도 풀썩 쓰러졌다.
역시 통하는군.
검 손잡이로 그녀를 제압하면서 아린의 몸 안으로 힘을 흘려보냈다.
마왕의 힘 또한 결국에는 마족의 힘이라 그런가?
완전히 상반되는 두 힘이 충돌하는 것처럼 그녀의 안에서 두 힘이 격렬하게 맞붙었다.
“읏, 흐읏…!”
몸 안에서 일어나는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린.
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이번에는 세리아에게 달려들었다.
“…난 아린과는 달라!”
세리아는 열 마법을, 아니, 본 적 없는 마법을 사용했다.
열이 아니다.
불이다.
그녀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그녀와 나 사이에 불로 된 막이 생겼다.
불길을 뚫지 못해 내가 잠시 망설인 순간, 막 너머로 불길이 나에게 치솟았다.
“큭…!”
삐긋!
“윽!”
하필이면 급하게 피하는 사이에 몸이 굳어버렸다.
아린…!
“주, 주인님께 당신을 보낼 수는…!”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는지, 그녀의 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조금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쿠웅!
“크윽!”
몸에 힘을 두르고 있는 탓인지 그리 큰 타격은 없었지만, 덕분에 불길에 얻어맞고 뒤로 물러나버렸다.
푸슛!
비틀거리는 내 다리 밑에서 타일이 갑자기 솟구쳤다.
터엉!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유니의 공격은 다른 타일에 가로막혔다.
…잠시 옆을 보니 둘이 치열하게 맞붙으면서도 나를 중간중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나를 노리는 유니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
그녀들은 지금 온전한 본인의 의사가 아니다.
분명… 조종당하고 있다!
“참으로 싱거운 수준이군.”
“얼뜨기 용사 파티지.”
둘은 마치 우리들을 구경하듯, 저 멀리 뒤에서 방관자처럼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손에 들린 구체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저것이 완전히 사라지면, 제렌은 마왕이 될 것이다.
“…좋아, 다시 한 번 해볼까.”
그는 손을 들었다.
“일어나라. 그리고 싸워라!”
그러자 그녀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크윽….”
“용사, 조심해요!”
에르티나의 경고.
그 경고는, 그녀들의 더욱 거세진 공격을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주인님을 위해.”
“마왕님을 위해.”
내 뒤에서, 아린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쿠웅!
“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고개를 휙 돌리니, 에르티나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마왕님보다는 약하구나, 스승님.”
“읏….”
단순히 그녀들에게 기운만 북돋아준 것이 아니었는지, 유니는 에르티나를 상대로 우위를 차지한 것 같았다.
“여기서 용사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여유로운 듯 묻는 제렌에게 마왕은 고개를 저었다.
“죽지 않는다. 운명이 그러하기 때문이지.”
“운명이라….”
제렌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잠깐이었을 뿐이다.
그는 우리의 전투를 더 구경하기로 한 듯 했다.
“후우, 후우….”
더 강해진 아린과 세리아를 제압하려면 역시 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루엘라를 쓰러뜨렸을 때처럼.
그러나 그걸 어떻게 하는 거지?
사실 그 때는 워낙 급한 상황이라 나도 모르게 했던 것 같다.
의식적으로 하려니 막막하기 그지 없….
쿠웅!
“크윽!”
“한 눈 파는 거야, 에릭?”
세리아의 불덩이에 맞을 뻔 했다.
아린의 저주로 몸은 계속 묶여있고, 억지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역시 몸이 둔해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다.
“후, 후후… 그래요, 용사님이 이렇게 쉽게 쓰러지시면 안 되는 거예요….”
제길, 어떻게 했더라?
어떻게… 문양을 뺏어왔지?
심장이 뛴다.
빨리… 빨리 셋을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크읏…!”
에르티나는 유니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유니는 매서울 정도로 그녀를 몰아붙이고 있다.
나나 에르티나가 그녀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해야 서로를 도와줄 수 있을 텐데….
에르티나 쪽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역시 내가 어떻게는 하는 수밖에 없다.
“나의 마왕님을… 위해서…!”
세리아의 외침과 함께 이전보다 더 큰 불의 구체가 그녀의 스태프 끝에서 형성되었다.
이건 위험하다.
나는 아린의 저주에 걸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녀의 거대한 불길을 피했다.
이쪽으로 피하면 공격을 다 막지 못한다.
그렇다면 반대편으로…!
불길이 적은 방향으로 몸을 날린 나는, 뒤늦게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아까와는 다른 방향.
그리고 이 방향은… 유니와 에르티나가 있는 쪽이다.
설마, 노린 것인가?
“…에릭.”
“읏!”
당황한 에르티나.
그리고 나를 향해 재빠르게 솟구치는 물줄기.
이건… 그녀도 막지 못한다.
내가 유니와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에르티나가 제시간에 맞추지를 못한다.
그럼 나는?
내가 방어하는 것보다, 분명 그녀의 공격이 닿는 것이 더 빠르다.
안 된다.
저 공격은, 막을 수 없다…!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그렇지만 그녀의 공격은 결과적으로 닿지 않았다.
곧장 눈을 뜨니, 그녀의 공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혹시 에르티나가 무언가 한 것일까?
아니, 그녀도 당황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다.
“유니! 뭐한 거야!”
세리아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그녀가 담담히 대꾸했다.
“…정신이 잠시 흐트러졌어.”
“당신, 이런 상황에서 무슨….”
“미안.”
유니는 짤막하게 사과하고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유니, 당신 왜 스스로… 꺄앗!”
“한눈팔면 안 되죠, 스승님.”
둘은 다시 대치 상태로 돌아갔다.
에르티나도 아니고, 그녀들도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스스로 멈춘 것인가?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흐음.”
마왕이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은… 다른 것을 신경 쓰자.
이 상황 자체를 끝내지 못하면 아까와 같은 상황만 반복될 뿐이다.
만약 다음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 때도 그녀가 공격을 멈춰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겠지.
방금 전의 일은… 그저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우선은 상황을 바꿔야한다.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크읏, 이길 뻔했는데…!”
세리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나에게 불덩이를 날렸다.
피하지 말자.
피하지 말고… 정면에서 승부하자.
나는 나에게 날아오는 불덩이를 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세리아의 문양은 한 때 나에게도 있었던 문양.
닫혀버린 통로를 억지로 비집고 열어서… 힘을 소진시킨다!
번쩍!
“읏…!”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마법을… 아차, 스태프가 없지.
아니, 스태프는 필요 없다.
내가 하는 것은 그저… 마력을 방출시키는 것뿐이니까!
푸스슥!
나를 향해 날아오던 불의 구체는 점점 그 모습이 작아져, 나에게 닿을 즘에는 작은 불씨가 되어있었다.
“이건….”
“끝이야, 세리아.”
스태프가 없으면 마법이 발동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마력의 방출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마법이 되지 못한 마력들이 무의미하게 낭비된다.
스태프가 없어 마법이 실패하고, 실패한 대가로 마력은 소비된다.
세리아의 마력이 점점 줄어든다.
“너….”
“쉬고 있어.”
세리아가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며 주저앉았다.
“요, 용사….”
“너도… 마찬가지야.”
번쩍!
나는 아린의 저주로 그녀를 무력화시켰다.
“흐읏…!”
“후우….”
남은 건… 유니다.
에르티나와 치열하게 맞붙던 그녀는 쓰러진 둘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보고서는 팔을 슬쩍 내렸다.
“…졌네.”
“응.”
남은 것은 유니뿐.
그녀가 나와 에르티나를 혼자서 이길 수는 없다.
현재 내 팔에는 새카만 장미 둘이 임시로 자라나 있었다.
그녀 둘이 한 때 붉은 장미로 존재했던 그 공간.
그곳에 지금은 검은 장미가 잠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유니의 자리에는….
아직 그녀의 힘을 억지로 비집고 열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그녀의 자리에 검은 장미가 자라나겠지.
그래, 아주 미세하게 남은 그녀의 장미 대신.
“…선택해.”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스스로 포기하던지, 아니면 나한테 쓰러지던지.”
검은 장미를 내 팔에서 피워내게 할지 말지를.
“…….”
그녀는 제렌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것으로 그녀들은 모조리 제압되었다.
“…에르티나 씨, 계속해서 지켜봐주세요.”
“알았어요.”
언제든지 유니를 무력화시킬 수 있도록.
나는 에르티나에게 그녀를 맡겼다.
“흐음, 뭐 이것도 운명인 거겠지.”
마왕은 살짝 인상을 구긴 제렌에게 태평하게 말했다.
“그녀들은 주연 배우가 아니야. 저 여자들로는 용사를 막을 수 없지.”
나름 그를 달래는 듯한 말을 한 마왕은, 이제 그 대신 나를 바라보았다.
“본 적이 없는 기술이던데. 그걸로 루엘라를 쓰러뜨린 건가?”
“…….”
마왕이 처음으로 흥미를 드러냈다.
“흐음…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제렌을 바라봤다.
그의 손에 들린 구체는 반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더 늦으면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마왕이 손을 들자 다시 내 몸이 굳는다.
아까와 같은 건가?
그런 거라면….
“무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군. 내가 무언가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갑자기 무슨 소리지?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네. 적어도 나에게 그런 식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힘 같은 건 없거든.”
그는 나를 향해 든 손을 장난스레 구부러뜨렸다.
“이건 일종의 속임수지. 나는 자네들보다 많은 경험으로 그럴싸하게 내 위엄을 포장시킨 것에 지나지 않아.”
“…그렇군요. 기억이 납니다.”
에르티나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굴레의 힘이죠.”
“그렇지.”
“굴… 레?”
마왕이 하는 게 아니라고?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눈치 채는 게 늦었지만… 마왕은 지금 힘을 쓰는 척만 하면서 굴레의 억제를 자신의 힘인 것 마냥 흉내 낸 거예요.”
“무슨… 소리죠?”
그녀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이 굳은 건, 전부 굴레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얘기죠.”
그녀의 말에 수레바퀴를 다시 바라보자, 바퀴의 부서진 틈 사이로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파편들이 보였다.
힘을 써서 더 부서지고 있는 건가?
마치,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부서질 것처럼….
“부숴보겠는가?”
그는 나에게 은근슬쩍 제안했다.
“약해보이지. 수명이 다 닳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왕의 말대로, 바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다.
“다들 저게 눈속임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굴레는 정말로 끝을 향하고 있어.”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마치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편하게 말을 건네는 듯한… 그런 말투다.
“정말, 정말 조금이면 돼. 아주 조금의 힘만으로도… 부서져버릴 거야.”
“…그런 거라면 왜 직접 하지 않지?”
그는 날 꼬드기고 있는 것이다.
내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그야 간단하지.”
내 질문에 그는 쓰게 웃었다.
“못 하니까.”
“…….”
“나도, 자네도. 부술 수 없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못 믿겠으면 어디 한 번 해보게. 그 잘난 공격이 과연 통하기는 하는지. 저번에는 마왕이 10분 정도 시간을 줬는데도 흠집 하나 못 내더군.”
…저번 마왕의 일일까.
“사실이에요. 용사님… 그러니까, 저번 용사님은 저 굴레를 부수려고 했지만 아무런 공격도 먹히지 않았어요.”
내가 처음에 마왕을 공격했을 때와 비슷한 현상인 듯 했다.
분명 공격은 들어갔는데,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는다.
“그래, 무의미하지.”
제렌도 나도, 잠시 그의 말에 마왕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우리는 인형에 지나지 않아. 인형이 주인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나? 주인이 인형의 반격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는 겨우 그 정도의 존재인 걸세.”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몸으로 깨닫고 느낀 진실이다.
“마왕도 용사도… 결국에는 주인 없는 인형극의 일부일 뿐이야.”
“그런 자리를 잘도 넘기시는군.”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다네.”
그는 제렌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마왕보다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미소였다.
“자네들에게는 참 미안하지만, 어차피 정해진 결말은 하나밖에 없어.”
그가 말하는 결말은,
“반복.”
당연히 그렇겠지.
“한 번 더 반복하게. 어쩌면 다음, 재수 없다면 다다음. 혹은 더 뒤일지도 모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홱 돌려 수레바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수명이 다해 무너질 거니까.”
그는… 굴레가 자연스레 소멸하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다 무너져가는 바퀴.
그는 그것을 보고 시간만이 답이라고 결론을 지은 것 같았다.
우리의 손으로는 이것을 부술 수 없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것이다.
제 스스로 명을 다하고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저번보다 금이 많이 갔군. 특히 저 오른쪽의 균열은 이미 중심부까지 올라갔을 거야. 이렇게 균열이 쌓이다보면, 언젠가는 부서지지.”
그는, 이 수레바퀴를 분석하듯 그렇게 말을 잇다가 다시 우리를 바라봤다.
“알겠나? 그저 시간의 문제야. 언젠가는 자연스레 그 끝이 도래할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그게 자네들의 차례가 아니었던 것뿐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렌이 마왕의 힘을 손에 넣는 것이 원래 그가 바라던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굴레라는 것이 우리의 감정, 혹은 생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마왕이 하고 있는 저 말도 과연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
세라는 속지 말라고 그랬지.
그래, 누가 말했는지 머릿속이 한동안 뿌연 듯 막혀있었는데 이제는 기억난다.
마왕은 속고 있는 것이다.
저대로는 부술 수 없다.
그저 부서지기 직전의 상태만을 유지할 뿐.
굴레를 끊기 위해서는,
수레를 부수기 위해서는 마지막 일격이 필요하다.
그렇구나.
이제 알 것 같다.
“그러니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네, 용사. 자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어.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걸세.”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렌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자부심을 가지게. 마왕이 된 자네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굴레의 파멸에 일조하는 셈이니까.”
“지랄하고 있군.”
“뭐?”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크흐흐, 자부심은 무슨. 그냥 꼴려서 받는 건데 이상한 의미 부여하지 마.”
“건방진 놈이군. 뭐, 좋아. 경험상 그런 감정도 100년 쯤 지나면 알아서 누그러들더군 그래.”
그는 대뜸 욕을 뱉어버린 그의 무례에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래, 그는 초연하다.
모든 것에 관심을 잃고, 그저 굴레의 최후만을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많이 흡수했군. 그것이 끝나면 용사, 자네는 나를 죽이게. 그 뒤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상관없으니.”
마왕이 정해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역할은 끝이라는 생각인가.
그 뒤에 내가 제렌을 죽이거나 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운명이 그러지 못하게 만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래서겠지.
“기다리는 동안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게.”
지금인가?
나는 속으로 준비를 했다.
“문양마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문양? 아, 그 누군지 모를 마왕이 만든 마법 말인가? 대단한 마법사였지, 굴레에 개입할 수 있는 생물이 있을 줄이야.”
이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것이 전부인 듯싶었다.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알고 있나요?”
“목적? 내가 느끼기에는 마왕을 돕기 위한 장치 같더군. 마치 자네가 전부 여자를 빼앗긴 것처럼 말이야.”
그는 낮게 웃었다.
조롱할 생각인가.
그렇지만 비웃고 싶은 건 이쪽이다.
“…루엘라의 말에 따르면, 이 마법은 신성력… 에 기생하는 식으로 정착했다고 하더군요.”
“신성력? 자네는 그렇게 부르나 보군. 뭐, 이름 따윈 아무래도 좋아. 그래서?”
제렌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잠시 지켜보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도 얼마 전에 알게 된 거지만, 저와는 연관이 없는 장미 문양에서도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더군요.”
“그래, 그건 좀 신기하더군. 어떻게 한 거지?”
그는,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다.
“보이지 않으십니까?”
“…뭐가?”
“뒤를 보시죠.”
뒤를 돌아본 그의 몸짓이, 굳었다.
“…음?”
“오….”
마왕을 따라 뒤를 돌아본 그도 놀란 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느껴진다.
무력화된 그녀들도 그 둘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 이제는 모두가 보고 있을 것이다.
“바퀴에… 장미가….”
“감싸고 있는 것 같네요….”
다 망가져가는 굴레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넝쿨과 장미가 뒤엉켜 있었다.
부서져 밑으로 흘러내리는 굴레의 파편.
그것은 장미넝쿨이 굴레를 으스러뜨리고 있기 때문에 생긴 흔적이었다.
마왕이 가리켰던 오른쪽의 거대한 균열.
그 또한 넝쿨이 점점 조이면서 생긴 거대한 균열이었다.
“오… 오오?”
그는 놀라면서도 동시에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뭐지?”
“간단한 겁니다.”
나는 왼팔을 들어올렸다.
나의 왼팔에는, 무수한 넝쿨들과, 그리고 또 무수한 장미들이 자라나 있었다.
흰색, 주황색, 파란색, 보라색, 노란색, 검은색.
그리고 분홍색 하나.
갈 곳을 잃은 장미들과, 역할을 다한 넝쿨들.
이들 모두가 그 굴레를 옥죄고 있는 사념이었다.
그들의 소망은 단 하나.
끝내는 것.
“제가, 그저 장미의 힘을 가져올 뿐이죠.”
나는 그들의 부탁을, 바람을 전부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든 장미가 밝게 빛났다.
***
으드득!
넝쿨들이 더욱 바퀴를 조였다.
바퀴의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
내가 더 많은 힘을 쓸수록, 바퀴는 점점 느려진다.
그리고 그렇게 느려진 바퀴를, 넝쿨들이 기다렸다는 듯 조이기 시작한다.
더 많은 파편이 흘러내리고, 더 많은 금이 가고.
그렇게, 느려지고 조여들기를 반복하던 중,
마침내 바퀴의 일부가 무너졌다.
쿠르릉!
“오… 오오….”
그는 놀라운 것을 봤다는 듯, 굴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굴레가… 무너지는가?”
그는 홀로 중얼거렸다.
“나도… 굴레가 없는 세상을 볼 수 있는 건가?”
“마왕.”
나는 그의 앞에 서있었다.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어요. 마족들도.”
“…그랬지.”
“그 모든 건 그저 운명에 따르기 위해서였나요?”
마왕이 부흥해야 용사가 일어난다.
그는, 그저 용사를 부르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걸까?
마치 굴레의 수많은 피해자들 중 하나인 것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군.”
“대답하세요.”
내 말에 그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아니.”
그리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심심해서 그랬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렇군요.”
그는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 저항하지 마세요.”
“그럴 생각이었지만… 미안하군. 생각이 바뀌었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나도 자유로운 세상을 살아봐야겠어.”
그의 손은, 제렌이 들고 있는 구체를 향해 나아갔다.
다시,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아뇨. 당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베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몸을, 나는 굴레를 벗어난 궤적으로 베었다.
사선으로 갈라진 그는 얼굴과 팔만 남은 몸을 꿈틀거리며 제렌에게 다가갔다.
“…다시… 나에게….”
“힘을?”
그가 이으려고 했던 말을 제렌이 큭 웃으며 대신 뱉었다.
끄덕이는 마왕을, 제렌은 걷어찼다.
“난 빼앗은 것은 돌려주지 않아.”
내 쪽으로 밀려난 그 마왕의 파편을, 나는 검으로 내리찍었다.
콱!
“…그런가… 역시 마왕이군….”
마왕은, 그렇게 용사의 손에 쓰러졌다.
“이제 내 차례인가?”
“잘 아시네요.”
그는 쓰러진 마왕과, 검을 든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쿠웅!
다시 또 하나의 거대한 파편이 밑으로 떨어졌다.
이제 우리의 시야에는 아무런 바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위로 반 정도의 수레바퀴가 남아있겠지.
그것들이 다 무너지기까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그에게 다가가자 내 뒤에서 반응이 있었다.
그녀들이다.
제렌에게 몸과 마음을 바쳤던 그녀들.
그녀들은, 지금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많이 달라졌군.”
그는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그냥 생각나는 걸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지.”
그는 태연해보였다.
과연 태연한 것일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것일지.
“용사.”
에르티나가 말했다.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그래.
내가 원하는 대로.
“저한테 하실 말씀 없나요?”
“흠….”
그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는,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네 여자들 참 좋더군.”
빠악!
나는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먹을 날렸다.
“크흡….”
“……그녀들에게 고마워하세요.”
그리고 나는 그의 손에서 떨어진 구체를, 발로 밟았다.
콰직!
허무하리만치, 그 구체는 쉽게 부서져버렸다.
스르륵.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빠져나갔다.
아마 그에게 흡수된 마왕의 힘이리라.
“크흐흐… 적어도 좆같이 죽을 일은 없어졌군….”
나는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내 앞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세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세리아, 아린, 유니.
나를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들에게 말했다.
“…파티는 이제 해산이야.”
그리고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