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 [짐꾼] 마왕
툭 치면 부러질 듯한 거대한 수레바퀴.
마왕의 뒤로 낡고 오래된 수레바퀴 하나가 떨어졌다.
그래,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자… 손을 잡거라, 어린 마왕아.”
그는 나에게 제안했다.
아니, 제안이 아니라 운명이라던가.
마왕이라기보다는 평범한 귀족 시종에 가까운 모습의 그 남자는, 허름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아무런 공격도 통하지 않고 이 모든 전쟁의 주범인 마왕 그 본인이었다.
용사를 따라 들어온 마왕성.
그곳은 아무런 생명도 느껴지지 않는 죽은 성이었고, 최상층 꼭대기에 죽지 못해 살아있는 마왕만이 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용사를 가로막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마왕과 마주했고, 지금 이렇게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서, 새로운 마왕이 된다.
이것은 그의 바람이면서, 동시에 나의 운명이었다.
저 수레바퀴는 어쩌면 그들이 그렇게나 말하던 굴레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척이나 낡고 해어졌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건재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마왕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기를 바라기도 하고.
드륵.
잠시 그 바퀴가 조금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곧 바퀴에게서 시선을 떼고 당연하게 손을 뻗었다.
“주인님!”
“주, 주인님….”
노예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시끄럽군.
노예들이 어딜 감히 주인의 판단에 개입하려 드는가?
노예는 사고할 필요가 없다.
노예는, 그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제렌.”
이 목소리는 유니인가.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소용없다.
내 생각은… 변하지 않으니까.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날만을 꿈꾸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발아래 무릎 꿇릴, 그런 미래를.
“…제렌!”
마왕이 내민 새까만 구체를 받아든 나를 향해, 용사가 소리쳤다.
이것이 마왕의 힘인가.
무언가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차가운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온도다.
“결국 이렇게….”
용사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말했지만, 움직일 수 없는 것인지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용사의 역할은 나를 죽이는 것이지, 자네를 죽이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잠시 움직임을 묶어두었네.”
“호오….”
마왕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들은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었다.
용사도, 내 노예들도, 심지어는 에르티나 마저도.
콰직!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내 눈앞에서 날카로운 물줄기가 날아오다 멈췄다.
“윽…!”
“에르티나… 이런 방해를 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은 없을 텐데.”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기라도 한 듯 힘겨워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어…!”
“그랬지. 그러나 결국 네가 나를 배신하는 것 또한 내 허락 하에 이루어졌음을 알거라.”
그가 에르티나에게 손을 내젓자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보았는가? 마왕이 되면 그대의 것을 이렇게 쉽게 다룰 수도 있지.”
“그것 참… 마음에 드는군.”
그녀들은 충격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배신당한 것처럼.
세리아와 아린이 나를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유니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크흐… 건방진 눈이군.”
“너… 되지 않겠다면서….”
“그랬던가? 뭐, 그럼 거짓말이었던 걸로 하지.”
내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유니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세리아와 아린의 얼굴에도 동요가 퍼져나간다.
이것 참, 아무래도 그녀들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박아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세리아!”
내가 큰 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흠칫 놀란다.
“네, 네…!”
“너는 뭐지?”
“저, 저는….”
세리아는 머뭇거렸다.
고민하고 있는가.
마왕 퇴치라는 자신의 사명과, 나에 대한 복종심 사이에서.
그러나 세리아는 용사 파티의 일원이기 이전에 나의 노예.
그녀가 골라야할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드륵.
바퀴가 회전했다.
“세리아.”
“……주, 주인님의 노예입니다.”
그녀가 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호오, 제법 잘 쓰는군.”
마왕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으, 으읏….”
그녀의 머리가 서서히 바닥에 닿았다.
세리아는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차피 마지막 거부감일 뿐이다.
“아린!”
“읏…!”
자신의 차례가 오자 그녀는 조금 겁에 질린 얼굴을 지었다.
“너의 육체에, 너의 정신에 새겨진 주인은 누구지?”
“제… 제 주인은….”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드륵.
“…당신입니다.”
그렇게 아린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렌!”
용사가 소리쳤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기다리거라, 용사여. 너의 차례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마왕은 무심하게 한 마디 해주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그러고도 남을 만큼의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지금의 용사조차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압도적인 힘.
이 세상을 다 가지고도 남을 무한한 재보.
그것들이 곧… 나의 손에 들어온다.
“유니.”
“…당신, 당신은….”
드륵.
“유니.”
“읏, 흐윽….”
나는 유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너의 주인이고, 빛이다.”
“으, 으읏….”
떨리는 그녀의 무릎이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온다.
“시, 싫어… 이런, 이런 식으로….”
“솔직하지 못한 것이 너의 매력이지. 하지만 지금은 끼부릴 시간이 아니다.”
쿵!
유니의 무릎이 바닥과 닿았다.
“너의 주인에게 인사하거라. 다른 노예들처럼.”
“으, 흐읏….”
그녀의 머리가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온다.
나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세 여자.
그녀들은 용사 파티의 동료였지만… 이제는 마왕의 충실한 부하가 될 여자들이다.
“좋아. 그렇게 쓰는 거다.”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아까보다 조금 더 돌아간 상태였다.
“받아들여라. 마왕의 힘을.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내 손에 쥔 검은 구체가 요동쳤다.
그리고 조금씩, 그 힘이 나에게 들어오기 시작한다.
손바닥으로 힘을 흡수하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구체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느리군.”
“한낱 인간의 몸으로 이 거대한 힘을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지. 자네의 몸이 우선 그 힘에 적합한 그릇이 되어야 해.”
“그런 건가?”
요컨대 순식간에 뚝딱하고 되는 일은 아니란 말이지.
“…으….”
드륵, 하고 바퀴가 굴러갔다.
“어차피 이제부터 시간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인간의 시간에 자신을 가두지 말거라.”
“그런가.”
이제 나는 불멸.
영생의 삶을 얻으니까.
기다리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지겨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으으….”
드르륵.
“보아라. 너를 섬길 너만의 여자들을.”
나를 경외하고 떠받드는 그녀들.
세 노예가 나를 향해 절을 하고 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나를 위해 살아갈 것을 맹세할 그녀들이다.
“…으, 으아아….”
드르르륵.
그녀들의 뒤에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에르티나가 있다.
그녀의 역할은 처음부터 그녀들을 나에게 데려오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역할이다.
마왕은, 그녀가 잠에 들 때부터 이것을 안배한 것이리라.
결국 아무리 저항해봤자 그의 손바닥 위였던 셈.
이것이 마왕.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힘이다.
“자네는 마왕. 세상 그 무엇도 자네를 침범할 수….”
“아아아아악!”
쨍그랑!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바퀴가 잠시 멈췄다.
터질 듯한 힘이, 나의 옆에서 느껴졌다.
그 힘은 마왕의 모든 것을 응집해둔 이 작은 구체보다 더 크고 거대한… 아니, 그럴 수는 없다.
“후윽, 후우….”
“끊었군. 힘을 전신에 두르고 억지로 움직이고 있나.”
그러나 그가 마왕에게 정면으로 저항했음에도 마왕은 태연했다.
“…….”
그는 마치 온몸에 무거운 추를 달은 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에르티나에게 다가갔다.
“뭐하는 거지?”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최악의 선택은 피했군.”
최악의 선택이라?
잠시 그의 시선이 우리 뒤의 바퀴에 닿았다.
그렇지만 그는 에르티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용사.”
“일어나요. 또 다시 질 수는 없잖아요?”
움직일 힘을 되찾은 그녀를 보며 나는 마왕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되지?”
“무엇을 고민하지? 너에게는 너의 손과 발이 되어줄 것들이 있는데.”
그의 말대로다.
“…마왕!”
“보아라. 그가 우리에게 오는군.”
그는 우리를, 우리 뒤의 그것을 바라보며 다가왔다.
“일으켜라. 그리고 대적하게 하라.”
나는 그의 조언을 따랐다.
“일어나라. 그리고 싸워라.”
내 명령에, 그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용사를 마주했다.
“…다들.”
용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주, 주인님을… 위해….”
“후읏, 후으….”
“미, 미안해… 그렇지만….”
그녀들은 싸울 태세를 갖췄다.
“…보낼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