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용사] 마왕
이제 우리를 막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에르티나가 우리를 이끌고 마왕성으로 향했고, 마침내 우리는 그 굳게 닫힌 문 앞에 도착했다.
“…정말 마지막이네요.”
아린이 긴장했는지 목걸이를 꾹 쥐었다가, 뒤늦게 흠칫하며 목걸이에서 손을 뗐다.
평소처럼 여신에게 기도를 하려고 했던 걸까.
그러나 여신은 없다.
다른 어딘가로 가버린 것인지, 아니면 소멸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더 이상 그녀의 개입을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세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마왕성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하늘 높이 솟은 그 성의 꼭대기에, 아마 그가 있으리라.
유니와 제렌은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니의 눈에는 불안이, 제렌의 눈에는 불만이 담겨있었다.
불만이라.
이 앞에 있을 마왕에 대한 불만인 건가?
아니면, 이 굴레 자체에 대한 불만?
우리가 잠시 문 앞에 서있자 곧 문이 저절로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들어가죠.”
“…그 전에 잠시.”
이 안에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나기 전까지는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을 것이다.
나는 문 앞에서 그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지금까지 고마웠어.”
돌이켜보면 먼 길이었다.
그녀들과 만나고 대륙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의 감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파티 해체라거나 그런 극단적인 일 없이 무사히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너희들과 함께여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
그녀들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움, 후회, 미안함… 다 알 수가 없을 만큼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인 눈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내 말에 세리아가 분위기를 풀려고 했는지 슬쩍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죽으러 가는 것 같잖아.”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내가 실패하면 나는 죽거나 혹은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태가 되어버리겠지.
“아니, 죽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실패하지 않을 거니까.
불안한 미래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반드시 해낸다.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며 주저하는 것보다는, 그럴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리라.
세리아는 내 대답에 조금 놀란 듯 했다.
“…그래, 그렇구나.”
그 뒤로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 잠긴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연 것은, 의외로 제렌이었다.
“그럼… 이제 들어갈 차례군, 용사.”
“…네.”
그를 잠시 바라봤지만,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피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제가 안내할게요.”
성 안의 구조를 그나마 제일 잘 아는 에르티나가 다시 앞장섰다.
그렇게 우리는, 어두운 성 안으로 발을 디뎠다.
***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서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허전할 정도로 성은 텅 비어있었다.
장식들은 화려했지만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성 전체가 무언가 가라앉은 느낌을 주었고, 관리를 한 것 같지는 않은데도 먼지 하나 없는 성의 풍경은 다소 이질적이었다.
그렇게 한 층 한 층 계단을 오른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
“…이 앞에 아마, 그가 있을 거예요.”
우리 사이로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왕.
그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와 마주보고 있다.
“…열게요.”
“잠시만요.”
에르티나는 문을 열어젖히려는 나를 제지하고 먼저 자신이 문에 손을 얹었다.
“…괜찮겠네요. 아무 것도 없어요.”
“설마 이제 와서 무슨 함정을 설치했을 리가….”
만약 우리를 해할 목적이었다면 진작에 무슨 수를 썼겠지.
괜한 걱정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제부터, 정해진 운명대로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할 거예요. 정해진 결말을 맞이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썼을지 모르는 노릇이죠.”
운명.
운명에 따르면, 나는 마왕을 쓰러뜨리되 마왕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새로운 마왕의 탄생을 막지 못하고, 그저 허물어져가는 옛 마왕의 시체만을 벨 뿐.
지금부터,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우리를 통제하려들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
나는 굳은 결심과 함께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아마 일부러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진 것 같은 이 문을 열자, 방 안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아무 것도 안 보….”
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벽에 걸린 조명들이 환하게 빛을 내며 방의 가운데까지 환하게 비추었다.
마치 우리를 안내하듯 차례대로 켜지는 등불.
그 불의 카펫 끝에, 그가 앉아있었다.
마왕.
이전의 용사를 배신하고, 마왕의 자리에 앉은 그 남자.
“…마왕.”
“…….”
생긴 것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아 보인다.
입고 있는 옷은 수수하지만, 그렇다고 옷 자체가 싸구려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비싼 옷이라고는 하나, 이 자리에 걸맞는 옷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마왕보다는, 수도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귀족… 아니, 그 귀족들의 시종이나 입을 법한 수수한 옷이었다.
“…에르티나. 이런 식으로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구나.”
“참으로 오랜만이군요.”
그는 우리들이 안중에도 없는지 그녀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을 죽여 드리러 왔어요.”
“나는 분명 다들 물러가라고 명령을 했을 텐데.”
“제가 언제는 당신 말을 들었던가요?”
“…그래, 그랬지.”
그제야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너인가.”
나는 말없이 검을 꺼내들었다.
“성급하군.”
“…대화는 불필요합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의자에 더욱 등을 기댔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 같은 피조물들에게는 처음부터 선택할 권리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는데.”
짙은 체념.
그에게서 절망에 찌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은 포기한 건가요?”
“포기라는 말을 쉽게 올리지 말거라. 너는 그 말에 담긴 무게를 몰라.”
그의 말은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듯 했다.
그 또한, 굴레를 벗어나려고 온갖 노력을 해봤던 것일까.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고, 더 이상 아무런 방법도 없음을 깨닫고서야 그는 포기한 걸까.
“세월 앞에서는 모든 게 무상하더군. 젊은 날의 다짐도, 마왕이 되고자 했던 이유도…. 모든 게 휩쓸려 내려가 버렸어.”
“언제까지 징징거리는 걸 들어줘야하지?”
가만히 듣고만 있을 줄 알았던 제렌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래, 자네 의견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도록 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팔걸이에 손을 걸치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다름 아닌 새로운 마왕이 될 자네의 말이니까 말이야.”
역시… 그는 제렌에게 마왕의 자리를 넘길 생각이다.
내 시선이 재빠르게 둘을 훑었다.
그는, 분명 마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그랬지.
지금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마왕은… 모든 마족들을 다스리는 마족의 왕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 쪽으로 한 걸음 걸어왔다.
그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나는 그에게 검을 내밀었다.
“다가오지 마!”
“그 말은 곧…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무수한 수하들과… 끝없는 재보를 손에 넣는다는 것과 같고.”
그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검에 힘을 입히고 그대로 그에게 휘둘렀다.
쿠웅!
그를 향해 쏘아져 나간 그 힘은, 분명 타격을 입혔으나 그럼에도 그는 멀쩡했다.
“역시 소용없군요.”
“분명 공격은 들어갔는데….”
안타까워하는 듯한 에르티나의 말과 경악한 세리아의 말.
공격은 분명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루엘라처럼 다친 몸을 수복시켰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처음부터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제렌을 제외한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린 듯 했다.
“자네는 무엇을 바라지? 무엇을 욕망하지? 이 자리는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다네. 끝없는 욕심… 그 모든 욕심을 메우고도 남는 것이 마왕이지.”
그는 정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우리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제렌에게 다가섰다.
세리아와 아린이 제렌의 앞을 가리며 그를 막았지만, 제렌도 그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의 말은 무언가 공허하게 들린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나 무상함을 늘어놓아서 그런가?
분명 달콤한 말로 그를 유혹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마왕의 후보가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똑같군요.”
“뭐가요?”
“저번 마왕이 했던 말과 똑같아요.”
에르티나가 그렇게 말했다.
똑같다라….
그는, 일부러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그도, 자신의 의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비로소 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에서는,
조금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동전으로 하늘까지 탑을 쌓는 것도…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여자를 품에 안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을 자네는 누릴 수 있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어.”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저 정해진 대본을 담담하게 읽듯이 제렌에게 다가오며 말을 흘릴 뿐이었다.
“…….”
“나의 모든 것을 이어받거라.”
그는 어느새 제렌의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마왕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무언가 굉장히 어둡고, 새카맣고, 절망적인 기운이 뭉쳐 자그마한 원을 이루었다.
제렌은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주, 주인님….”
“주인님….”
세리아와 아린이 불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이 되지 않겠다.
그는… 이것을 받아들일까?
저것을 받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안 되는데… 몸이 움직이지가 않는다.
무언가 마법이나 저주에 걸린 것이 아니다.
몸이, 지금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나에게 저항하고 있다.
모두가 굳어버린 가운데, 마침내 제렌이 입을 열었다.
“…싫다면?”
그녀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스친다.
아니, 안도해서는 안 된다.
저 질문은…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거부하는 자의 얼굴이 아니다.
“이건 권유가 아닐세.”
마왕의 얼굴에서 더욱 생기가 사라졌다.
“…운명이지.”
쿠르르르!
“나타나셨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상한 소리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우리가 있는 곳은 성의 꼭대기.
그 위로는 분명… 아무 것도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이 소리는 무엇이지?
마치… 무언가 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이 소리는?
쿠웅!
성의 윗부분이 무너지면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우리들의 앞에 내려앉았다.
우리들의 앞, 그리고 마왕의 뒤.
마왕의 뒷모습 너머로 내려앉은 그것은, 너무나 거대해서 전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퀴…?”
마차의 바퀴와도 같은 구조물이었다.
생긴 것은 영락없는 수레바퀴였지만, 이상한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우선… 바퀴는 저렇게 크지 않다.
성의 윗부분을 뭉개고 등장한 그것은, 우리로써는 그 끄트머리밖에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줄 알았으나 그것은 결코 나무가 아니었고,
인간이 만들었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했고,
그러나 무엇보다.
그 다른 어떠한 이상한 점들보다.
툭 치면 부러질 듯 낡고 해진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번보다… 더 망가진 것 같이 보이네요.”
에르티나가 중얼거린 말은 나에게 이상한 예감을 심어주었다.
저것이 굴레의 실체라고?
누가 봐도… 다 부러져가는 모습 아닌가?
“자… 손을 잡거라, 어린 마왕아.”
그 굴레를 뒤로 하고, 마왕은 다시 제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