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 [용사] 관계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그렇게 잠기운을 떨쳐낸 나는 옷을 입고 복도로 나섰다.
“어머.”
“…아린.”
역시 좀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복도에 나와 있던 아린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응.”
솔직히 지금은 아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그녀의 장난스러운 성격은, 요즘 나에게 미묘한 짜증만 안겨줄 뿐이니까.
나는 곧장 그녀를 지나치려고 했지만, 내 뒤에서 그녀가 나를 불렀다.
“…용사님.”
“왜?”
용사님이라.
정말 간만에 듣는 말이다.
“주인님이 하셨던 말… 그건 분명 지어낸 말이 아니에요.”
그 말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그가 했던 말.
마왕이 될 생각이 없다던 그의 말.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에르티나가 아껴뒀던 정령으로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귀띰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님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린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그를 믿지 못한다고 생각할까봐.
“…알고 있어.”
내 말에 그녀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 그래요? 다행….”
“그래도.”
그래도 아직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니까.”
굴레에 따르면, 그는 마왕이 되어야 하는 존재니까.
마지막에 갑자기 마음이 변심하거나, 원치않더라도 억지로 마왕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건 바로 이것이겠지.
굴레가 어떻게 그를 마왕으로 만드는가.
“…네.”
“너희는 그가 마왕이 되고 싶어 한다면 말리지 않겠지?”
그 말에 아린의 눈빛이 흔들린 것 같았다.
“…주인님은 마왕이 되지 않을 거예요.”
“아직 모르는 일이야.”
“저희가, 그렇게 만들게요.”
아린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봤다.
“저희들도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있겠죠. …분명.”
“…기대할게.”
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복도를 내려갔다.
그녀들은 여차할 때 과연 그를 막아설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좋으련만.
방금 나눈 대화에서는 그럴 것이라고 했지만, 그 때가 되어보지 않으면 결국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럴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물을 모아둔 마당 뒤편으로 향하다 그곳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쭈그리고 앉아 세수를 하고 있는 그 여자는, 유니였다.
그녀는 아직 나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풀어헤친 상태다.
유니는 세수를 마치고 뒤를 돌아선 뒤에야 나를 눈치 챘다.
흠칫하며 놀라더니 그녀가 시선을 어색하게 피했다.
“…나, 나는 가볼게….”
“유니.”
가려는 그녀를 나는 잠시 불러 세웠다.
“요즘 안색이 밝아졌네.”
“…….”
유니는 내 말에 잠시 얼굴을 손으로 만졌다.
예전보다 확연하게 좋아진 얼굴.
한창 나와 헤어지고 금방 죽을 것 같던 그때의 그 얼굴이 아니다.
“다행이야.”
“…고마워.”
유니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이제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 말에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유니는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가, 곧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유니에게 있어 나는 어떤 연인이었을까.
서로 대등한 연인?
아니면… 챙겨주어야 할 어린 동생 같은 존재?
가끔 나는 내가 후자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고, 그래서 그녀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다.
이제 나는 너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고.
유니가 없더라도 나는 살 수 있다고.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구나.”
“응.”
유니는 내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무어라 말 해야할지를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어릴 때 네가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촌장님도 나를 도와주시지는 않았겠지.”
“…그냥 쓸쓸해보여서 말을 걸었던 거야.”
그녀는 별 거 아니라는 듯, 그러나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말했다.
“괴롭히던 아이들을 혼내준 것도 너였지? 고마워.”
“그건, 걔네들이 못된 짓을 했으니까….”
유니는 우물쭈물하며 나를 바라보려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종종 나를 집에 초대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밥이 조금 많을 때 불렀을 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유니가 일부러 자기 어머니를 졸라 많이 만들라고 부탁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유니 네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 여기에 있지 못했을 거야. 지금까지 나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그 말에 유니가 옷자락을 꾸욱 쥐었다.
“나한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아냐, 유니 너는 나를 항상 도와줬잖아. …고마웠어.”
“…흐윽.”
유니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신경 쓰지 말아줘.”
그녀와 확실하게 작별하기 위해.
나를 보호해주고, 지켜주던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나 홀로 일어설 수 있게.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흐윽… 읏….”
유니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의 나와 작별했다.
***
“보, 보고 있었나요?”
“…미안해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움직이면 두 분이 눈치챌까봐….”
그리고 나는 곧 미안해하는 기색의 에르티나와 마주쳤다.
…방금 전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니, 조금 부끄럽다.
“그녀와는 완전하게 헤어지기로 하신 거군요?”
“…네. 언제까지고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있어, 그녀는 누군지도 모를 부모보다 더욱 부모 같은 존재였다.
동시에 친구이기도 했고, 가족이기도 했다.
연인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정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느낌이네요.”
“그, 그런가요?”
그녀의 미소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 정말로….”
그녀는 나에게 슬쩍 손을 뻗었다가, 뒤늦게 눈치 채고 손을 다시 거뒀다.
본인도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인 모양이다.
“미, 미안해요. 습관적으로 그만….”
“뭘 하려고 하셨던 거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러나 내 질문에 에르티나의 얼굴은 금세 달아올랐다.
“…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니까… 잊어주세요.”
“네? 아… 네.”
뭔지는 몰라도… 부끄러운 짓이었나보다.
그녀의 손이 향했던 위치로 볼 때, 아마 내 가슴에 손을 얹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지만….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것을 보니 정확하게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슴이라.
한 번 손을 올려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나 이전의 용사에게 자주 했던 행동일지도 모른다.
“…다, 다들 일어나면 다시 출발하죠.”
“네.”
우리는 그렇게 어색한 아침을 보내고, 다시 다음 마을로 출발했다.
***
“우리 용사님, 실력이 좋아지셨네요?”
“네?”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긴… 또 꿈인가.
“나쁜 남자가 다 됐어요, 아주 그냥. 여자를 둘씩이나 울리고.”
“두, 둘?”
유니 말고 또 누가….
아, 미리.
그녀 생각을 하니 살짝 부끄러워졌다.
“당신 때문에 미리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아요?”
“윽….”
“음마까지 꼬시고 실력이 장난 아니시네요, 정말로.”
세라가 꼬리로 내 가슴을 쿡 찔렀다.
“그, 그건 그….”
할 말이 없다.
내가 우물쭈물 거리자 세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미리가 좀 순진한 면이 있어서 그래요. 원래 그렇게 실연도 해보면서 성숙한 음마가 되어가는 거죠.”
“그, 그럼 세라 씨도 실연… 악!”
무심코 뱉은 내 말에 그녀의 꼬리가 내 얼굴을 찰싹 쳤다.
“미, 미안해요.”
“흥, 알면 됐어요.”
당연히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볼에 남은 묘한 감촉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라는 왜 자꾸 내 꿈속에 나타나는 걸까.
“졸업 축하해요.”
“조, 졸업이요?”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한 학생은,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가거든요. 우리 용사님도 그녀에게서 벗어나 밖으로 나간 거니까, 일종의 졸업 아닐까요?”
“그, 그렇군요….”
에르티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가끔씩 이상한 비유를 드는 것 같다.
그녀는 내 얼빠진 대답에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당신 결심한 모양이군요.”
“…네.”
아마 굴레에 대한 내용이겠지.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나도 조금 긴장감을 느꼈다.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나를 보며 물었다.
웃음기가 없는, 진지한 눈동자였다.
“할 거에요.”
그리고 나는 세라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세라는 내 대답을 듣고는 살짝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후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어디서 뭘 먹고 왔길래 사람이 이렇게 변했는지… 어쩐지 에르티나가 요즘 이상해보이더니.”
“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녀의 꼬리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그 굴레라는 건 말이죠. 물리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존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네?”
“으음… 아무튼 확실히 존재하기는 한다는 말이죠.”
“네….”
뭐, 그야 그렇… 겠지?
“아마 곧 보게 될 텐데…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드실 거예요.”
“무슨 생각이요?”
내 질문에 세라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금방 부서질 거 같은데, 하는 생각.”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의 속임수인거죠. 괜히 희망을 주고는 다시 사람을 저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악독한….”
“무,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는데요.”
“보시면 알 거에요.”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많은 용사들이 도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죠.”
세라는 나를, 아니, 나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걸 당신이 해낸다면….”
“해, 해낸다면?”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훅 다가왔다.
세라의 몸에서 묘하게 간질거리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당신은 진정한 용사가 되는 거죠.”
“요, 용사….”
세라는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미소 지었다.
“모험을 마친 용사에게는, 당연히 그에 걸맞은 보상이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아, 그게….”
이야기 속에서는 항상 그랬다.
용사를 물리친 마왕은, 온갖 재화를 얻고 공주님과 행복하게 살았다고….
“후후후….”
그녀는 짓궂게 웃고서는 자기 꼬리로 내 입술을 툭 하고 건드렸다.
“기대하세요.”
“네?”
뭐, 뭐를?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꼬리로 내 몸을 가볍게 훑어 내렸다.
“당신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을게요.”
정신이… 흐릿해진다.
깨어나는 건가.
“…네, 반드시.”
내 마지막 말을, 그녀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
이른 새벽, 잠에서 깬 나는 잠시 천막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보이는 음울한 검은 성.
바로 마왕성이다.
…끝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