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화 〉 [용사] 장미
아침에 일어난 나는 습관적으로 내 팔을 살폈다.
아슬아슬한 크기의 꽃 하나가 더욱 작아져있었다.
이 정도 크기면… 이미 끝났구나.
유니가 그에게 넘어가버린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 증거를 눈앞에 보게 되니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유니….”
그렇지만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때.
마음속에서, 나는 그녀와 다시 한 번 작별했다.
***
이 문양마법을 만든 것은 과거의 마왕.
어쩌면 마왕 본인이 아니라 그의 부하 중 누군가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마왕의 뜻으로 만들어진 마법이다.
그것이 주인 없는 굴레에 끼어들어 그 일부가 되었다는 말은, 확실히 에르티나가 말했던 것처럼 굴레의 빈틈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정확히 알지를 못하니 원.
마왕성까지 점점 가까워지는데, 아직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그렇게 머리를 써서 해결될 문제는 아마도 아닐 테니까요.”
에르티나는 그런 나를 위로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문양을 만든 마왕은 이걸 먼 미래까지 남기고 싶어서 만든 것이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억지로 굴레의 일부에 합치려 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겠지만, 오래 살게 되면 원래 무의미한 짓들을 많이 하게 되는 법이에요. 어쩌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르죠.”
“네….”
굳이 의미를 찾아봤자 아무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왜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먼 옛날에 다 죽어버렸을 테니까.
그렇기에 무슨 가설을 세우든 추측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에르티나의 말대로 정말 별 의미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왠지 그것이 궁금했다.
에르티나도 자세히 알지 못해 더 대답해주지는 못했지만….
나는 내 팔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이제 장미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것들은, 하나는 너무나도 작아 장미처럼 보이지도 않고, 남은 둘은 이제 그 흔적만이 남았다.
흔적….
나에게서 사라진 장미는, 지금은 그의 팔에서 자라고 있다.
나와 같은 장미와 넝쿨.
그에게도 동일한 것이 자라고 있다.
이 얘기도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함께 확인했다.
그 생각이 나자 나는 잠시 팔에서 눈을 떼고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나와 에르티나가 있는 선두.
그리고 나머지가 모인 뒷부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우리 파티는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유니는 뒤에 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과 교류하고 가끔씩 웃는 모습을 보면 유니는 누가 봐도 그들의 일원이다.
“…완전히 가버렸군요.”
“괜찮아요.”
에르티나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살피기에 나는 말했다.
“저하고는 맞지 않았던 거겠죠.”
“…어쩌면 그저….”
“아뇨, 여신 탓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쩌면… 그저 그 운명이라는 것에 따라 그녀의 마음이 바뀌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거라면 나는 여신이 나빴다,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마저 그 굴레가 개입한 결과인지, 아니면 정말 우리 사이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는지.
그래서 나는 남의 탓을 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이번 일로 무언가는 배우지 않았겠는가.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으리라.
“전에 제가 당신에게 저번 용사와 비슷하다는 말을 했었던가요?”
“음, 그랬죠.”
둘이 닮았다고 그랬던가.
“취소할게요.”
“네?”
“지금은 확실히 다르네요.”
에르티나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는… 결국 마지막에 무너져 내렸다.
그와 다르다는 것은, 나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너무 긍정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니 기운이 좀 났다.
내 시선은 다시 제렌에게 향했다.
제렌….
마왕의 자리를 잇게 될 후보.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관심은 없는데.”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과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날, 얘기를 마치고 에르티나는 돌아가기 전에 나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적어도 그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아끼던 정령을 사용해 확인해준 것이겠지.
에르티나의 말이라서 어느 정도 신뢰를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정말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네? 아, 아뇨, 그냥….”
그렇지만 막상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자니 조금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다른 화제로 돌리기로 했다.
다른 화제… 그렇지.
“그 문양 말인데요.”
“네.”
“신성력… 아니, 음….”
이걸 이제 뭐라고 불러야하지?
원래는 여신이 내려준 힘이라 생각해서 신성력이라고 불렀는데, 그 구분이 애매해진 지금은 명칭을 어떻게 정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힘은 여신의 힘이 아닌 건가요?”
“음… 루엘라 말로는 문양마법이 그 힘에 기생하는 식으로 정착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거의 둘이 일체화된 것 같다고 하던데,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해요.”
“그럼 그 신… 성력하고 이 문양의 힘이 거의 동일하다는 말인가요?”
“뭐,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그런 것이겠죠.”
나는 잠시 팔을 바라봤다.
마족들에게 치명적인 힘.
분명 이 힘으로 마족들을 무찌르라고 여신이 내려준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그냥 마왕의 보조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까?
내가 쉽게 죽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처럼?
“…출발할까요?”
“그러죠.”
우리는 다시 출발하겠다고 말했고, 그들 또한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시선이 자연스레 유니의 손으로 향했다.
아침, 우리가 출발하기 전 봤던 그녀의 손에는 못 보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내 반지는 어떻게 했는지, 그녀는 말해주지 않았다.
“…….”
유니는 내 시선을 피했다.
아니, 피하려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 눈동자 속에 담겨있는 감정을 유니는 읽었을까.
적어도 나는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쉬움인가? 슬픔? 어쩌면 미안함?
“가자.”
“…응.”
유니는 제렌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만한 적개심이 보이지는 않는다.
어느새 가까워진 둘의 거리에 살짝 가슴이 쓰라렸다.
“…괜찮아요.”
“알았어요.”
나는 에르티나가 슬며시 내민 위로의 손길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아프다.
아프지만… 견딜 수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왠지 그녀가 내 등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물러나 비어버린 그녀의 곁에는, 어느새 다른 남자가 다가섰다.
***
“앞으로 마을 하나만 더 지나면 마왕성이에요.”
“…정말 코앞이군요.”
끝이 다가온다.
그러나 나는 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무심코 쥔 검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끝 보다는 시작을 생각하자.
모든 게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미래를.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죠.”
“작은 곳이네요.”
그 다음에 들른 곳은 아마 시골마을이였을, 그런 자그마한 곳이었다.
“…아마 여관이 조금 허름하기는 할 거예요.”
“괜찮아요. 잘 수만 있으면 됐죠, 뭘.”
그렇게 마을로 들어선 우리에게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누군가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우리를 보고, 또 누군가는 마치 해방자라도 온 듯한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우리를 보고 있다.
인간도 있고, 마물도 있다.
그들은 집과 거리에서 잠시 멈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마왕성과 가까운 곳이라 웬만해서는 함부로 오지를 않죠.”
“그럼 저희가 누군지 알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마왕을 무찌르길 바라는 사람들과, 마왕을 죽이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의 시선이 뒤엉킨 것일까.
“그렇겠죠. 그렇지만 함부로 공격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들은 약하니까요.”
강한 마물들은 대부분 전쟁터에 있겠지.
여기에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상 전투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여관이… 아, 여깄네요.”
“운영은 하는군요.”
“아예 손님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여관을 운영하는 것은 늙은 할아버지였는데, 손님을 받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1인실? 여긴 그런 거 없어.”
“네?”
그는 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냥 다 똑같은 방이야. 한 서너 명은 잘 수 있지. 그걸로 두 개 줘?”
“아뇨, 둘 말고….”
“두 개로.”
유니가 한 말이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돌아봤다.
유니가 내 곁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그 할아버지에게 말하고 있었다.
“…두 개로 주세요.”
“유니….”
그녀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거부하는 건가?
그렇다기에는 그녀의 반응이 조금 미묘했다.
살짝… 떨리고 있다.
스윽.
그는 하필이면 또 유니에게 열쇠를 두 개 모두 넘겨주었다.
그녀는 잠시 열쇠를 받고 망설이더니 나를 보지 않은 채 손만 슬쩍 내밀었다.
그녀의 손 약지에 끼어있는 낯선 반지.
새끼손가락에 있던 내 반지는 온데간데없다.
나는 그녀가 내민 열쇠를 받으며, 정말 간만에 그녀와 피부를 접촉했다.
찌르르하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유니는 나에게 열쇠를 주자마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열쇠를 넘겨주었다.
“가자.”
그의 말을 따라 세리아와 아린이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니 또한 결국 각오를 다지더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저도 올라가볼게요.”
“네, 그럼 내일 다시….”
에르티나는 가타부타 더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보내주었다.
나는 혼자 묵묵히 계단을 올라, 내 방에 들어섰다.
혼자 쓰기에는 좀 넓은 방과 침대가 나를 반겼다.
“…넓네.”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옷가지를 대충 정리하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가만히 있으니 희미한 소리가 벽 너머로 들렸다.
설마 그들의 목소리인가.
집중하면 무언가 들릴 것 같기도 하다.
잠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던 나는, 그들에게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희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눈을 감고 잠드는 편을 택했다.
자자.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말자.
나에게는 더 확실한 목표가 생겼으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애매모호했던 예전과는 다르다.
굴레를 끊고, 모든 것을 끝낸다.
그것이… 용사인 내가 할 일이다.
꿈에서 들은 것일까, 그런 나를 누군가가 잘했다고 위로해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