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정령사] 빛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으면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하는 말 같지는 않고, 그냥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돈다.
이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한테만 들리는 소리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 같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이 소리의 정체도 무엇인지도 알 것 같다.
내 심장소리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들리는 소리.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자연스레 내 귀와 심장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이다.
다 같이 있을 때는 애써 멀쩡한 척, 밝은 척을 하지만 혼자 있게 되면 자꾸만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에릭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렇지만 동시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든다.
이런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에게 돌아가겠어.
일단 나부터가 그의 앞에서 얼굴을 들 자신이 없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불이 꺼진 방에서 홀로 앉아있다.
침대도 건드리지 못했다.
다른 도구들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렇게 앉아서 자책하는 것뿐이다.
나쁜 건 자기니까 나만 원망하라고 했던가.
그 남자가 했던 말은 자꾸만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지만 그건 결국 내 잘못을 잊어버리겠다는 말이니,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는데….
왜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건지.
“흐윽….”
바보, 멍청이, 머저리….
나는 고개를 묻고 매일하던 자책을 반복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이런 거 말고 따뜻했던 옛날을 생각해보자.
에릭과 함께했던, 그 좋았던 날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전부 내 탓으로 돌리면 된다고. 내가 나쁜 새끼니까.’
아니, 이게 아니야!
이런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건….
‘그래요, 유니를 이해할게요. 마음고생이 많으셨군요.’
아린이 어느 날인가 해주었던 말.
‘뭐… 나라도 고민했을 것 같긴 해. 그러니까… 전부 네 잘못으로만 생각하지는 말라고.’
세리아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지.
왜 생각나는 건 이런 것 밖에 없지?
내가 생각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게 아닌데.
에릭과 함께 했던 일.
어린 시절, 그를 처음으로 데려와 같이 식사를 했던 일.
그의 생일 날 조촐하게나마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놓고 축하해줬던 일.
그가 용사가 되어, 같이 여행을 떠난 일.
그와… 맺어졌던 일.
무언가 이상하다.
이를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쓸쓸해져간다.
그와 함께했던 과거가 마치 빛이 바랜 듯 쓸쓸해져간다.
안 돼, 그러지 마.
그러다가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것 같잖아.
“흐윽… 읏….”
뚝뚝.
눈물이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
똑똑.
“흣…!”
그 때, 굳게 닫힌 방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흔적이다.
순간 어두워진 방이 잠시나마 밝아진 기분을 느꼈다.
혹시… 혹시?
“…에릭?”
한 줄기 희망을 담아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참혹한 것이었다.
“아니, 나다.”
…이런 남자를 기다린 건 아니었는데.
그가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 그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는지 어느새 나는 내가 하는 고민을 털어놓아버렸다.
“어쩌면 내가 에릭을 배신한 것도 그 운명 때문이 아닐까… 비겁하게 그런 식으로 생각했단 말이야.”
전부 내 의사였는데.
내 바보 같은 몸뚱아리가 그에게 이끌려버려서….
에릭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전부 운명 때문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하려고 했다.
“그런 걸 왜 신경 쓰는데?”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걸 고민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쓸데없는 걸로 고민하는 대신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더 애쓰라고?
역시 쓰레기 같은 남자다.
여자를 사람이 아니라 무슨 애완견처럼 보고 있다.
…역시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녀들은 나에게 길러지는 기쁨 운운했지만, 그런 걸로 만족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래, 그럼 간다.”
아.
다시 주변이 어두워진다.
또 혼자 남게 되는 건가?
또 어두운 방에 홀로 갇히는 건가?
싫다.
그에게 길러지는 삶 같은 건 죽어도 사양이지만,
…또 혼자 남는 건 싫어.
반지를 끼고 나를 찾아오라고, 그가 전에 말했었다.
나는 무심코 발치에 굴러다니는 그의 반지를 쥐고 문을 열었다.
덜컹!
“…비겁해.”
사람을 이런 식으로 공략하다니.
정말… 쓰레기야.
그리고 나도… 똑같은 쓰레기고.
***
“벗긴다?”
“…….”
나는 그의 말에 저항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내 몸에 닿으면 저절로 반응하고 만다.
“읏….”
그에게 길들여진 몸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반응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내 정신 또한 사람과의 접촉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너무나도 오랜만에 다른 사람과 접촉한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다.
그가 내 옷을 하나씩 벗긴다.
저항을 해야하지 않을까.
싫다고, 당신의 애완견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을 해야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왠지 입을 열면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아 꾹 참았다.
그러나 그가 내 뒷목을 어루만지는 순간,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하읏…♥”
내 다리 사이가 조금씩 젖어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왜… 왜 이런 걸로….
“오랜만에 느껴보는군.”
“…….”
그는 날 온몸으로 껴안았다.
증오스럽지만… 화가 나지만… 따뜻했다.
“싫어….”
“정말로?”
무심코 흘려나온 말에 그가 되물었다.
싫냐라.
싫다고 하면, 여기서 돌아가버리는 건가?
나에게 사람의 온기를 주는 척하다가, 돌아가버린다고?
차갑고 어두운 방 안에 다시 갇힐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겁이 나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래, 알았어.”
내 손짓의 의미를 눈치챈 걸까.
그는 알몸이 된 나를 다시 침대 위로 눕혔다.
침대 위에는 나와 그 둘이 올라와 있다.
그는 내 다리를 잡고, 조금씩 벌린다.
“읏, 흐으….”
그러면서 내 허벅지를 쓸어내리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아….”
곧장 넣을 줄 알았는데, 그는 내 몸 곳곳을 어루만졌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새기듯이.
“읏, 흐읏….”
몸 곳곳에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가 남긴 흔적들이 열이 되어 선명하게 내 피부 위에 남는다.
“시작할까?”
“…마, 마음대로….”
그의 말에 살짝 가슴이 뛰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툭.
내 다리 사이로 익숙한 물건이 닿았다.
“하으….”
앞으로 있을 일을 기대하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니야… 이건… 이건….
또 변명부터 찾는 내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또 그를 팔아먹으려고 하는 구나.
이제 솔직해지자고.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손이 아닌 내 자의로 다리를 더 벌렸다.
“음?”
“…와.”
“뭐라고?”
나는 입술을 깨물고, 굴욕적으로 말했다.
“…들어오라고.”
“그 말, 후회하지 않게 해주지.”
그리고, 나는 다시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흐으읏…♥”
뿌리까지 들어온 그의 자지.
처음에는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웠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내 질 안이 하나하나 그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흥분한다.
“하읏, 흣… 하긋…♥”
그가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부르르 떨린다.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라 그런가?
평소보다도 더욱 몸이 예민해진 느낌이다.
“하아, 하아… 무, 문양이….”
내 시야 구석에서 빛이 난다.
내 문양이다.
장미가 빛을 발하고 있다.
고개를 살짝 돌리려고 하니, 그가 내 볼에 손을 올리며 보지 못하게 막았다.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읏.”
어떻게 되어있길래?
그렇지만 곧 그런 의문은 밀려드는 쾌락의 파도에 덮쳐 쓸려 가버렸다.
“핫, 하읏… 윽, 흐그읏…!”
부르르.
연약한 내 몸은 벌써 가버렸다.
“언제 봐도 참 약한 몸이군. 안 그래?”
“하아, 하아…♥ 왜, 왜 나는 이런 몸으로….”
왜 이렇게 나는 이런 쾌감에 약하지?
내 다짐도, 약속도.
전부 육체적인 쾌락 하나를 이기지 못했다.
나는… 더러운 여자인 걸까.
“그건 네가 그만큼 솔직하다는 뜻이지.”
“…솔직하다고?”
아니야… 나는 그저 거짓말만 일삼는 더러운….
“기분 좋은 걸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솔직한 거지 안 그래?”
“…….”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그가 다시 움직였다.
“읏…♥”
“안에다가 싸도 괜찮지?”
안에다가….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지?
물론 오늘은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마, 마음대로…♥”
“좋아, 그럼 간다.”
앗, 이게 아닌….
“읏, 흐읍…!”
부르르륵! 부르륵!
그의 정액이 내 자궁을 사정없이 두드린다.
“흐그으읏…♥ 하으윽…!”
나는 손과 발끝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를 세게 안았다.
“하앗, 하아….”
“한 번 더 할까?”
“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에릭과 헤어져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는 내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는 것을.
그래도…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나를 욕해줘.”
“싫은데.”
“부탁이야.”
내 말에 그는 말없이 다시 자지를 밀어넣었다.
“하극…♥”
“지금 있을 대화는 이거면 충분하지. 안 그래?”
아….
“……응.”
그렇게 그는 아침까지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나의 방을 밝게 비춰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