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짐꾼] 외로움
“아린.”
“…네.”
아린은 힘없이 대답했다.
“후우, 이리와.”
“……네.”
그녀는 얌전히 내게 다가와 폭 안겼다.
자기 대신 나를 독차지하는 그녀에게 세리아도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늘만이야.”
“…고마워요.”
용사에게서 진실을 듣고 난 뒤로, 그녀는 줄곧 힘이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한 기분이겠지.
거의 평생을 교회에서 살아왔는데, 결국 그 근본 자체가 뒤흔들리고 만 것이다.
“…죄송, 죄송해요. 저한테는 주인님이 가장 우선인데… 그래도, 그래도 너무 충격이라….”
“후우… 그래, 알았으니까.”
저번에 슬쩍 말한 적이 있었다.
여신보다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그렇지만 그게 여신을 버리겠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뭐… 이해는 한다.
솔직히 나도 세리아도 충격을 많이 받았는데 그녀가 멀쩡할 수는 없겠지.
“…결국 이렇게 되는 것도 전부 운명이었던 거군요.”
“그런가보네.”
그녀들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결국 전부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말인가?
“기분 나쁘군.”
“기분 나쁘네요.”
그럼 뭐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무의미했다는 건가?
마치 사실 내가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것 같아 불쾌하다.
대체 어디까지가 운명 어쩌고 하는 것이지?
그녀들이 나에게 바치는 충성도?
전부 운명에 따라 새겨진 것뿐이라는 것인가?
나는 그녀들의 검게 물든 장미를 바라보았다.
이건 다른 마왕의 유산이라고 했던가.
결국 그렇다면 그녀들의 타락 자체는 여신의 의도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여신의 굴레가 어디까지 우리를 강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루엘라를 나에게 안길 생각은 없지 않았을까.
아니면 용사와 나머지 두 사천왕의 관계라던가.
용사가 설명한 대로 내가 새 마왕이 되고, 용사가 구 마왕을 죽이기 위한 존재라면 굳이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이전 굴레도 비슷했다는 걸로 보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만….
솔직히 나는 모든 게 굴레에 맞춰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주인님에 대한 제 복종심이 전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많이 불쾌하네요.”
“으읏… 주인님….”
흔들리는 그녀들에게 나는 말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나를 섬기고 싶다면 그냥 그걸로 된 거야. 귀찮게 더 생각하지 마.”
“…후후, 그러네요.”
그래, 뭐… 어디까지가 만들어진 것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그런 거 골치 아프게 생각해서 뭐하겠는가?
어차피 이제 확인해볼 수도 없는 거 아냐?
“그럼 그냥 그걸로 끝인 거지. 됐어, 더 생각하지 마. 아린도, 이 이상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네….”
그녀는 조금 기운이 난 얼굴로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나는 화제를 돌릴 목적으로 세리아에게 물었다.
“유니는?”
“방에 혼자 있을 걸요. 고민이 많아 보이던데.”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건지, 대화를 듣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먼저 돌아가 버렸다.
“흐음….”
“한 번 가보실 건가요?”
한 번 상태도 확인할 겸, 유니를 위로해주며 마음을 빼앗아야하긴 하는데….
“그럼 잠깐 좀 갔다 와야겠다.”
“아….”
내가 몸을 일으키자 아린이 아쉽다는 듯 신음을 냈다.
“갔다 오면 더 해줄 테니까.”
“네에….”
“잘 갔다 오세요.”
그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유니를 찾아갔다.
굳게 닫힌 그녀의 문.
나는 가볍게 노크했다.
똑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말을 걸어야 하나?
“…에릭?”
“아니, 나다.”
“읏….”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곧장 용사의 이름이 나왔지만, 내가 누군지 깨달은 그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나?”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나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러고 있으면 내가 널 공략할 수가 없잖아.”
“…순순히도 말하네.”
“모르고 있었나?”
“아니.”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나는 쓰레기야.”
그렇지, 라고 무의식중에 말하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휴, 공든 탑을 단숨에 무너뜨릴 뻔했군.
나 정도로 자제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실패했을 것이다.
“무슨 소리야?”
“그 얘기를 듣고 생각해버렸어. 어쩌면 내가 에릭을 배신한 것도 그 운명 때문이 아닐까 하고…. 비겁하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책임을 저버리려고 했단 말이야….”
“뭔 고민을 하나 했더니.”
그런 별 볼일 없는 걸로 고민하고 있었던 건가?
자기가 못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지만, 용사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 운명의 탓으로 돌리려고 했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정말 쓰레기….”
“하아… 유니.”
나는 살짝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런 걸 왜 신경 쓰는데?”
“…뭐?”
“그딴 쓸데없는 걸로 왜 고민 하냐는 말이지.”
내가 원래 쓰레기 같은 놈이라 그런가?
나는 왜 남의 탓을 하는 걸로 자신을 자책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자꾸 그런 나쁜 생각만 하고….”
“나는 신경 안 쓰는데.”
“…뭐?”
잠시 멈칫한 유니에게 나는 말했다.
“난 네가 무슨 비겁한 생각을 하든지 상관 안한다고.”
“그게 아니라, 그냥 내가….”
“내가 신경을 안 쓰는데, 네가 왜 신경을 써?”
“무, 무슨 소리야.”
유니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직 자각이 부족한 그녀에게, 나는 당당하게 말해주었다.
“너는 나만 보면 돼.”
“…뭐?”
“내가 보기에 난 너무 쓰레기 같고 어쩌고… 그딴 쓸데없는 걸로 기운 빼지 말라고. 내가 널 귀여워해주면 넌 그냥 그걸로 만족하면 되는 거야. 알았어?”
유니는 할 말이 없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화난 듯한 그녀의 말이 들렸다.
“…날 그딴 식으로 취급하지 마.”
“적어도 그렇게 고민하는 것보다는 행복하지 않겠어?”
“나는 네 애완견 같은 게 되지는 않을 거야.”
애완견이라.
하긴, 세리아와 아린이나 둘 다 그런 느낌이기는 하지.
꿈도 크긴.
“그럼 난 필요 없다는 거지?”
“…읏, 피, 필요 없어.”
유니는 애써 허세를 부리며 그렇게 말했다.
또 혼자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텐데.
그녀의 목소리에서 미련이 묻어나온다.
“그래, 그럼 알았어. 그녀들한테도 널 방해하지 말라고 전해주지. 혼자 더 고민해보라고.”
“아….”
잠시 그녀가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길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간다.”
“잠까….”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문 앞에서 물러났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덜컹!
그렇지.
나는 여유롭게 몸을 돌렸다.
입술을 깨물고 나를 노려보는 유니가 보였다.
“필요 없다며?”
“…비겁해.”
“뭐가?”
그녀의 손에는 반지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내가 선물해준 그 반지가.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 주제에… 이런 식으로….”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읏, 내가 혼자 있는 걸 싫어한다고… 알면서도….”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 느껴지는 외로움.
그렇지만 나나 그녀들이 있으면 외롭지 않다.
“…그러게 그런 멍청한 방법으로 자길 괴롭히지 말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말했지? 자꾸 더러운 면만 보려고 하지 말고, 나를 통해서만 너를 보면 되는 거야.”
“그, 그런 건… 그랬다간 나는….”
자기 잘못도 잊어버리겠지.
반성할 일도 없을지 모른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도 없잖아?”
나는 슬쩍 그녀를 안았다.
“읏….”
그녀의 손은 내 등 위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마 그 바로 위에서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내치지 않는 유니의 반응을 확인하고 손을 슬쩍 그녀의 머리 뒤로 향했다.
“하읏…♥”
그녀의 약점인 목 뒷덜미를 어루만져주자 그녀가 부르르 떨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겠지.
“여기는 장소가 안 좋네. 잠깐 들어갈까?”
“자, 잠시만….”
나는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를 안은 채 유니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불은 꺼져있었다.
침대는 앉은 적도 없는지 깔끔하게 정돈된 채였고, 그 외의 사소한 도구들조차도 제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이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던 걸까?
스스로를 자책하기만 하면서?
“치, 침대는 안돼….”
“왜?”
“구, 구겨지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침대는 원래 그러라고 있는 거야.”
나는 그녀를 침대 위에 풀썩하고 눕혔다.
“흣….”
유니의 눈이 어지러이 돌아갔다.
나는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혀두고는 잠시 고개를 돌려 불을 찾았다.
이렇게 어두워서야 제대로 할 수나 있겠나.
불을 켜야겠다.
“아… 자, 잠시….”
나는 그녀의 제지에도 불과하고, 불을 붙여 방을 환하게 밝혔다.
“읏….”
그녀는 눈이 부셨는지 자기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리지 마.”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밑으로 내렸다.
“나, 나는….”
“환하니까 좋잖아?”
“…….”
유니는 빛에 적응할 때까지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눈물을 흘렸다.
“우는 거야?”
“…갑자기 밝아져서, 눈물이 나왔을 뿐이야.”
그리고 유니는 더 이상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