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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216화 (216/236)

〈 216화 〉 [용사] 굴레

주변에 세리아나 아린도 없다.

그저 단 둘이, 그것도 사이좋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시죠?”

아직 그들을 보지 못한 에르티나는 의아한 듯 물었지만, 곧 그녀 또한 둘을 발견했다.

“…당신.”

그녀는 제렌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에르티나의 말에 따르면 그는 마왕의 죽음을 위해 필요한 존재.

마왕이 자신의 힘을 넘겨주어야만 하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곧 그가 새 마왕 후보라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마왕의 힘을 이어받을 그가 없으면 마왕이 죽지 않으니 참 난감한 이야기다.

내버려두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고, 방해하면 그가 죽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나 혼자로써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모두에게 물어보고는 했다.

모두의 지혜를 빌리면, 무언가 좋은 방법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동료란 원래 그러한 존재 아니던가?

그렇지만, 지금의 내가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내 고민을 읽었는지 에르티나가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실래요? 당신의 판단에 맡길게요.”

차라리 에르티나가 모두에게 말을 하라고 말해주기라도 했으면 편했을 텐데.

하지만 이런 고민은 내가 직접 하고 결론을 내려야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

남이 해준 대로만 따라가면 결국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남을 탓하기만 할 테니까.

그래,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을 지어야 한다.

“…둘 다, 아니, 오늘 밤에 다 같이 할 얘기가 있어.”

이 자리에 없는 세리아와 아린까지 포함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둘이었다.

…어느새 저렇게까지 사이가 좋아진 것인가.

몸이 절로 움찔거렸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들 앞에서 추한 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에르티나에게도.

나는 그 손에서 애써 시선을 떼 그들을 바라봤다.

“……중요한 이야기야.”

유니는 조금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나 같은 건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나와는 이제 연인관계가 아니니까 그를 찾아가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래, 상관없다.

상관없어야 하는 것이다.

제렌은 그에 비하면 훨씬 여유로운 태도였다.

어차피 거의 다 넘어왔다고 여기고 있겠지.

실제로도 이 생각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마음에 안 든다.

새로운 마왕.

그는 마왕이 되는 것을 반길까?

죽일 수는 없다고 그랬지.

그렇지만 정말로…?

여기서 갑자기 칼을 찌른다고 하면, 아무리 운명이 그를 보호한다고 해도 죽어버리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그를 찌를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잠시 생각만 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때도 제가 얘기를 할까요?”

본인이 얘기해주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지.

그렇지만 나는 내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세리아와, 아린과, 유니와 함께.

모두와 함께.

“…아뇨, 제가 할게요.”

그녀는 알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르티나는 제렌을 바라보며 선택을 잘 하길 바란다는 말을 다시끔 상기시켰다.

저번에 한 번 그런 말을 했었지.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마왕이 되는 선택을,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말 하나 가지고 미래가 바뀔 수 있을까?

그렇지만 에르티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으리라.

설령 의미 없는 짓이라고 한들, 이 희박한 가망에 걸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역시 아무 것도 이해못한 표정으로 살짝 얼굴만 찌푸렸다.

“용사, 이만 가죠.”

“…네.”

나는 유니를…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유니를 바라보고 몸을 돌렸다.

그것이 너의 선택이라면, 나는 더 이상 참견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간섭할 이유가 없으니까.

아직 가슴이 아프지만… 그건 내가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겠지.

잠시 말없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자 에르티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신가요?”

“네… 라고 하고 싶지만, 역시 조금 힘드네요.”

“그래도 강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데는 성공하셨어요. 많이 변하셨군요.”

변화라….

나는 성장한 걸까?

아니면 그저 바뀌었을 뿐인 걸까?

“저는… 잘 하고 있는 걸까요?”

“네.”

그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두려워하는 것, 마주하기 힘든 것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당신에게는 있으니까요.”

“용기….”

“그래서 당신이 용사인거죠.”

그런 건가.

적에게서 위로받다니 참 묘한 기분이다.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지만.

“…감사해요.”

“저는 바람이 되기로 했어요.”

“네?”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용사님께서 전에 그런 비유를 드신 적이 있거든요.”

아마 나 이전의 용사를 말하는 것이겠지.

“자신은 배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정하는 선장이라고 하시더군요. 실제로 배를 관리하고 모는 것은 그 밑의 다른 선원들인 거죠.”

“음, 네….”

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바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불어주면 항해하기가 더 수월하죠. 그 말을 들은 저는 용사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부는 바람이 되어주겠다고 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에 가벼운 바람을 쏘아 보냈다.

펄럭하고 앞머리가 조금 휘날렸다.

“…하지만 결국 그가 바라는 바람이 되어드리지는 못했네요.”

쓸쓸해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대신 당신을 위해 조금이나마 불어드릴게요.”

“아… 고, 고마워요.”

내 감사에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어떨 것 같아요?”

“네? 뭐, 뭐가요?”

“만약 당신이 실패하고… 당신의 연인이 뒤를 이어 후대의 용사를 돕고 있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실패하고, 나의 연인… 지금으로써는 자연스레 유니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아무튼 만약 그녀가 다음 용사와 함께 못 다한 나의 뜻을 이어가준다면?

“…고마울 것 같아요.”

먼 미래에서까지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아니, 후대의 모두를 위해서 이렇게 애써준다면 나는 고마울 것 같다.

그건 본래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내 대답에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그래요. 그러면 용사님도 분명 그러셨겠죠.”

에르티나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

그날 저녁, 나는 모두를 숙소 1층에 모아 에르티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약속대로 내가 하는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고, 가끔 내가 보충 설명을 부탁할 때만 조금 말을 이어주는 정도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아린이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신이 사실은 사라진 상태라는 사실로도 모자라, 이 상황 자체가 그 여신이 만든 굴레 속이라는 진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종교적인 상징물이 걸린 목걸이를 그녀는 으스러뜨릴 듯 세게 쥐었다.

“여, 여신… 아니, 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고 하고 싶지만, 확실히 그럴 듯한 말이네.”

세리아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아보였지만, 그래도 아직 잠잠하게 앉아 있을 여유는 있는 것 같았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린, 일단 진정하고….”

“보, 보세요!”

아린은 기도하며 나에게 축복을 내렸다.

팔이 더욱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이 마법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힘 자체가 곧 여신의 증명 아니던가요? 아, 아무리 용사님이라도 그런 말은….”

“세라가 그러더군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나 대신 에르티나가 끼어들었다.

아린이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신의 목소리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고, 그녀의 힘을 오용해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고요.”

오용이라.

문득 그녀가 축복을 다르게 쓰던 모습이 생각났다.

사람들을 강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속박하고 조종하는 그 모습을.

분명 그런 행동은 여신이 바라던 본래의 기능이 아니었으리라.

“그건….”

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린 본인도 그 운용법을 배웠다.

하지만 아린이 그로 인한 부작용을 겪은 적은 없었다.

“그건, 그냥… 여신의 묵인으로….”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것이겠죠. 저는 교리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요.”

에르티나는 그녀와 심도 깊은 토론을 할 만큼 교리에 자세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아무도 아린의 말에 반박해주거나, 동의해줄 수 없었다.

“아냐, 그럴… 그럴 리가….”

혼란스러워하는 아린의 어깨에 제렌이 손을 올렸다.

저런 모습을 보니 괜히 그에게 좋은 일만 해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사소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의 본심을 듣고, 이 굴레 자체를 끝낼 방법을 찾아야한다.

“그, 그럼 대체 어디까지가 정해진 운명인거죠?”

유니는 나에게 말을 걸기가 여전히 불편했는지 에르티나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희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어요.”

“그럼 혹시….”

그녀는 망설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혹시 저희가… 한 것도 전부….”

“미안하지만 잘 안 들렸어요. 뭐라구요?”

“…….”

유니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끝내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잠시 기다려봤지만 유니는 더 말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유니는 더 얘기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음….”

나와 그의 시선이 부딪혔다.

“당신은, 마왕이 될 건가요?”

이 얘기를 그에게 해야하나 고민을 좀 했다.

만약 이 말을 듣고 없던 욕망이 생겨나면 어떡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 만약 그가 마왕이 되고 싶어 한다면 차라리 지금 확인해두는 것이 더 나으리라 판단했다.

어차피 운명이라는 것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이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부터 대비해두는 편이 좋겠지.

…과연 막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는 조금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여기서라도….”

내가 칼에 손을 얹자 세리아와 아린의 반응이 날카로워졌다.

본능적인 반응인 듯 했는데, 그 뒤 그녀들에게서도 약간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여기서 그를 보호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마왕을 옹호한다는 뜻이 되니까.

세리아와 아린은 입술을 깨물며 갈등했다.

유니는, 아까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채였다.

“자, 잠깐만.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반복되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그래도 자기 주인이 죽는 것만큼은 막아보겠다고 세리아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맞아요. 쉽게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다들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이겠죠.”

에르티나가 팔짱을 끼면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게 된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은 듯 했다.

세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아직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방금 전의 대답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는 그저 반응을 떠본 것 같았다.

“…사람 놀리지 말고, 대답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오… 이거 죄송합니다.”

그는 옛날 말투로 돌아가 슬쩍 웃었다.

“제가 용사님의 기분을 해치게 만든 것 같군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마왕이라….”

만약 나라면?

나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자리에 앉을까?

힘.

마왕이 되면 무척이나 강한 힘을 얻을 수 있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돈도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적어도 무언가를 걱정하며 살 필요는 없겠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그런 삶을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의 나라면 받았을지도 모른다.

마왕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테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줄 만큼 여유가 넘치던 삶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받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으니까.

나는 인간의 피와 살로 된 옥좌에 앉고 싶지가 않다.

나뿐만 아니라 에르티나도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과연 그는, 여기서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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