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짐꾼] 반지
꿈 때문에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나갈 채비를 했다.
“으음… 주인님?”
“나갔다 온다.”
“네에….”
세리아는 살짝 눈을 뜨고 나를 봤다가 다시 잠들었다.
만약에 유니가 안 나와 있으면… 뭐, 혼자 산책이나 하든 해야지.
그런 걱정도 조금 했지만 다행이 오래 기다리지 않아 유니가 밖으로 나왔다.
“오, 역시 나왔구만?”
“…….”
어둡던 그녀의 얼굴은 나를 보자 순간 잠시 밝아졌다.
그렇지만 곧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는지, 쉽게 말을 걸지는 못하고 잠시 망설이기만 했다.
사람 참 번거롭게 만드는군.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가자고.”
물론 유니는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고, 슬쩍 옆에 섰다.
“…뭐해?”
“그래, 가자.”
나를 애써 거부하면서도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것인지 살그머니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와 거리를 걸었다.
“반지 안 꼈네.”
“…내가 찾아온 게 아니잖아.”
하긴 따지고 보면 내가 찾아간 셈이다.
“흐음, 그래도 좀 아쉬운데. 오늘만이라도 잠깐 끼는 게 어때?”
“싫어.”
그렇게 말하며 유니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래, 그럼 말고.”
싫다라.
수중에 반지 자체가 없었으면 안 가지고 나왔다고 말했겠지.
즉, 지금 반지를 끼우지는 않았어도 들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내 착각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왠지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안색이 좀 밝아 보이네.”
“뭐?”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은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좋아져있었다.
용사와 헤어지고 혼다 다닐 때는 그야말로 죽은 사람 같았는데, 그녀들과 다시 교류하면서 유니의 얼굴도 활기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역시 혼자 있는 건 쓸쓸해서 싫은 건가.
꿋꿋이 혼자 있기를 고수했던 건 자신에게 주는 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용사에게 원망 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으니 대신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 죄책감을 달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뭐, 지금의 그녀가 제정신은 아니니까.
아무튼 그렇게 스스로가 만든 고행은 내가 다시 그녀들을 붙여줌으로써 더욱 괴롭게 되었다.
겨우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질까 싶은 시기에, 다시 사람들과 교류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혼자 있을 때의 상실감은 더욱 커졌으리라.
그래서 나를 본 그녀의 얼굴이 잠시 밝아졌던 것이겠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그녀의 몸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흐음, 그래.”
자각을 못한 것일까,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
어느 쪽이든 굳이 건들 필요는 없어보였다.
잠시 그녀와 더 걷다보니 문득 다른 건물들 사이에서 유달리 낡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바로 양옆의 건물들은 멀쩡한데, 왜 저 건물만 저렇게 낡았지?
마치 고의적으로 방치한 것만 같다.
“…교회.”
“응?”
“저거 교회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확실히 지붕 부분이 박살나서 그렇지, 생긴 게 딱 교회였다.
“…흐음.”
새벽의 여신은 마물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마물에게 점령당한 이 땅에서 교회가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 인가?
“아예 부숴버린 것도 아니고 저렇게 흉한 상태로 남겨두는 건 잘 이해할 수가 없군.”
“…그러게.”
이제는 나름 맞장구도 쳐준다.
나는 그녀의 무덤덤한 척하는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교회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박살난 것을 보면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저 여신을 믿지 않는 것이겠지.
저 교회는 이 곳 사람들의 떠나버린 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왜 그렇게 관심을 가져?”
“아니, 그냥 신기해서.”
사실 나도 교회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린이 보면 조금 슬퍼할 것 같다.
“…아마 여기 사람들은 다 신을 저버렸을 거야.”
“그래?”
사실 별로 관심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유니가 자발적으로 꺼낸 이야기를 허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 적당히 관심 가는 척을 했다.
“스승… 님이 그러셨거든.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스승이라.
에르티나와 둘의 훈련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니는 여전히 그녀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인데?”
어쩌면 유니가 이렇게 말을 걸어주는 건, 밤마다 그녀들이 유니의 말동무를 해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침묵하며 보내기에는 그녀들과 이야기하며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겠지.
제 발로 온기를 피해 도망친 사람을 다시 모닥불 앞에 앉힌 것이다.
본인은 못마땅해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온기에서 다시 벗어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여신은 왜 자기들을 돕지 않았는가. 뭐 이런 거….”
“맞는 말이군.”
기본적으로 여신은 마물들을 배척한다.
그래서 허구한 날 마물 토벌을 부르짖는 놈들을 보면 딱 두 부류다.
교회에서 좀 잘 나가는 놈이거나, 아니면 교회와 연이 있는 귀족이거나.
사실 내가 귀족들에 대해 뭘 알겠냐만은, 예전에 귓동냥으로 그런 얘기를 좀 들었다.
“그렇게 마물들이 기분 나쁘다면 좀 도와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응.”
유니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얘 스승이 그 마물이지, 참.
“이만 가자.”
이 얘기는 슬슬 그만해야겠다.
아직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그녀에게 남아있다면 괜히 더 욕했다가 기분이라도 상할지 모르니까.
“앗.”
“응?”
그렇게 건물을 지나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무너진 교회 안에서 사람이 둘 나왔다.
무척이나 익숙한 남녀 한 쌍.
용사와 에르티나다.
“…유니.”
“에릭….”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상대를 보고,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당신.”
에르티나는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같은 파티원끼리 잠시 외출했을 뿐이야.”
물론 둘 다 믿는 기색은 아니다.
용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잠깐 고개를 돌려봤는데, 그의 얼굴에서는 깊은 수심이 엿보였다.
뭐지?
이쪽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다.
해탈한 건가?
아니, 그렇다기에는 표정이 너무 안 좋다.
마치… 이미 받을 충격을 다 받은 듯한 표정.
뭐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어떻게 하실래요? 당신의 판단에 맡길게요.”
그런 상황에서 에르티나는 용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법 친근해 보이는 태도다.
적어도 유니는 그렇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녀의 손이 치맛자락을 세게 쥐고 있었으니까.
나는 기회다 싶어 자신의 옷자락을 쥔 그녀의 손을 살며시 만졌다.
“…읏!”
유니는 당황하며 용사를 바라봤지만, 그는 고민하고 있느라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
유니가 무언으로 나를 부정하지 않는 틈을 타, 나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옷자락 대신 내 손을 쥐게 했다.
꾸욱.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둘 다, 아니, 오늘 밤에 다 같이 할 얘기가 있어.”
그는 우리가 손을 잡은 것을 봤지만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굳이 반응하지 않겠다는 듯, 잠깐 우리의 손에 머문 시선이 금방 위로 올라갔다.
“……중요한 이야기야.”
왠지 순간 그의 시선에서 분노가 느껴진 것 같은데.
그렇지만 워낙 잠깐이라 나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에르티나는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 때도 제가 얘기를 할까요?”
“…아뇨, 제가 할게요.”
에르티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우리를, 아니, 정확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왜?”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선택 잘하라던 거?”
“네. 잊지 말아주세요.”
대체 뭔데?
짜증나게도 이 여자는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용사, 이만 가죠.”
“…네.”
그는 잠시 유니를 바라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다 몸을 홱 돌렸다.
유니가 무심코 한 발짝 대딛었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마주잡은 그녀의 손에 힘을 꽉 주자 유니는 내딛던 발을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 고개만 푹 숙였다.
“용사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군.”
“…그야, 이제는 연인이 아니니까.”
그녀의 표정은 살짝 울적해보였다.
상황만 놓고 보면 그녀가 마치 버림받은 것 같지만, 사실 잘 따져보면 먼저 배신한 것은 그녀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며 그녀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
상처를 주는 것은 용사고, 상처를 달래주는 것은 나여야 하니까.
잘못이 그녀에게 있다던가,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혼자 있을 때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원망하고, 상처입히지만.
나나 그녀들과 함께 있을 때는 유니가 즐겁고 힘들지 않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녀가 내 온기를 갈구할 테니까.
“적어도 용사는 널 완전히 놓아준 것 같은데.”
“읏….”
“아직 용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그를 생각해서라도 깔끔하게 잊는 편이 낫지 않겠어?”
유니는 내 말에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여기서 확실하게 가볼까.
“반지 줘.”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왜?”
“얼른.”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반지를 하나 꺼내 내 손 위로 올려놓았다.
내가 준 반지였다.
“프흐흐… 이거 말고.”
“읏…!”
역시 들고 있었군 그래.
그녀는 당황하면서 다른 반지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용사가 줬을 그 반지다.
“이제 이런 건 필요 없겠지?”
“그, 그게….”
내가 그의 반지를 쥐고 있자 그녀가 안절부절 못하며 망설였다.
“아니면, 아직도 용사에게 돌아가고 싶은 건가?”
“…….”
이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
“그럼 필요 없는 거 맞지?”
한참의 침묵.
마침내 유니가 말했다.
“……응.”
좋아, 끝.
나는 그의 반지를 그녀에게서 압수했다.
곧장 던져서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좀 상처받을 것 같아 얌전히 주머니에 넣는 것으로 끝냈다.
나중에 안 보는 곳에서 버려야지.
아니지, 함락이 끝난 뒤에 눈앞에서 직접 버리게 하는 편이 더 좋겠다.
나는 그의 반지를 내 주머니 속에 넣어둔 뒤, 그녀가 무심코 건넸던 내 반지를 집어 들었다.
“읏….”
“끼고 다니던 반지가 없으니 역시 좀 허전하지?”
“그, 그게…”
나는 그녀의 손을 쥐었다.
“싫으면 빼.”
나는 그녀의 손에 다시 반지를 끼워주었다.
왼쪽 손 약지.
이 반지는 그녀의 약지에 딱 맞는 크기였다.
잠시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가자.”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딱히 무언가 별다른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내가 반쯤 억지로 끼운 반지를, 그녀는 그 날 빼지 않았다.
***
그렇게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숙소 앞으로 돌아온 저녁.
나는 그녀의 방 앞에서 유니와 헤어졌다.
“어차피 곧 다시 보겠군. 용사가 우리를 불렀으니 말이야.”
“응….”
그녀는 힘없이 대답했다.
“혼자 있을 생각을 하니 쓸쓸한가?”
“아, 아냐….”
그녀는 흠칫하며 대답했지만 그리 설득력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외로우면 잠깐 찾아와도 상관없어.”
“누, 누가 간대…? 그냥, 그냥 생각할게 많아서 그런 거야….”
하긴, 머리가 복잡하겠지.
용사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도 충격이었을 테고, 혼자 남게 되면 또 자기한테는 뭐 슬퍼할 자격이 없다느니 뭐니 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나쁜 새끼는 나니까.”
“뭐?”
갑작스러운 말에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나는 얼굴을 슬쩍 내밀면서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전부 내 탓으로 돌리면 된다고. 내가 나쁜 새끼니까.”
“…아, 알고 있거든….”
유니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고, 내가 더 얼굴을 내밀자 당황하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입술이 거의 맞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간 나는, 각오를 다진 그녀의 머리를 툭툭 쳤다.
“난 간다.”
“…읏.”
그녀는 키스할 줄 알았는지 잠시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곧 자신의 머리를 치면서 자책하기 시작했다.
웃기기는.
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졌고, 그런 나에게서 유니는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기 머리를 치던 유니의 손은, 어느새 내 온기가 닿았던 부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고, 자기 전에 우리는 1층에 모였다.
용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기는 했지만, 다들 하나 같이 용사 맞은편에 앉아있다는 점은 좀 우스웠다.
유니는 우리와 살짝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용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죠?”
아린이 먼저 말을 꺼내자 용사는 잠시 그녀를 보고 망설였다.
“…아마 아린한테는 더 힘든 이야기일지도 몰라.”
“네?”
아린한테만?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용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에 여신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