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212화 (212/236)

〈 212화 〉 [용사] 생각

우리는 계속 마왕성을 향해 나아갔다.

내가 선두에 서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면 유니가 내 곁에 없다는 것 정도.

그녀는 나와 그들 사이에서 걷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 자리에는 에르티나가 있어야했지만, 지금은 둘의 자리가 마치 뒤바뀐 듯 했다.

“…에르티나 씨, 이렇게까지 신경써주시지는 않아도….”

“혹시 불편하신가요?”

“아, 아뇨… 그건 아닌데….”

내 주변에서 걷는 그녀는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사실 나도 누군가 말을 붙여주니까 쓸쓸하지 않아서 좋기는 한데… 다만 나와 일정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 유니와의 차이를 느끼게 해 가끔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내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내가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 것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에게서는 과거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으니까.

또 어느 샌가 나는 에르티나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네, 저도 그를 배신하기 직전까지 갔었죠.”

“역시 그랬군요….”

이 때 들은 그녀의 이야기에서, 에르티나 또한 그에게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본인의 추태를 들려주는 것은 역시 좀 부끄러웠는지, 귀 끝이 살짝 빨갛게 물들어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꿋꿋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는 들어줬으면 하는 본인의 바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 저희는 마족령에서 한참 고착 상태에 빠져있었어요. 당연히 모두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을 했었고, 당연히 그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죠. 그런데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왔어요.”

당시 그들과 맞서던 것은 마지막 남은 사천왕.

그런데 그 사천왕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루아침에 적의 지휘관이 사라져버린 거예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어쨌든 좋은 일이었죠. 덕분에 마왕 공략까지 단숨에 진행될 수 있었고… 그 바람에 그의 계획은 어느정도 실패로 돌아갔죠.”

예상치 못한 진군.

결국 마왕은 에르티나의 마음을 완전히 돌리지 못한 채로 전 마왕과 대면했다.

“그래서 그 때 저는 다시 용사님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죠.”

그렇지만… 결국 실패했다.

용사는 사천왕 중의 하나로 영락해버렸고, 에르티나는 스스로를 봉인해 기약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제가 아직도 용사님을 못 잊는 것은…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르죠.”

에르티나는 마음속에 여전히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용사를 거의 배신할 뻔했다는 죄책감.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서는 자꾸만 유니가 겹쳐 보였다.

만약에… 내가 실패하고, 유니의 마음이 그에게 완전히 기울지 않은 채로 역사가 또 반복된다면, 유니도 이렇게 에르티나처럼 살게 될까?

영원히 마음속에 부채감을 안고?

“…미안해요.”

“당신이 미안해할 이유는 없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우리가 그 용사를… 해골 사천왕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죄책감을 덜어내거나 그럴 기회조차 없어진 셈이다.

“괜찮아요. 어차피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용사가 아니니까요.”

우리도 싸우면서 그가 용사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한 때 마족들로부터 인간들을 수호하고자 했던 영웅의 모습은 남아있지도 않았다.

“혹시, 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있었나요?”

“…여신을 원망했어요.”

그 말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요.”

저번 용사, 세라, 그리고 에르티나까지.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루엘라도 그리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모두가 여신에 대한 적개심을 지니고 있다.

여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적어도, 우리에게 설명이라도 더 해줬으면 좋겠는데….

“잠깐 쉬어가지 그래?”

문득 뒤에서 제렌이 소리쳤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다들 조금은 지쳐보이는 것 같다.

신경을 못 썼구나.

“잠깐 쉬었다 가야겠네요.”

“네, 그래야할 것 같아요.”

우리는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자리에 앉은 채 흘끔 유니를 바라보니 어느새 그녀는 제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적어도 사이좋게 웃으며 하는 회화는 아니었지만, 내가 아닌 그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다.

“…유니.”

이제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거리감.

그녀에게서는 이제 거리감이 느껴졌다.

가끔 꼭 전해야할 말이 있을 때 유니에게 말을 걸면, 유니는 나와 미묘하게 거리를 두려고 했다.

거부까지는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망설임에 더 가까운 신호였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그것이 거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적어도 제렌에 대해서는 그러한 신호가 보이지 않는다.

둘의 거리는 가깝다.

그렇지만 유니는 이를 신경쓰고 있지 않다.

얼굴은 싫어하는 것 같아도, 몸은 거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나는 깨닫고야 말았다.

“유니도 너무하네요.”

에르티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순간 변호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들을 위해 변호하는 내 꼴이 많이 우스울 것 같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니를 욕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잠시 뒤에 다시 그녀를 바라볼 때, 유니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별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걸까.

유니는 마을에서 적당한 크기의 천막을 하나 사 홀로 쓰고 있었다.

적어도 밤중에 제렌이 찾아가거나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저런 모습을 보니 괜히 걱정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것일 뿐, 사실 매일 그가 찾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그래서는 아니겠지?

내 몸뚱아리는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흥분해버린다.

나는 애써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이를 억눌렀다.

간신히 가라앉히고 다시 유니를 바라봤을 때, 그녀의 어깨에는 익숙한 외투가 걸려있었다.

그의 외투다.

제렌이 입고 다니는 외투.

“읏….”

“신관 아가씨가 걸어줬어요.”

에르티나는 그 모습을 봤는지 나에게 귀띰해주었다.

“그, 그렇군요.”

적어도 그가 직접 가서 덮어준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니, 그보다 저런 건 내가 했어야 했는데….

이제 연인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저런 배려쯤은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역시 내 생각이 많이 짧구나.

적어도 나는 바로 그녀에게 외투를 덮어주어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나보다 더 여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다.

괜히 그녀들이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의 곁에 붙어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유니가 그에게 넘어가는 것도….

아니, 이상한 이유를 가져다붙이지 말자.

나는 지금 자꾸만 그가 유니를 뺏어가도 괜찮은 이유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자기 여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이미 본인들에게서 들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어 쓸데없는 생각들을 모조리 털어냈다.

“언제 출발할까요?”

“음….”

마음만 같아서는 편히 쉬게 해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벌써부터 천막을 치고 오늘 일정을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녀가 살짝 깬 것 같은 시간까지 기다려주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유니의 반응이 신경 쓰여 그녀를 계속 살폈는데, 유니는 자신의 어깨에 걸쳐 있는 외투의 정체를 눈치 채고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제렌에게 닿았고, 그가 받을 의사가 없는 것 같자 망설이더니 결국 외투를 들고 우리를 따라왔다.

그녀의 손에서는 외투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야 버릴 수는 없으니 계속 들고 있어야 했지만, 직접 가서 건네줄 수는 없었던 걸까?

유니는 직접 건네줄 생각인지 자꾸만 제렌의 눈치만을 살폈다.

그러나 일부러 제렌이 계속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 유니는 이를 건네주지 못했다.

세리아나 아린도 옆에 있는데.

어쩌면 그와 말을 붙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외투를 돌려준다는 핑계로.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내가 가서 그녀의 말동무를….

“역시 안 가는 게 나을까요?”

“…글쎄요. 적어도 지금의 그녀는 당신을 어려워하는 것 같은데….”

“하아….”

그래, 문제는 가봤자 그녀가 나를 대하기 어려워한다는 것만 깨닫게 될 뿐.

거의 평생을 함께 해온 그녀가 나를 어색해한다는 점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내 대부분의 인생에는 그녀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그녀가 없는 삶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저도 준비를 해야겠네요.”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에르티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도 슬슬 대비를 해야만 하겠지.

그녀가 없는 삶을 살아갈 준비를.

유니는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그녀가 멀어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는 예감을 나는 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가 되는 걸까.

마왕을 처리하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도 고민해봐야겠다.

아직 어떻게 끝이 날지는 모르지만, 잘못될 경우를 고민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힐 이유는 없으니까.

좋은 것만 생각하자.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그런 미래를.

유니가 내 곁에 없더라도, 계속 살아가는 그런 미래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