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용사] 다짐
눈을 뜨니 나는 혼자였다.
도대체 이렇게 혼자서 일어나는 것이 얼마만인지.
그녀가 없는 방은 어딘가 허전했다.
1인실답게 방은 좁지만, 왜 이렇게 빈 공간이 많아 보이는 걸까.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그녀를 생각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내려온 것은 꽤나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유니는 아직 자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일어났을까?
그녀의 방문 앞에서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지나쳐 내려갔다.
지금의 나에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려볼 자격 같은 건 없었다.
1층으로 내려오니 역시 그녀가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에르티나 씨….”
“안녕하세요.”
그녀는 차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테이블에 컵 하나만 올려져있었다.
에르티나는 안타까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때 있었던 일, 죄송하지만 유니에게 들어버렸어요.”
“아, 그, 그렇군요.”
역시 얘기 했구나.
다른 사람이었으면 조금 불편했을 텐데, 에르티나는 아군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에게는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먼저 위로의 말씀부터 드릴게요. 저는 두 분이 잘 되기를 바랬는데….”
“…제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렇게 계속 괴로워하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되어버려요.”
맞는 말이다.
나는 에르티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그, 할 얘기란….”
그 말에 에르티나도 자세를 바로잡고 나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와 당신, 그리고 모두와 관련된 이야기에요.”
그녀의 말에서 무게를 느낀 나는 긴장감을 느꼈다.
“당신이 여신에게 선택받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아, 네….”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신성함이 느껴지는 여신이 나오더니, 나에게 선택받았다는 말과 함께 마왕 퇴치의 사명을 부여했다.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사명이에요. 말하자면 강제로 당신에게 마왕 퇴치라는 임무를 떠맡긴 셈이죠.”
에르티나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별로 여신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이유는, 역시 여신이 모든 것을 꾸몄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녀들은 달라요.”
더 이어질 뻔했던 내 상념을 에르티나가 끊었다.
“뭐, 뭐가요?”
“그녀들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어요. 당신과 함께할 것인지, 아니면 따라가지 않을 것인지.”
그렇지만 결국 모두가 나와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다.
혹시… 혹시 이것도 여신이 의도한 것인가?
“글쎄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확실히 제가 알기로는 거부했던 일이 없었는데… 뭐,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같이할 확률이 높은 사람들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보는 편이 옳겠죠.”
다행… 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그녀들이 이 여정에 함께했던 과정이 자의 없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조금 마음이 불편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만 이미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가 우리의 자유의사고, 어디까지가 여신의 의도지?
“그렇지만 마왕을 죽여야 하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에요. 그녀들은 당신을 돕기 위한 역할에 지나지 않고요.”
“아….”
듣고 보니 그랬다.
용사는 마왕을 죽이고, 용사의 동료들은 그런 용사를 보조하는 역할.
애초에 그녀들이 직접 마왕을 죽이는 것은 아닌 것이다.
“제가 보기에 지금의 그녀들은 당신을 충분히 보조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다들 의지는 있지만, 더 이상 그것이 최우선사항은 아니죠.”
하지만, 아직 유니는….
“저도 마지막 기대를 그녀에게 걸고 있지만, 연인이라는 끈마저 끊어져버렸으니, 솔직히 이제는 장담할 수가 없군요.”
그런가.
어쩌면 그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조차도 유니가 그에게 넘어가는 것은 거의 확실시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마왕보다 그의 사랑을 받는 것이 최우선사항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읏….”
“만약 당신이 홀로 마왕을 죽이러 가고 싶다면, 말씀해주세요.”
“네?”
나 홀로 마왕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죽기를 바란다니까 당연히 가능하겠지.
그녀들을 이곳이나 더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고 나 혼자 빠르게 가서 일을 해결하고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마왕의 목적을 알게 되고, 점점 유대가 옅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굳이 내가 지금의 파티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그 때마다 나는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당신이 그녀들을 버리는 게 아니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들이 먼저….”
“에르티나 씨.”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도 괜찮을까요?”
바보 같은 짓은 아닐까.
조금… 아니, 많이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네, 뭐죠?”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저번 용사는 당신들을 두고 갔나요?”
그 말에, 에르티나의 눈이 흔들렸다.
에르티나가 대답한 것은,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였다.
“…아니요.”
“그 분과 저는 처한 상황이 비슷했다고 들었어요.”
자신을 사랑하던 세 여자와, 이어진 배신, 그리고 운명에 대한 진실.
그는 결국 무너져 내려 마족의 일부로 영락해버렸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당신들과 함께 했던 거군요.”
“……그렇네요.”
에르티나가 과거를 회상하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감고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해요. 제가 괜한 얘기를 꺼냈군요.”
“제안은 정말 감사해요.”
당연히 에르티나 입장에서는 내 처지를 고러해 꺼낸 제안이었으리라.
내가 지금 파티에 남아있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없을 뿐만 아니라 잃을 것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이 파티에 남기로 했다.
그녀들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 때문은 아니고,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자그마한 바람도 아니다.
나는 그저 모두와 함께 끝을 보고 싶었다. 이 눈으로 직접.
거창한 이유나 그래야 하는 이유 따윈 없지만 그러고 싶다.
“역시 조금 바보 같나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에르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용사 같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마치고 방에 올라왔다.
에르티나는 나에게 숙소를 옮기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옮긴다고 했으면 도대체 어디로 안내해줄 생각이었던 걸까.
여기에는 다른 여관이 없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녀가 자는 곳이라거나?
아,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
나는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쫓아냈다.
마땅히 할 것도 없어 가만히 누워있다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방에 누워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그럴 것이다.
여긴… 묘하게 익숙한 공간인데.
낯설지만 어딘가 낯익다.
평범한 가정집 같은데.
촌장님 댁은 아니고.
그럼 어디지? 내가 촌장님 댁 말고 다른 집에 방문한 적이 있던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유니.
여기는 꿈속에서 봤던, 나와 유니의 집이다.
저벅저벅.
누군가 닫힌 문 너머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 유니?
설마 유니인 건가?
아, 아니, 그보다 갑자기 왜 이런 꿈을?
내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이 문이 덜컹 열렸다.
“짜잔!”
그녀는 양손에 동그란 빵…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저런 것을 케이크라고 부른다고, 세리아 아니면 아린이 가르쳐줬던 것 같다.
“…뭐하는 거예요?”
나는 케이크를 들고 있는 세라를 보며 물었다.
“이거 제가 직접 구운 거예요. 아, 꿈이라서 요리는 안했지만요. 아하하!”
그녀는 재밌다는 듯 이상한 농담에 웃으면서 방 안에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기념으로 가져왔어요.”
“기념?”
내가 되묻자 그녀는 실망한 눈치로 나를 보았다.
“…잊어버린 거예요?”
“뭐, 뭐를요?”
뭐가 있던가…?
“하아… 벌써 까먹은 거예요? 오늘은 저희 결혼기념일이잖아요.”
“네…?”
아차, 그런 중요한 날을 까먹고 있었…
아니, 잠깐만!
“무, 무슨 소리에요! 그런 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
“앗, 안 속네.”
그녀는 슬쩍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뭐, 사실 기념이라는 말은 맞아요.”
“무, 무슨 기념인데요?”
세라가 자신의 꼬리로 케이크를 자르자,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케이크가 깔끔하게 나뉘었다.
그녀는 그 일부를 자신의 꼬리 위에 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포기하지 않은 기념.”
케이크는 내 시선으로부터 정확하게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케이크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이랄까요?”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
누군가를 조롱하는 웃음은 아니었다.
“저, 저는 그냥….”
“보통 다들 거기서 나갔을 거예요.”
오늘 에르티나와 했던 얘기겠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내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뭐, 거기서 대뜸 나가겠다고 할 정도로 과감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쿡쿡 웃었다.
“그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네요.”
“으, 으읏….”
뭐지, 이렇게 들으니 굉장히 부끄럽다.
“자, 제 꼬리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드세요.”
쿡쿡.
그녀의 꼬리가 내 입가를 찔렀다.
“자, 잠깐… 제가 손으로 먹을 테니까….”
이대로 받아먹기에는 조금 미안해서 나는 손으로 케이크를 집었다.
“단 거 좋아해요?”
“…시, 싫어하지는 않아요.”
사실 좋아하는 편에 가깝지만, 왠지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거 많이 다니까 주의해요.”
한 입 베어 물자 과연, 역시 달콤한 케이크였다.
“많이 다네요.”
정말로… 단 케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