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짐꾼] 변화
“헤어졌어.”
다음 날 저녁, 잠시 용사에게 갔다 온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헤어졌다고?”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야?
“이런 내가 에릭의 연인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잖아.”
그녀는 담담해보였지만,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걸로 정말 좋은 거냐?”
“……응.”
그녀는 그렇게 답했지만, 살짝 돌린 고개에서는 이를 부정하고픈 그녀의 마음이 묻어났다.
드물게도 세리아와 아린도 입을 다물고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은 없는 것이겠지.
“흐음… 그럼 이제 용사를 위해 날 찾아올 필요는 없어진 거네?”
더 강해질 필요는 없고,
연인도 아닌 남자의 성적 취향을 맞춰주어야 한다는 변명도 쓸 수 없다.
“그렇… 지.”
그녀는 나를 힐끔 쳐다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안기러 온 게 아닌가봐?”
“…응.”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그렇게 대답했다.
하긴 둘의 관계가 끊어져버렸는데 곧장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길 기분이 나지는 않겠지.
사실 억지로 잡아끌면 그녀도 크게 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 된다, 안 된다 하면서 결국 나에게 안기겠지.
그렇지만 그래서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가 힘들다.
여기서는 조금 물러나볼까.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군.”
“응?”
살짝 당황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유니를 향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왜, 설마 내가 막 차인 여자를 꼬시는 그런 쓰레기라고 생각했나?”
뭐, 사실 맞지만.
“그런 거라면 나도 좀 자제해보지. 당분간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군.”
그녀는 살짝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정작 진심으로 거부할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면서 괜히 챙기는 척 하기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굳이 그녀를 더 상처입힐 필요는 없었으므로 그 말은 목 뒤로 삼켜버렸다.
“…그럼 가볼게.”
유니는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런데 저러면 방은 어떻게 해결하려나?
***
다음 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유니는 밤을 샌 건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중간에 쉴 때마다 꾸벅꾸벅 졸았다.
용사는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지만… 그녀 때문에 하루 더 쉬어갈 수는 없는 노릇.
유니 본인도 그러기를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다음 목적지는 인간들이 남아있는 마물들의 도시.
마왕성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나름 중요한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유니, 당신….”
“아하하… 그렇게 됐네요.”
유니는 에르티나에게도 용사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녀는 곧장 나를 노려봤지만, 뭐… 그녀가 나에게 복종하기 위해 헤어진 것은 아니니까.
그 동안 항상 유니와 붙어있던 용사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용사 입장에서는 우리와 함께 다닐 이유가 없을 텐데.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유니와도 관계가 끊어졌고, 이제 정말로 혼자 마왕성까지 찾아가겠다고 해도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러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면 아마 고민 중인 게 아닐까 싶다.
그 동안 항상 그녀들과 파티를 짜고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혼자가 되었으니 조금 어색해질 만도 하지.
아마 조만간 본인이 스스로 결론을 내릴 것이다.
정말 혼자가기로 마음먹는다면 뭐… 우리는 여기까지인 거겠지.
도중에 몇 번이고 유니를 흘끔 바라보기는 했지만, 용사는 더 이상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유니는 에르티나와 같이 다녔다.
용사에게 미련이 남은 것처럼 굴지는 않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상일 뿐, 그녀는 에릭이 자신을 보지 않을 때마다 아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했다.
내 쪽으로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그렇지만 표정이 조마조마한 것이, 곧 제발로 찾아오든 그런 티를 내든 무언가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일단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는 별 다른 조짐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우리는 인간들이 사는 마물의 마을에 도착했다.
마물의 마을이라고 해서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인간들이 마물들의 밑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딱히 그들의 삶이 크게 개선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냥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역시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네.
역시 윗놈들이 지껄이던 말은 전부 헛소리였다.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가 가죠.”
에르티나는 이 마을에서 하루 쉬어가자고 제안했다.
용사도 순순히 그러기로 했으므로, 우리는 이 마을의 여관에 방을 잡았다.
3인실 하나와, 1인실 두 개.
“…유니.”
“괜찮아요.”
유니는 에르티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열쇠를 챙겨 방으로 올라갔다.
“…당신들.”
유니가 먼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에르티나는 나와 용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아… 이것도 어쩔 수 없는 흐름인 걸까요.”
체념.
루엘라에게서도 느껴졌던,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저 반응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용사. 내일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할 얘기가 있어요.”
용사는 잠깐 놀란 듯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확인을 받은 에르티나는 나를 바라봤다.
“당신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랄게요.”
“무슨 소리야?”
“…제 말을 마지막 순간에도 기억해주시길.”
에르티나는 그 말을 끝으로 가버렸다.
용사와는 아침에 다시 만날 약속을 잡고서.
마음에 안 든다.
무언가 아는 척하면서, 정작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저 태도가.
용사는 나를 힐끔 거리더니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저희도 가죠, 주인님.”
세리아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현명한 판단이라….
내가 판단을 내려야할 때가 있다는 소리란 말인가?
“알았으니까 그만 잡아당겨.”
나는 사이좋게 내 팔을 잡아당기는 그녀들의 머리에 살짝 꿀밤을 먹이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래, 우선은 유니에 대한 일부터 생각해보자.
***
방에 돌아온 우리들은 유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쥐어짜보았다.
“…역시 그녀의 마음을 얻어야….”
“그래서야 노예가 아니라 그냥 연인이잖아.”
툴툴거리는 세리아는 무시하고.
“흠, 마음이라.”
“어쨌든 지금 유니는 연인이 없는 상태잖아요? 주인님이 그 자리를 차지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는 못한다는 말이죠.”
아린의 말대로다.
원래부터 그것을 노리고 그녀를 내버려뒀던 것이기도 하고.
“그러면?”
“일단 데이트부터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 뒤로도 여러 얘기가 오갔지만, 결국 우리가 선택한 것은 이쪽이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마음을 잡는 것쯤은, 쉬울 것 같기도 하면서 어려워보이기도 한다.
뭐, 아무튼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지.
“그럼 갔다온다.”
“네.”
“잘 하고 오세요.”
그녀들의 응원을 받으며 나는 방을 나섰다.
왠지 나가기 전에 세리아와 아린의 불만어린 듯한 투정이 들린 것 같기도 한데….
자기들은 몇 번 해보지도 못한 데이트를 내가 그녀와 하려 하니 마음에 안 들기는 하겠지.
내키지 않으면서도 나를 위해 자기 감정을 접어두고 충실하게 조언하는 부분은 귀엽게 느껴졌다.
조금 더 신경을 써줘야 하나.
아니, 유니로 그녀들을 애태우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유니의 방 앞에 섰다.
똑똑.
안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야.”
“…….”
끝까지 대답 안 할 생각인가.
나는 문에다 대고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듣고 있겠지? 어차피 그렇게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안 돼.”
과연 듣고 있을까.
이래놓고 사실 방 바깥에 있었다거나 그러면 더럽게 쪽팔리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방 밖에 나가는 소리나 모습은 못 봤으니까… 아마 안에 있을 거다.
“내일 오전에 나와. 기다리고 있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갔다.
괜히 가타부타 이유를 덧붙이는 것보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안 오면 뭐… 다른 수단을 생각해봐야지.
적어도 지금 강경책을 쓰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녀에게 선택권을 쥐여주는 수밖에.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여관 앞에 나와 앉아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착각하지 마.”
“뭐를?”
“나는… 그냥 바람이 쐬고 싶어졌을 뿐이니까.”
그녀의 말에 난 피식 웃었다.
“…난 그냥 혼자 다니는 것뿐이야. 네가… 멋대로 따라온 거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설픈 변명을 지적하자 그녀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이런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이젠 연인도 아닌데 뭐 어때.”
“…너도 연인이 아니잖아.”
뭐,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연인으로는 남기지 않을 생각이고.
“그냥 둘이 같이 다닐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래? 같은 파티원 아닌가? 안 그래?”
그래, 뭐 남녀 둘이 같이 다니려면 꼭 연인사이여야 한다거나 그런 법이 있나?
그냥 이유 없이 다닐 수도 있는 거지.
“…그냥 변명이잖아.”
“너는 안 그랬나?”
할 말이 없어진 그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어디 갈 건데?”
“글쎄?”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안 했네.
내 무책임한 말에 황당하다는 듯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뭐, 어딘가에는 뭔가 있겠지. 어차피 목적이 있는 외출은 아니잖아? 일단 가자고.”
그렇게 나는 그녀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조금 돌아다니며 느낀 건데, 정말 다른 마을과 별로 구분이 가지를 않는다.
그냥… 마물이 좀 돌아다니는 시골 마을이네.
그 말은 곧, 이 마을에는 볼게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기도 했다.
“하아….”
왠지 맥이 빠진 듯한 유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 저긴 대장간인가?”
“대장간….”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그녀를 데리고 대장간으로 갔다.
“외, 외부인입니까?”
놀랍게도 대장장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 자식, 종족 이름이 뭐더라.
무식하게 크고 근육질 넘치는 이 녀석은 분명….
“트, 트롤….”
“마, 맞습니다. 트, 트롤… 대장장이 합니다….”
이 트롤 대장장이는 적어도 나보다 키가 두 배 이상은 컸다.
어쩐지 지붕이 더럽게 높더라니….
“여, 여기서는 딱히 특별한 일 아닙니다. 트롤… 이런 일 잘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랑은 잘 지내시나요?”
문득 유니가 그런 물음을 던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좀 무례한 질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다, 다들 무서워하지만… 안 때립니다. 괜찮습니다.”
못 때리는 거겠지.
저런 녀석이 얌전히 있어봤자 존재 자체만으로 공포다.
당황스러운 점은 녀석이 생각보다 얌전하다는 점이었다.
그 동안 우리가 만난 마물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대화가 안 통하는 미치광이들 같았는데.
이들도 전시가 아니면 평소에는 이런 것일까.
의외의 일면을 본 것 같다.
“무, 무언가 살 것이라도?”
“아, 음… 뭐가 있죠?”
유니의 시선이 걸려있는 무기와 장신구들 중 한 곳에 닿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반지인가.
“저걸로 하나.”
“음, 연인… 반지 선물, 좋습니다….”
“응?”
반지가 왜?
듣자하니 먼 곳의 풍습 중에 그런 게 있다고 한다.
배우자에게 반지를 선물한다라.
노예에게는 과분한 선물이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홱 잡아서 확인해봤다.
“뭐, 뭐하는 거야!”
“크흐흐, 그래서 끼고 있던 건가?”
그녀는 여전히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용사가 선물해준 것이겠지.
아직 그를 완전히 잊지 못했다는 증거다.
나는 그녀의 새끼손가락에서 억지로 반지를 빼냈다.
“잠깐만… 하, 하지 마…!”
“싸우면 안… 됩니다.”
“싸우는 거 아냐.”
허무하리만치 반지는 쉽게 빠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는, 내가 산 반지를… 좀 남네.
반지가 새끼손가락보다 더 크다.
그래, 여기라면 들어가겠군.
나는 그녀의 약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그녀는 잠시 자신에 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바라봤다.
내가 뭐 미술 같은 분야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용사가 끼운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기, 기분 나빠.”
“그래서 버릴 건가?”
그녀는 자기 손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없이 내 반지를 빼버렸다.
그렇지만 버리지는 않았다.
“선물은… 받을게.”
마치 마음은 못 받겠다는 말투.
사실 나는 생각도 없는데, 좀 우습긴 하다.
“나중에 나를 찾아올 거면, 그걸 끼고 찾아와.”
“…….”
유니는 잠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그건… 돌려줘.”
“아, 이거 말인가?”
용사가 사줬을 그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녀가 탁 낚아채갔다.
“이젠 끼울 필요 없을 텐데.”
“읏….”
그녀는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려다가 멈칫했다.
“아니면 아직도 연인 기분을 내고 싶은 건가?”
“…….”
내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점이 있었는지, 그녀는 용사가 준 반지를 끼우는 대신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이제 아무런 반지도 끼어있지 않았다.
내 반지도, 그의 반지도 없다.
그러나 머지않아 하나의 반지가 그녀의 손에 끼워지리라.
둘이나 비어있지도 않은 단 하나의 반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