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용사] 마침표 (수정)
나는…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내가 했던 말이 그녀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사실… 정말로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실수를 했더라도, 아무튼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무시하지 않았던가.
아니, 애초부터 유니가….
아니, 아니다.
지금 누구를 탓하는 건 그만두자.
어차피 의미 없는 짓이다.
유니는 상처받았겠지.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위로한 것은… 그 남자.
나에게 유니를 위로할 자격 같은 건 없는 걸까.
그래서 돌아와 버렸다.
이대로… 이대로 돌아온 것이 과연 잘한 짓이었을까?
방에 돌아오고 나서도 나는 홀로 고민을 거듭했다.
유니… 유니….
마음속 한편에서 그녀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다른 쪽에서는 무슨 자격으로 내가 그녀를 탓하겠냐는 자학적인 마음이 동시에 솟아났다.
그래, 결국 모든 것의 문제는 나 아닌가.
내가 그런 성욕을 가지고 있지만 않았어도.
나에게 모든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전부, 내가 잘못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다른 것을 원망하고 싶어졌다.
***
“그… 아니다, 말 가려서 뭐한담. 좀 머저리 같네요.”
“윽….”
세라는 한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그걸 또 가만히 보고만 있었대. 아예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오지 그랬어요?”
“그, 그 정도는….”
…아, 아닌가?
그 정도 맞나…?
어느새 홀로 고민하다 잠든 나는 꿈에서 우연찮게 나를 찾아온 세라에게 고민하던 것을 그대로 들키고 말았다.
적인데 말해줘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내 정신이 말이 아니었기에 그녀가 살살 구슬리자 그대로 전부 털어놓고 말았다.
나도 참… 한심하다.
“뭐… 그래도 아예 이별할 생각이라면 나쁘지 않죠. 상처를 완전히 후벼 파버렸으니.”
“윽, 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후후,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걸요.”
“으, 으으….”
어쩌지?
실망… 했으려나?
“여, 역시 이제는 가망이 없겠죠?”
“아니, 한심하게 또 왜 그래요? 뭐, 그렇게 당신을 변명삼던 여자는 그냥 잊어버리는 게 어때요?”
…말하는 본인도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어야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당당했다.
“하아….”
“여기서 후회하면 뭐해요? 정 마음에 안 들면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돌려받던가요.”
그렇지만 막상 그러기도 조금 망설여졌다.
돌아가는 게 맞는… 건가?
결국 그러지도 못한 나는 꿈속에서 적에게 위로받는다는 드문 체험을 하고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세라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던 걸까.
시간상으로 보면 그 교회 같던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묘한 기상이었다.
눈을 뜬 나는 자연스레 유니의 자리를 더듬다가 그녀의 부재를 알고는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건가?
설마 이 시간까지도?
다급히 방 밖으로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나는 그들의 방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문은 어느새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소리만 안 들릴 뿐이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열어야 할까?
열었다가 유니를 마주치면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끼익.
그러나 내가 한참을 고민하다보니 저쪽에서 제멋대로 문이 열렸다.
“…에릭 씨?”
“아린….”
그녀의 뒤로 살짝 보이는 공간에는 아무도 비치지 않았다.
“후후… 걱정되어서 오셨나봐요?”
“유, 유니는…?”
“응? 아하….”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고 웃음을 흘렸다.
“유, 유니는 어디 있어….”
“버리고 돌아간 거 아니었어요? 이제 와서 다시 미련이 남나요?”
“무, 무슨 소리야. 나는… 나는 그런 게….”
“유니는, 당신을 포기했어요.”
윽….
그 말에 나는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해서 돌아갈 수가 없다네요.”
“뭐… 라고?”
“앞으로도 찾질 말아 달래요.”
“유니….”
내 표정을 본 그녀는 잠시 키득키득 웃더니 내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농담이에요.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으읏… 그, 그런 농담은 하지 마.”
그래… 유니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 리가 없지.
“으음… 미안해요, 농담이 좀 심했네요. 유니는 에르티나 씨와 함께 있어요. 지금쯤 한창 훈련 중일걸요.”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심했다 싶었는지 그녀는 순순히 사과하면서 그녀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알았어.”
“조금… 복잡한 기분일 거예요. 솔직히 유니가 잘 한 건 없지만, 뭐… 감정이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잖아요?”
미안함의 대가인지 약간의 충고를 얹어준 그녀에게 무언으로 대답한 나는, 복도를 내려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과연 지금 찾아가는 게 옳은 선택일까.
나는… 나는 유니를 무슨 얼굴로 보아야 하지?
“제 생각에는 두 분 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네요. 어차피 저녁이 될 무렵에는 다시 올라올 테니 잠시 머리라도 식히고 계세요.”
“…….”
아린의 충고를 그대로 따르자니 왠지 약간 반발심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 유니의 얼굴을 보기가 거북했던 것은 사실이므로 나는 결국 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유니는 에르티나와 함께 있다라….
분명 멀쩡한 상태는 아니겠지.
에르티나가 그런 사실을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그녀는 유니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잠시 정령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차피 훈련을 안 받은 나는 이런 곳에서 정령을 쓰지도 못하는데다가 설령 가능하다 한들 유니에게 전부 들통 나고 만다.
괜히 그녀를 더 자극하지 말자.
나는 우선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들어오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
몇 배로 늘어나버린 것 같은 기나긴 시간이 지나, 마침내 그녀가 돌아왔다.
방 앞에서 발소리가 들리던 그 시점부터 나는 유니가 돌아왔음을 알았다.
저벅저벅.
방 바로 앞까지 걸어오던 그 발소리는, 어느새 문 앞에서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돌아오는 것은 그저 침묵뿐.
나도 유니도 서로 문을 사이에 두고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유니는 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
내가 열어야 할까?
그렇지만… 내가 열면 그녀가 당황하지 않을까?
문고리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던 내가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을 때, 문이 덜컥하고 열렸다.
“아….”
“앗.”
우리는 서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서로를 보았다.
“읏….”
“윽….”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한 어색함이 우리를 찾아왔다.
“…나 왔어.”
“어, 어서 와.”
그녀가 먼저 평범하게 말을 꺼낸 바람에 나도 습관적으로 대답해버렸다.
유니는 머뭇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마치 자신의 방이 아니라 남의 방에 온 듯한 태도였다.
내가 자리를 슬쩍 비켜주자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평소보다도 훨씬 떨어진 위치였다.
“…에릭.”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미, 미안.”
우리는 동시에 사과했다.
“…에릭이 왜 사과를 해?”
“유니가 사과할 필요는….”
또 말이 겹쳤다.
우리는 잠시 멍한 눈으로 서로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마치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우리 사이의 어색함도 구멍 뚫린 항아리마냥 서서히 흘러나갔다.
“에릭이 사과할 일은 아니야. 내가… 내가 에릭을 핑계 삼은 것뿐이었으니까.”
“아냐. 나, 나는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말리지 못했어.”
“역시 알고 있었구나.”
유니의 말에 뜨끔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티가 났으니까….”
“여, 역시 그랬구나.”
그녀가 나에게 과시하듯 보여준 것은, 그래서였구나.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으로 또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유니는 나를 바라보았다.
“응. 그러면 에릭이 더 좋아해줬으니까.”
“…….”
역시 내 일그러진 취향이 불러온 결과인가?
가슴 한편이 찝찝하다.
이 복잡한 기분은 대체….
“스스로를 탓하지 마, 에릭. 그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 에릭이 좋아서 그런 취… 향을 가진 게 아닌 걸.”
정말 의아하기는 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취향을 갖게 된 걸까.
태어났을 때부터?
분명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지만… 어쩌면 그 때는 내가 자각을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기, 에릭…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나, 어떡하면 좋을까?”
유니는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와의 관계를 청산해야할지, 아니면 이 상황을 계속 이어나갈지.
그녀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
“누구랑 할 때가 더 기분 좋아?”
유니는 내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시선을 밑으로 내려 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남자가 더 잘해.”
“읏….”
그래, 차가워진 내 머리와는 반대로 내 몸은 흥분하고 있었다.
마치 머리와 하반신에 각자 다른 뇌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에릭보다 더… 능숙하고, 더 기분 좋게 만들어줘.”
유니는 슬픈 눈으로 계속 말했다.
“그에 비해 에릭은….”
그만….
유니는 내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알 것 같아.”
“…뭐를?”
“왜 그녀들이… 그 남자를 섬기는지.”
“읏….”
유니는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잠잠하지 않았다.
“에릭.”
그녀는 무언가를 각오한 사람처럼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이건 역시….
“우리….”
내가 이걸 들어도 되는 걸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여기까지만 하면 어떨까.
앞으로는 하지 말라고 하고 다 잊은 척, 다시 그녀를 붙잡아서….
“여기까지만 하자.”
울 것 같은 내 얼굴에, 그녀가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에릭을 핑계 삼지 않을게.”
“유니….”
그녀는 내 눈가를 닦아주면서 내 머리를 그녀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나는 잊어줘. 가슴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
유니….
그녀의 잘못… 내 잘못… 다른 무언가의 잘못.
생각은 복잡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에릭….”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 위에 자신의 볼을 얹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그렇게 우리 관계에는 마침표가 찍혔다.
***
“유니 너도 그… 그녀들처럼 되려는 거야?”
“노예… 말하는 거야? 아니,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유니는 솔직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냥, 에릭과의 관계가 예전처럼 되돌아간 것뿐이야. 이런 상태로는 너의 연인으로 남을 수가 없잖아.”
“유니….”
그냥 나와의 연인관계를 그만두는 것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제 우리 둘은, 단순한 파티원이 된 것이다.
연인도 그 무엇도 아닌 그저 같은 파티원.
그렇지만 더 이상 나와 연인이 아니라는 말은….
그녀가 그 남자의 연인… 혹은 노예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 내일부터는 나도 다른 방을 쓸게.”
“……응.”
천천히, 우리의 여정은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곧… 끝이 다가온다.